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92
92화. 법검후인(法劍後人) (2)
종남산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니. 그러나 단청이라는 아이가 무조궁 제자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나.
우문화청이 문득 고진무에게 물었다.
“진무야, 너는 어찌 보느냐? 손을 나누어 보았으니.”
말 끝나기가 무섭게 다들 고진무를 돌아보았다. 고진무는 눈을 잠깐 동그랗게 떴다. 모인 눈빛에 잠시 흔들렸지만, 곧 미간을 바짝 모았다.
“예, 그게…….”
간밤에 있었던 일을 단순히 떠올리는 걸로 부족했다. 단청이 펼쳐 낸 검법과 경지를 세세하게 기억했다.
“손을 나누면서 눈으로 목격한 바로는…… 지니고 있던 검도 상당한 보검이었고, 검법 또한 역사와 내력이 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견문이 부족하여서, 어느 검법인지는 전혀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만.”
“어허, 그래? 어느 정도이더냐?”
“예, 일검에 청광을 품은 검사기경(劍絲氣勁)을 뽑아 내더군요.”
“호오!”
“검사를!”
다들 낮은 탄성을 흘렸다. 단청의 연배를 헤아리기까지 하면 참으로 놀라운 성취가 아니겠나.
검사, 실처럼 가는 검기를 뜻한다.
검 끝으로 경력을 발휘하는 것 또한 흔한 경지가 아니건만, 어린 나이에 검기를 발하였다니.
종남파의 검법에서는 추구하는 바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검사의 경지를 낮추어서 볼 건 아니었다.
검사를 이루는 데에는 검법의 특징과 함께 내공 또한 크게 영향을 미친다. 적어도 지닌 내가공부는 상당한 수준의 정종심법이라는 것이다.
설명을 들어 보면,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이루어 낸 검사기경도 아니다.
내외공 모두 제대로 단계를 밟아서 이루어 낸 성취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흐음, 일단 내력이 심상치 않다는 건 분명한데. 다만, 그게 무조궁인지가 확실하지 않다는 말이지.”
“듣기로 무조궁 검기는 노을빛처럼 붉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렇지, 그런 기록이 있었다.”
가만히 머리를 맞대고서 숙덕거렸다.
당대에 들어서야 유명무실이라 하지, 무조법검은 강호를 무시로 종횡하면서 온갖 악적을 처단했다.
오죽하면 단불용대라, 용서 없는 검이라 하였을까.
그 기록은 여럿 남아 있었다.
검은 도포에 고검을 지닌 도고, 검을 뽑자 붉은 노을 닮은 검기가 솟구친다.
일 장 길이로 솟은 검기를 휘둘러 떨치니, 한 무리의 도적이 그대로 목이 달아났다던가.
“음, 그 이름이 분명…… 단봉…….”
“단봉조양.”
더듬거리는데, 궁 장문인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는 눈살을 모으고서 나직이 말했다.
“단봉조양의 일초가 그러하였지. 한데 청광검사라고 하면, 또 다른 검법일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동시에 단청이라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일단 울음은 어찌 삼켜 냈다. 대신 입술을 삐죽하고 내민 채 잔뜩 시무룩한 모습이었다.
“어쨌든 아주 무시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허어, 곤란하구나.”
도기홍이 그래도 말을 건네었다. 혀를 차고서 문득 염 장문인이 말했다.
“그래, 너희는 어찌하면 좋겠느냐? 달리 떠오르는 바는 없느냐?”
“무조궁인지 아닌지도 중요하다지만, 일단 본파를 향해서 먼저 손을 쓴 녀석입니다. 마땅히 적도로 보아야지요.”
“그래도 아직은 어리지 않습니까.”
의견을 묻기가 무섭게 주약현이 못마땅한 얼굴로 적도 운운했다.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장에 폐맥금제(廢脈禁制)라도 하여서 가두어 버리자고 한다. 그러자 도기홍이 급히 만류했다.
주약현은 눈썹을 치떴다.
“어린 녀석이라도 검을 들고 검사를 부릴 정도라면 충분한 무림인이지 않소.”
“으음, 그도 그렇지만.”
단청의 처분을 두고서 낮은 목소리로 갑론을박이 이어질 참이다.
고진무는 입술을 꽉 다물고 눈치를 보았다. 이내 슬쩍 뒷걸음질로 물러섰다. 여기서는 자신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마침 그때였다.
혼자 분루를 삼키면서 씩씩거리던 단청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도기홍에게 예의 없다고 꾸지람 들은 것도 그렇거니와 여전히 그물 조각에 묶여서 꼼짝 못 하고 있는 지금 처지가 한없이 분했다.
그런데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고진무가 도둑 걸음으로 물러나는 꼴을 보자 더 참지 못하고 발끈했다.
“너! 너 이 도둑놈! 당장 연청을 내놓지 못하겠느냐!”
“으익?”
설마 도둑놈 소리를 들을 줄이야.
고진무는 어이없는 눈으로 부르르 몸을 떨고 있는 단청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둑? 내가?”
“그 더러운 손으로 연청을! 연청을!”
무엇을 말하는가 하였다가, 고진무는 그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보검의 이름이 연청이었던가.
자기가 놓친 검을 쥐었다고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급기야는 분을 이기지 못하여서 왈칵 울어 버린 단청이었다.
높은 가지에 매달린 채 펑펑 우는 모습이 어찌나 당황스러웠던지. 그 당혹감이 지금 다시 이어졌다.
고진무는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장문인과 사형들의 눈길에 가만히 얼굴을 구겼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시는지요?”
“허헛, 아니다. 크흠. 그런데 연청이라고 함은?”
“그건…….”
“내 검! 내 검 내놔라! 이 도둑놈아!”
“그렇답니다.”
다행이랄지, 고진무가 굳이 설명할 건 없었다.
지금 결박도 풀어 줄까 말까인데, 어찌 검을 내어 줄 수가 있을까.
연청이라는 검은 단청이 발버둥 칠 만한 수준의 명검이었다.
옛적 양식을 따라서 고아한 멋이 솔직했고, 검신은 유연하며, 예기 또한 범상치 않았다. 좋은 정강으로 명공이 충분히 공을 들인 검이었다.
그 연청검은 삼원각에 두고서 고진무는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고진무는 고개를 흔들었다. 귀가 윙윙 울려 대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단청이 어찌나 악을 쓰고 성질을 내었던지.
밤새 그러했고, 삼원각에서도 그러했으니, 아직 귓가에서 성질내는 높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도기홍이 나서서 단박에 입을 다물게 했다고 하지만 귀가 쨍쨍 울리는 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일단 제압한 단청은 따로 두기로 했다. 죄인 취급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손님으로 대할 수도 없으니, 참 애매한 상대였다.
단지 임시방편으로, 처분은 조금 더 고민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고진무는 종남파 산문, 심검관으로 향했다.
산문 앞을 지키는 일은 삼관에서 돌아가면서 맡았다. 정검관 차례에서 막소보가 섰고, 다른 관에서 섰으면, 또 오늘이 정검관 차례로, 이번에는 고진무가 나섰다.
다른 제자와 교대하고서 고진무는 심검관 한쪽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무릎 위에 검을 올려놓고서 새삼 허리를 곧게 세웠다. 산문을 지키는 것은 단지 문지기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후우우…….”
고진무는 불현듯 긴 숨을 밀어냈다.
삼원각에서 일어난 소란을 생각하면 지금은 한참 평화롭다. 절로 내뱉는 숨결이 한참 홀가분했다.
여전히 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장문인과 사형들을 생각하면 참 미안한 일이려나.
고진무는 곧게 앉은 채 종남봉으로 오르는 길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길은 아득하고, 호흡은 차분하다.
무릎 위에 걸친 검초에 손을 올리고서 고진무는 눈으로는 길목을 보고, 귀로는 일대의 바람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았다.
“풍운삼세, 박운…….”
광승이 순약백화공으로 양생의 순양지기를 열양공력으로 발현하였듯이, 자신은 풍운삼세의 거침없는 장영 속에서 박운경을 끌어낼 수 있었다.
고진무는 박운경을 펼쳐 낸 순간을 선명하게 떠올렸다.
위력은 한참 줄어들었지만, 일대를 장악하는 건 훨씬 빠르고 기기묘묘했다. 그 수법 중에는 음풍백기결에서 따온 음풍의 영향도 있었다.
그러나 미완에 불과하다.
한순간 번뜩임으로, 몰아치는 풍운의 장영을 한층 흐린 경력으로 억눌렀을 뿐이다.
깊은 밤이었고, 상대가 경험이 부족하였기에 득수한 것이지, 다른 상황, 다른 상대라면 모를 일이다.
잔재주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고진무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생각해 볼 만하겠어.”
무엇보다 칠성보와 함께 하였을 때에 단청의 이목을 완벽하게 가리지 않았던가.
종남노인이 과거에 칠성보, 단 일곱 걸음으로 수백 명의 검객이 이루는 검진을 무너뜨렸다는 전설이 있다.
어쩌면 이와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한 고진무는 당장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쿠, 내가 무슨 생각을.”
아무리 그래도 조사의 신공과 비교하려고 드는가.
보는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다. 누군가 보고 있었다면 정말 부끄러울 뻔했다.
혼자 심각하다가, 돌연 방긋 웃다가, 또 혼자 낯부끄러워한다.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정신 나간 모습이 아니겠나.
그런데 고진무의 입가에 맺힌 쓴웃음이 한순간 굳었다. 그는 미간을 모으고서 흠칫 고개를 치켜들었다.
“음.”
낮은 신음이 다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렀다.
심검관으로 오르는 돌계단, 그곳에 사람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가 올라오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기세를 드리운 채.
무형의 기세가 흡사 눈에 보일 듯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마냥 느리지도 않았다.
한 걸음을 올라설 때마다 고진무는 저 너머에서 기운이 일렁거리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대체 공력이 어느 정도이기에.
고진무는 퍼뜩 혀끝을 깨물었다. 찌릿한 통증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후우, 정주일여. 정신 차리자.”
뒤늦게 경구를 읊조리고서 정신을 챙겼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만한 기세를 드러내는 사람이라면 단순한 손님으로 오는 것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서운 존재일 것이 뻔했다.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존재감이 이렇게까지 명백하다.
아직은 살기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한순간 살기로 돌변할 수도 있었다.
‘보화를 노리고 쫓아온 이들일까? 아니면 ‘교’에서?’
심검관 처마 그늘에서 고진무는 계단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산바람이 불어오고, 흙먼지가 바람에 쓸려서 흩어졌다.
얼마나 있었을까. 사람 모습이 곧 불쑥 솟아올랐다.
걸음, 걸음은 차분하다. 드리운 햇빛을 받아서 역광이 짙었지만, 고진무는 다가오는 이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올려 묶었고, 건을 둘렀으며, 검은 도포를 늘어뜨렸다.
막 장년 즈음에 접어들었을까 싶은 여도사, 도고(道姑)였다.
도고는 왼손에 한 자루 불진을 쥐고, 오른쪽 소매에 걸친 채 차분하게 다가왔다.
안색은 고요하나, 드리운 기세는 더욱 묵직하여서 어깨를 짓누를 듯했다. 그래도 고진무는 도고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심검관 앞에서 멈춰 서자, 비로소 한걸음 나섰다.
고진무는 두 손을 맞잡으면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종남제자 고진무라 합니다. 도고께서는 본파에 용무가 있으신지요.”
“…….”
정중한 모습.
도고는 우선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그는 심검관 편액을 보고, 다시 고개를 내려서 예를 갖추고 있는 고진무를 보았다.
물끄러미 보는 눈매가 한층 가늘어졌다.
고진무는 고개를 숙였지만, 그 눈초리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찌르는 듯한 눈초리였으니.
‘일단 좋은 기색은 아닌데…….’
고진무는 새삼 입안이 바싹 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