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328
328화. 절심단의(絶心丹衣) (3)
달빛은 흐렸고, 별빛은 총총하다.
바람이 불어오면 별빛이 우수수 빗방울처럼 쏟아지기라도 할 듯했다.
단청은 요령사자를 제압한 허름한 선방 앞을 지키듯이 앉아 있었다.
가부좌를 취하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그리고 달빛이 떠오르는 검은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무릎 위에는 검을 올려놓고서, 주변처럼 단청 또한 한참 고요한 모습이었다.
문득 바스락거리면서, 마른 잡초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도우빈이었다. 아이는 편히 다가와서 단청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청도 달리 운공을 하는 건 아니어서, 아이에게 눈을 돌렸다.
“나선 혈도승 분들께서는 아직 소식이 없느냐?”
“예, 아직 없네요. 어찌 되었을까요?”
“글쎄. 생각보다 시간이 꽤 흐르기는 했지만, 잘 끝났을 거다. 아무리 사령이라는 자가 무시무시하다고 해도, 광륜 스님이라고 하셨던가? 그분이 꺾일 리는 없을 듯하구나.”
“흐음, 대사형은 확실히 무시무시하시죠.”
도우빈은 단청의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에는 다른 혈도승 사형들이 더욱 살벌했지만, 이제는 자신도 머리가 조금 더 굵었고 무공을 보는 눈이 뜨였다고, 광륜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도우빈은 광륜에게서 혈도조사와 닮은 살기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광륜이 꺾일 리가 없었다.
단청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혈도승도 그렇지만, 눈앞에 있는 도우빈, 이 녀석도 실상 혈도승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아니, 가만. 그런데 너는 왜 아직도 빈손인 게야? 너도 혈도를 받았다면서.”
“그게…… 거하게 해먹었잖아요. 그때의 혈도는 조사께서 공력을 다하셔서 직접 제련하신 건데. 그걸 무참하게도 박살 내 버렸으니까 말이에요.”
“오호라, 그래서 무슨 경을 칠지 몰라서 본파까지 도망을 오셨던 거로군.”
“그,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하핫.”
결국 잡으러 온 요광에게 붙들려서 혈사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단청은 가벼운 웃음만 흘렸다. 굳이 놀리겠다고 꺼낸 말은 아니었으니까.
‘뭐, 생각하면 이 녀석이 나보다는 낫지.’
도우빈은 직접 받기라도 했다면, 자신은 스승의 검을 슬쩍하여서 종남파로 숨어들었다가 호된 꼴을 당했으니까.
단청은 입술을 잔뜩 삐죽거리는 도우빈을 웃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에이, 요광 사형도 참.”
도우빈은 다시 생각해도 골이 나는 모양이었다.
언제까지고 종남파에 숨어 있을 수야 없는 일이라고 해도, 혼나는 일은 가능하면 한참 뒤로 미뤄 두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겠나.
도우빈은 곧 한숨을 삼켰다. 대웅전에 뻗어 있는 걸 생각하면, 요광을 내내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도우빈은 단청을 힐끔 보면서 넌지시 말했다.
“그래도 두 분이랑 같이 온 덕분에 조금이라도 덜 혼나기는 했네요.”
“하하, 그래그래. 그렇다고 내내 입 다물고 있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닐 게다. 말씀은 올려야지.”
“그, 그럴까요?”
단청은 헛웃음과 함께 달래듯이 말했다. 도우빈은 영 자신이 없었다.
단청은 도우빈이 말끝을 흐리면서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을 보고는 주저하는 속내가 그대로 보였다.
“쯧쯧,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아주 잘 알겠구나.”
“윽, 보, 보여요?”
“그럼 아주 잘 보이지. 아무리 정신없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혈도조사께서 무엇 하나 잊고 계실 성싶으냐? 가만히 있으면 있을수록 나중에 더 크게 혼날걸?”
“켁!”
요 며칠 동안 혈사에서는 오랜 침묵이 무색하게 홱홱 상황이 급변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살정에, 요광 사형에, 이제는 ‘교’의 방술사가 감히 홍련사를 범하여서 밤새 온갖 기이를 마주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혈도조사도 여기까지는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얕은 생각이었지만, 도우빈은 단청의 말에 폐부가 찔린 듯했다.
당장 울상을 지으면서 고개를 푹 떨구었다.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러다가 어수선한 소리에 목을 세웠다.
“어엇? 드디어 끝난 모양이네요.”
“음.”
다가오는 소리가 왁자지껄한 걸 보면, 큰 피해는 따로 없이 잘 마무리한 모양이었다.
혈도승과 고진무, 그리고 흑건아가 주변 상황을 모두 마무리하고 돌아왔을 때에는 달도 저물어 갈 즈음의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
따로 자전사령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없었다. 무너진 암자의 폐허에 그대로 불태우는 것으로 정리를 마무리했다.
다른 뒷정리라면 굳이 공들일 것도 없었지만, 자전마기가 폭주하면서 주변에 마른 불씨가 튀어 오르는 통에, 그것을 다잡는다고 시간이 꽤 걸렸다.
다들 검댕이 그득한 꼴이었다.
“체헷, 하마터면 통구이가 될 뻔했네.”
“바람이, 바람이 문제였지.”
여기저기서 툴툴거렸다. 그러다가 비슷하게 시커먼 꼴로 있는 흑건아를 힐끔 보았다.
“여봐, 술사. 흑도사라고 했나?”
“헤, 헤헷. 예.”
“덕분에 고생은 덜했어. 자네 술법이 그래도 쓸 만하고만.”
“어이쿠, 어이쿠, 과찬이십니다.”
흑건아는 넙죽넙죽 고개를 숙였다.
불씨가 크게 벌어지려는 것을 흑건아가 급히 방풍부를 던져서 크게 번질 뻔한 불을 다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와중에, 고진무는 한쪽에서 한숨 삼키는 광륜을 잠시 바라보았다.
일도 잘 마무리한 셈이련만, 광륜은 한참 불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더 나아가지 못함을 탓하시는 건가.”
고진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신검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면, 당연하게도 모든 게 부족하게만 느껴질 터였다.
고진무는 잠시 복잡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저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 정도가 아닐까.
고진무는 허리 뒤에 삐죽 솟은 청명검에 손을 올렸다.
폐관에 들면서 제대로 청명검을 뽑았을 때에 법보에 이른 청명검의 기억을 쫓아서, 저도 모르게 신검의 한순간을 같이 나눈 바가 있지 않았던가.
성마를 따르는 무시무시한 마귀, 그를 거침없이 베어 버린 신검의 일검, 그 궤적은 지금 눈 감아도 한참이나 선명했다.
뿐만이 아니라 까마득한 격차 앞에서 덜컥 자신을 잃을 듯했다. 그래도 결국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었다.
고진무는 복잡한 기색으로 털썩 주저앉는 광륜을 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신검은 신검. 천살도의 비의는 또 다를 터인데…… 그래도 곧 깨달으시겠지.”
광륜은 왁자지껄한 소리를 등지고서 앞마당 아무 곳에나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무릎 앞에 혈도를 내려놓고는 팔짱 낀 채 미간을 잔뜩 모았다.
서슬 퍼렇게 있는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 다가섰다.
“아니, 대사형. 일도 잘 끝낸 마당에 왜 그러고 있어요?”
“부족해, 부족하단 말이지.”
“뭐가 부족하다는 거요?”
“내 칼이 부족하다.”
광륜은 고개를 한껏 꺾으면서 새삼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허헛? 그렇게 뚝딱 해치워 놓고서?”
“뭘 뚝딱 해치웠다는 말이냐! 몰려오는 걸 받아 내기만 했을 뿐이 아니더냐. 그 사령 놈이 제풀에 지쳤으니, 이렇게 끝났을 뿐이다.”
“에엑?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광륜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그치듯 말하자, 광효와 도광, 그리고 모여든 광자배 혈도승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소란을 같이 마주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은 비록 여파에 불과했어도, 튀어나오는 자전마기를 직접 걷어 내면서 그 위력을 실감했다.
광륜의 붉은 칼은 자전마기 앞에서 도도하게 궤적을 그려 나갔고, 마기는 힘없이 갈라지고, 흩어졌다.
쉽게 말하는 게 아니라, 광륜이 이룬 경지가 오히려 신기할 참인데.
이렇게 속이 다른 말을 하다니.
“칼, 칼에만 머물러 있단 말이야.”
광륜은 얼굴을 구긴 채, 자신의 혈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집중하려는 모양이었지만, 사제들은 그렇게 놓아두지 않았다.
“대사형, 뭔가 성취를 구하는 건 좋지만, 그래도 일단 조사께 보고는 하고 나서 고민하시죠.”
“뭐얏?”
광륜은 도광이 슬쩍 건네는 말에, 잔뜩 구긴 얼굴을 그대로 돌렸다.
이때에 그런 걸 말하기냐, 라고 되묻는 눈초리였지만, 도광도 그렇고 광효도 옆에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 직접 상대한 건 대사형이잖수. 우리는 그냥 주변에서 지켜만 봤는데 뭘.”
“그렇지, 그렇지. 듣자니 지금 대웅전에서 요광 녀석 상태를 보고 계시다네요.”
“하아, 나 이런 놈들을 사제랍시고.”
진지하게 집중하려는 참에, 이런 식으로 등을 떠밀다니.
광륜이 눈초리를 험악하게 떴지만, 그 정도에 눈치 보는 혈도승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시 재촉했다.
“아, 어서요. 우리가 대신할 수 있는 일도 아니잖수.”
“보고가 늦다고 나중에 같이 혼날 일 있어요.”
“전에 보니까, 조사께서는 성질은 여전하시더이다.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흐읍…… 그, 그건. 그렇지.”
광효가 십 년 전을 운운하자, 광륜은 퍼뜩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 일에는 자신도 한 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광륜은 에효, 한숨을 삼키고서 기세가 한풀 꺾인 채 느릿느릿 무릎을 쥐고 일어섰다.
밤이 늦은 때라고 하지만, 혈도조사는 뜬 눈으로 대웅전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흐리게 밝힌 유등이 누워 있는 요광 모습을 비추었다.
혈도조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요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요광은 우스꽝스러운 부적으로 얼굴을 덮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괴한 꼴이라고 해도, 숨소리는 한결 차분했다. 옆에서 약불 대사가 요광에게서 펼친 침을 거두고서, 상태를 신중하게 살폈다.
“어떤 것 같나? 이 녀석의 상태는?”
“혼백이니 하는 쪽이야 빈승으로서는 짐작 못할 일이니, 따로 드릴 말씀이 없구려. 그것을 제외하고 말하면, 확실히 좋아졌군요. 차도가 분명히 있어요.”
“그래? 그럼 근맥은?”
“허어, 아미타불. 선배. 그쪽으로는 생각조차 마세요. 차도가 있다고 해도, 한두 해 정도로는 나을 만한 부상이 아니라니까요.”
“그렇구먼.”
혈도조사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이 나올 일이지만, 명줄이라도 온전한 것은 천만다행히 아니겠나.
환술이 어쩌고, 대법이 어쩌고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누워 있는 요광이 괘씸하였지만, 누워 있는 녀석을 타박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나.
약불 대사는 곧 진맥을 마치고서 일어섰다.
“그럼, 날이 밝으면 다시 살피도록 하지요.”
“애썼구먼. 고맙네, 약불.”
“어이쿠? 아미타불. 웬일이시오. 선배가 고맙다는 말을 다하시고. 허헛.”
약불 대사는 혈도조사가 건넨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합장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너무 심려 마시구려. 혈도 선배.”
“음.”
약불 대사가 대웅전을 나서자, 혈도조사는 조용히 요광을 내려다보았다. 부적으로 얼굴을 전부 덮은 꼴을 보면서 착잡한 심정이 울컥 치밀었다.
물론 조금도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숨 삼키면서 있으려니, 대웅전으로 광륜이 들어섰다.
“조사 어른.”
“왔느냐.”
“예. 자전의 마공을 쓰는 사령이라는 자는 그대로 처리하였습니다. 틀림없이 그곳으로 왔더군요. 상대하기 어렵지는 않았습니다만, 자전의 여파 탓에 자칫 화재가 일어날 판이라서, 정리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고생했구나.”
“아닙니다. 고생은요. 요광 녀석은 어떻습니까?”
“음, 많이 좋아졌다는구나. 확실히 그 대법인지, 뭔지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모양이야.”
“종남파, 그리고 검귀라 했나요. 진정 큰 도움을 받은 셈이로군요.”
광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파가 명문으로 떠올랐다는 건 알고야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크게 될 줄이야.
광륜은 불현듯 고요하면서도 단단한 기세의 고진무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이라면…… 과연 자전사령을 어찌 상대하였으려나.’
신검에게서 종남파로 돌아간 청명검이다. 이후로 검은 신령을 품어서 누구도 취하지 못하고 있다 들었으니, 고진무는 청명검에게 인정을 받은 셈이 아닌가.
과한 생각일지 몰라도, 그건 신검에게 인정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흐으음.”
광륜은 한껏 고개를 기울이면서 눈썹을 바짝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