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 the Dragon RAW novel - Chapter (152)
* 152화 *
‘다 이유가 있겠지.’
이한은 오래 전에 사일런스의 얼굴을 캐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다. 사일런스가 스스로 밝히지 않는다면 강제할 생각이 없다.
-무슨 일이야?
사일런스가 손바닥 크기의 메모장을 꺼냈다.
“아크와 접촉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
이한은 용건을 바로 꺼냈다. 사일런스가 잠시 침묵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알거라 생각해?
“넌 다툼이 아니라 자의적으로 아크에서 나왔잖아. 그리고 그 사이코프레임은 방랑에 최적화된 장비였어. 무단으로 나온 네가 그런 장비까지 쉽게 챙길 수 있었을까? 세팅까지 된 장비를 말이야.”
이한이 예리하게 지적했다. 사일런스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한에게는 어설픈 거짓말이 소용없다.
-아직까지 될지는 몰라. 내가 아는 건 기술부에서 중요 과학자나 기술자를 영입할 때에 쓰는 루트야.
“기술부라면…. 옥토가 너를 도와줬군.”
-응. 네가 살아있다는 걸 알면 옥토도 좋아할 거야.
“그 기계광이?”
-네가 죽고 나서 옥토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넌 상상도 못할 걸.
이한은 갑자기 숨이 멎는 듯했다. 옥토가 자신을 걱정했다고 상상도 못했다.
‘옥토라면 내가 죽어도 시큰둥하게 그래? 라고 말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이한은 턱을 긁적였다.
사일런스는 지도를 꺼내더니 영국을 가리켰다. 웨일즈 서쪽의 항구마을이 하나 있었다.
-연락이 이제 끊어진 곳일 수도 있어. 헛걸음일 수도 있지. 나도 같이 움직일 게.
“넌 여기 있어. 쿠로를 부탁해.”
이한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사일런스가 쿠로의 이름을 듣고 팔짱을 꼈다. 그는 한참 그렇게 뿔난 듯이 있다가 글자를 적었다.
-좀 강해졌다고 기고만장한 쿠로 사.령.관 말이야?
“부탁해. 사일런스.”
이한이 말했다. 사일런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일런스에게 접촉방법을 알아낸 이한은 기회를 노렸다. 당장 시타델을 떠나기엔 오메가-1의 눈이 매서웠다. 그는 이한의 단독행동에 번번히 문제제기를 했다.
이한이 움직일 기회는 의외로 금방 찾아왔다. 시타델에서 멀지 않은 도시에 드래곤들이 출현했다. 간간히 생필품을 챙기러 가던 도시가 쑥대밭이 됐다고 했다. 보고를 들은 오메가-1은 강화병들을 끌고 토벌에 나섰다.
“시타델과 가까워지기 전에 요격해서 처리하는 거야.”
쿠로가 이한에게 설명했다. 이한은 격납고에서 바삐 움직이는 강화병들을 쳐다봤다. 보고에 의하며 드래곤은 최소 세 마리였다. 드래곤 세 마리가 뭉쳐서 다니는 일은 드물다.
“이 근처에서 자신들의 동족이 당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군. 세 마리나 보내다니.”
시타델이 드래곤 사냥을 시작한지 오래됐다. 시타델 설립 이후에 잡은 드래곤이 열 마리는 족히 넘는다. 드래곤들은 시타델의 위치를 대략은 알지만 정확히는 모른다.
“바하무트급이라도 빨리 나오면 좋겠는데 말이야.”
쿠로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쿠로는 3종 바하무트급 출현을 대비한 전력이다. 시타델은 이런 식으로 드래곤들을 유인해서 잡아냈다. 최종목적은 바하무트급 드래곤 제거다.
이한은 쿠로의 자신감에 쓴웃음을 지었다. 하이브 한 마리라면 몰라도, 두 마리 이상이면 쿠로라도 이기기 힘들다.
위이이잉.
사이코프레임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격납고에서 걸어 나온 사이코프레임들이 각자 장비를 챙겼다. 전부 MK-2이지만, 커스텀화가 많이 진행돼서 장비가 다들 제각각이고 도색도 취향대로다. 얼핏 보면 동일모델 같지 않았다.
‘카메라.’
이한은 카메라맨 한 명을 바라봤다. 카메라맨이 출격준비 중인 사이코프레임를 찍고 있었다.
“아, 저거? 다른 구역에 송출하는 영상이야. 사이코프레임이 있으니 안심하라는 의미지.”
쿠로가 이한에게 설명했다. 이한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다른 의미로는 지배를 공고히 하는 거네. ‘우린 건재하다.’ 이런 뜻인가?”
“비슷해. 우리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야. 우리가 힘이 있기에 다들 모여든 거니까, 우리가 무력을 잃는 순간 시타델은 와해 돼.”
이한은 오메가-1이 토벌대를 이끌고 나가는 걸 지켜봤다.
‘나도 가볼까.’
오메가-1이 시타델에서 자리를 비웠다. 다른 오메가 대원들도 없다.
이한은 여장을 꾸리고는 야니를 호출했다. 야니는 이한의 차림새를 보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텔레포트 이용예정이 없지 않나요?”
“개인적인 볼 일이야.”
이한은 짧게 말했다.
“사적인 일로 저를 사용하는 건 별로 좋진 않을 텐데요. 요새 선배의 평판이 안 좋은 건 아시죠? 과거의 영광과 사령관에게 빌붙은 빈대 혹은 기둥서방 이미지라고요.”
야니가 적나라하게 말했다.
“뜨끔하네. 별로 틀린 말도 아니라서.”
이한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야니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뜸을 들였다.
“저는 개인적으로 선배를 좋아하지만…. 흐음, 조건 하나가 있어요.”
“어렵지 않은 일이라면 들어줄 게.”
“사일런스 님은 보통 뭘 좋아해요? 둘이서 친하다면서요. 취미라던가, 좋아하는 음식….”
“케이크 같은 단음식. 그리고 무협이나 무술영화들 팬이야. 특히 정의로운 인물이 나오는 모범적인 정통극을 좋아해.”
이한은 단번에 대답했다. 사일런스에 관해서는 잘 안다. 야니가 메모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래요? 좋은 정보네요. 선배.”
야니가 으스스하게 웃었다. 이한은 뭔가 실수한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일단은 야니를 통해서 이동하는 게 더 중요했다.
“목적지는 웨일즈 서쪽이야.”
“웨일즈 지방과 가까운 쪽이라면 여기쯤이려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야니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이한이 짚어준 곳과 가까운 점프 포인트를 찾아냈다.
‘야니의 능력은 시타델에겐 없어서는 안 될 힘이야. 야니가 자유분방하게 구는 까닭도 자신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이겠지. 전직 첩보원인 교활한 애니까.’
시타델에는 야니를 포함한 2명의 텔레포트 능력자가 있다. 이동과 연락수단이 제한적인 세상에서 그들은 귀중한 전력이다.
“손을 잡아요. 선배.”
야니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한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야니의 손가락 안쪽 마디에는 소녀답지 않은 굳은살이 있다. 무기를 다룬 자들의 흔적이다.
이한은 야니의 텔레포트로 이동했다. 야니와 헤어진 이한은 나침반과 지도를 보며 이동했다. 영국 특유의 우울한 날씨가 완연했다. 꿉꿉한 공기가 불쾌하게 코끝을 스쳐갔다.
완만한 언덕이 이어진 길이었다. 이한은 사람이 없는 농가를 지나서 계속 걸어갔다.
‘조용하군.’
이한은 바스락거리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언덕 아래를 쳐다봤다.
‘엘루?’
이한은 초원을 걷는 엘루를 발견했다. 엘루들 뒤로는 오우거 다섯 마리가 있었다. 오우거들은 통나무들을 등에 짊어졌다. 엘루의 지휘에 따라 오우거들이 성큼성큼 걸었갔다.
‘오우거 다섯, 엘루 둘.’
이한은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굳이 교전을 벌일 필요는 없다.
‘통나무를 짊어지고 어딜 가는 걸까.’
오우거들은 전투장비를 착용하지 않았다. 나무꾼처럼 도끼와 지게만 갖고 있었다.
‘건설자재인가?’
엘루는 문명을 이룩한 미니언들이다. 지구에서 건물을 짓는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불쾌해.’
이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구에 엘루들이 뿌리를 내린다고 생각하니 견디기 힘들었다. 고향을 뺏기는 기분이었다. 엘루들이 문명을 건설하고, 인간들은 문명을 잃었다.
‘안이하게 때를 기다리다간, 남은 인간들조차 지구에 설 자리가 없을 거야. 행동을 나서야하는 쪽은 우리다.’
엘루와 오우거가 저 멀리 사라졌다. 이한은 몸을 일으키곤 앞으로 나아갔다. 어깨가 묵직했다. 인류는 멸종의 기로에 서있다. 이대로 과거가 되느냐, 미래로 나아가느냐- 이한은 놈들에게 패배하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쟁취해야할 목표는 미래다.
이한은 이틀에 걸쳐 이동했다. 그는 웨일즈 끝의 어촌 마을에 도착했다. 구부러진 표지판에는 미너라고 적혀있다. 미너 역시 유령 마을이다. 사람의 흔적은 오래 전에 끊겼다. 허름한 낚시배가 부두에 둥둥 떠다녔다.
‘인구는 얼마나 줄었을까.’
지금 세상에서 길가다가 사람을 만나기란 힘들다. 그나마 생필품이 남아있는 도시 주변에나 사람이 있다. 이한은 쓰게 웃었다.
‘우리가 설사 이기더라도, 문명재건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 순탄치도 않을 거야.’
최후의 적, 드래곤을 물리치더라도 밝은 미래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고, 그로 인한 새로운 갈등은 깊어질 터다.
‘여기로군.’
이한은 전화박스 안에 섰다. 겉보기에는 여느 전화박스와 똑같았지만, 강화유리와 강철로 만들어진 박스다. 이 전화박스는 아크에서 설치한 연락책이었다. 위성통신망이 사라졌기에 중계통신과 유선연락이 주 연락수단이다.
끼릭.
이한은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통신음이 들렸다.
치직, 치직.
잡음이 심했다. 이한은 신호가 제대로 잡힐 때까지 한참이나 기다렸다.
‘안 되는 건가.’
이한은 눈동자로 주변을 살폈다. 수화기를 든 손바닥에서 땀이 흘렀다.
-웨…더.
낮은 음성이 희미하게 들렸다. 이한은 메모를 들어 올려서 대응암호를 확인했다.
“블루. 다시 말한다. 블루.”
이한은 상대가 인지할 때까지 반복해서 말했다.
-입감완료. 해당 안전가옥에서 대기하라.
전화기 본체 밑에서 약도 하나가 튀어나왔다. 카드처럼 빳빳한 플라스틱 재질이었다. 전화박스를 중심으로 안전가옥에 가는 길이 나와 있었다. 이한은 약도를 확인하고는 안전가옥을 찾아서 이동했다.
‘냄새가 좋진 않네.’
부두의 물류창고에 도착한 이한은 인상을 찌푸렸다. 내부는 지저분했고, 오래 전에 삭아버린 생선의 잔해가 보였다. 파리도 간간히 날아다니며 이한의 얼굴에 들러붙었다.
끼익.
이한은 지하로 들어가는 바닥 문을 열어젖혔다.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불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딸깍.
손전등을 들어서 내부 시야를 확보했다. 이한은 조심스레 한 발자국씩 내려갔다.
끼익.
이한은 지하계단 끝에 도착했다.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권총으로 좌우를 조준했다.
‘아무도 없군.’
이한은 벽을 더듬어서 스위치를 눌렀다. 내부에 빛이 들어왔다. 10평 정도의 내부구조가 눈에 들어왔다.
기이잉.
기계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한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전화박스부터 여기까지 이한의 얼굴을 확인할 기회는 수없이 많았다.
‘아크 소속이라면 내 얼굴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데…. 내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 건가? 신중하군.’
이한은 권총을 매만지며 자리에 앉았다. 연락책들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기이이잉.
안전가옥의 벽이 갑자기 열렸다. 열린 벽에는 차 한 대가 지나갈 법한 지하통로가 있었다. 지하통로에서 튀어나온 군인들이 이한을 포위했다. 그들은 총구를 들이밀고는 이한을 위협했다.
“무장을 해제해라.”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이한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군인들은 9명이었다. 무장이 잘 된 병사들이었다. 사이커는 아닌 듯했다.
“다시 말한다. 무장을 해제해라.”
“반항할 생각은 없어.”
이한은 권총을 비롯해 장비를 하나둘씩 땅에 떨어뜨렸다. 군인 하나가 이한의 장비를 회수해서 가방에 쑤셔 넣었다. 이한은 손과 다리를 벌리며 몸수색에 응했다. 군인들이 이한의 몸을 수색을 했다. 순순한 태도에 군인들의 경계가 살짝 누그러졌다.
“거기에 앉아. 우린 외부인이 온다는 연락을 듣지 못했다. 신분을 밝혀라.”
총구는 여전히 이한을 향해있다. 이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움직였다.
“아크 소속 강화병. 전 알파 분대장 이한이다. 아크의 데이터베이스가 있다면 확인 가능할 터다. 3년 전, 바하무트 공략전에서 사망처리 됐어.”
이한은 군인들의 태도를 살폈다. 그들의 군복에는 국기나 마크가 없어서 소속을 알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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