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13
제212화 그 여자는 어디에 있나?
세 시진에 걸쳐 삼천리 사막을 횡단한 나는 전날 들른 적이 있었던 유관으로 갔다.
나현이 털보에게 유관의 진학원에 그간의 경과를 담은 서신을 주기적으로 보낼 거라 일러두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에 따라 우한 방문을 생략하고 곧장 적진의 한 가운데로 쳐들어가야 할 수도 있었다.
기둥들이 부실해 허물어지기 일보직전으로 보이는 객잔에 들어서니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일시에 정적으로 대체되었다. 나를 보고 얼어붙었던 취객들이 일제히 바닥에 오체투지하며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이 일으킨 소동에 진학원의 주인이자 흑문의 첩인인 두건 중년인이 주방에서 달려 나왔다. 나는 그의 성이 초(草)씨임을 기억했다. 내가 용건을 밝히기도 전에 중년인이 품에서 수십 장의 첩지들을 쏟아냈다.
“무황께서 오시면 드리라는 전갈을 받았사옵니다. 순서는 위에서부터…….”
나는 시간을 아끼기로 했다. 첩지마다 가득한 깨알 같은 글씨들을 감안하건대 일일이 살펴보려면 족히 한 시진은 걸릴 터였다.
“전체적인 정황을 듣고 싶소. 아니, 그 전에 그들은 현재 어디에 있소?”
바닥에 엎드렸던 중년인이 되물었다.
“그들이라 하심은?”
“도후와 해왕 말이오.”
“도후는 소재 불명이고 해왕은 정맹에 있습니다. 그제 들어간 걸로 아옵니다만, 그 이후 그가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황당했다. 고작 이십 일 만에 정맹에 입성했단 말인가. 사벌과 마련이 무너졌으니 이는 중원이 정복당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피해는 어느 정도요?”
중년인의 음성이 버들피리처럼 떨려나왔다.
“사상자의 수를 헤아리는 게 불가능할 지경이라 하옵니다. 나 원주께 받은 첩지에 따르면 아마도 일백만 명 이상이 희생되었을 거라고…….”
중년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일백만이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였다.
내 눈치를 보던 중년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중 삼분지일은 해귀들이 아니라 마인들과 사파 무인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소리요?”
“해왕도가 쳐들어 온 후 밖으로 기어 나온 사마의 잔당들은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는 그들 밑으로 기어들어갔습니다. 해왕의 개가 되기를 자처한 배신자들은 해귀들 이상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일삼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러는 동안 정맹의 고수들이 수수방관했단 말이오?”
“오대세가를 비롯한 정맹의 명문들은 해귀들이 서진(西進)해가자 모조리 잠적했습니다. 이미 보성과 광양, 그리고 도원이 시산혈해로 변했답니다. 주천과 오중도 조만간 화를 입을 거라고…….”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 나는 중년인의 말을 끊었다.
“알겠소. 그런데 자미원의 나 대인에게 내 말을 전할 수 있소?”
“죄송하오나 불가능하옵니다. 나 원주는 모처로 피신한 걸로 알고 있사옵니다. 저는 그이가 보내는 첩지를 받을 수 있을 뿐이옵니다.”
그렇다면 중년인과 더 나눌 얘기가 없었다. 나는 내 뒤에 시종처럼 서 있는 털보를 돌아보았다.
“나 원주에게 연락을 취할 방도가 있소?”
털보가 난색을 표했다.
“죄송합니다. 제 임무는 어떻게든 무황을 찾아 이곳으로 모셔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나 원주가 거처를 옮기리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대화를 종결하기로 했다. 이제는 행동을 개시해야 할 때였다.
* * *
네 시진 후 나는 원중 외곽의 병풍산에 당도했다. 사천이삼백 리를 쉬지 않고 전속력으로 날아온 탓에 육신이 아우성을 쳤다.
하지만 내가 경신을 멈춘 건 지친 몸에 휴식을 부여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적들을 처단해 무참히 죽어간 이들의 원혼을 달래고 싶었으나 무작정 결전에 임할 수는 없었다. 해왕은 능히 처치할 자신이 있었지만 도후는 불확실했다. 별다른 내-외상을 입지 않고 검왕을 일도양단했다면 그녀는 내 하수가 아닐 공산이 컸다. 따라서 해왕과 그녀가 연수하는 사태를 맞이해서는 곤란했다.
나는 둘 중 하나를, 가급적 해왕을 우선적으로 제거할 작정이었다. 그런 연후 내 상태와 상황을 봐서 남은 한 명을 상대할 참이었다.
해귀들이 방화라도 하는지 곳곳에서 치솟는 불길을 바라보며 운기조식을 취한 나는 해가 완전히 떨어지자 하산했다. 그리고 끔찍한 참상을 목도했다.
사상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던 천하제일도(天下第一都)는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변해있었다. 처처에 잔혹하게 난도질당한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단말마의 비명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해귀들은 순전히 재미 삼아 거리를 돌아다니며 전각과 와옥들에서 끌어낸 사람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겁간을 하는 장면도 수시로 지나쳤다. 그때마다 살의가 솟구쳤지만 소란을 일으켜서는 곤란하기에 꾹 참았다.
사각지대를 이동하며 나아간 나는 반 시진 후 정맹의 서대문에 이르렀다. 잠시 기감으로 안쪽을 살피고는 성벽을 넘는 대신 대문을 통과했다. 정맹 내부도 원중과 마찬가지로 난장판이었다. 도처에 괴성과 비명성이 난무했다.
해귀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귀빈전으로 접근했다. 정맹에서 가장 휘황찬란한 전각 중 하나인데다 최상층의 특실은 특히 화려하기에 해왕이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리라 보아서였다. 하지만 상당한 기운을 가진 자들의 기운이 포착되긴 했으나 해왕으로 짐작되는 이의 내기는 잡히지 않았다.
귀빈전에서 물러난 나는 해왕의 처소 후보군을 차례로 탐색했다. 여섯 개의 전각을 거친 후 일다경 쯤 지나서 숭천전(崇天殿)에 이르렀을 때 드디어 그로 추정되는 기운을 감지했다. 혹시 도후가 근처에 있을지 몰라 시간을 들여 그 일대를 철저하게 탐색했지만 찾아내지 못했다. 그녀가 내 기감에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나는 거사에 돌입하기로 했다. 더는 자제하기 어려웠다.
* * *
철봉과 옥소를 꺼내든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최대치의 원력을 끌어올렸다. 초장에 승부를 보기 위함이었다.
십왕의 일인이었으나 알려진 무력대로라면 해왕은 내 적수가 아니었다. 그는 도후에게로 이르는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그를 단숨에 해치우고 그녀를 직면할 참이었다. 그러려면 부상을 최소화해야 했다.
숭천전 후면 벽에 붙은 나는 순간이동을 발해 수직으로 치솟았다. 그런 연후 창문을 깨고 안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원형 침상 위에서 원숭이처럼 생긴 노인이 여섯 명의 미녀들과 함께 알몸으로 뒹굴고 있었다. 노인은 해왕임에 틀림없었다. 예전에 용모화에서 본 얼굴 그대로였다.
창문 깨지는 소리를 듣고서 화들짝 놀란 해왕이 펄쩍 뛰어올랐다. 나로서는 바람직한 반응이었다. 그가 여인들을 방패로 활용하려 들었다면 곤란했을 터였다.
나는 해왕이 공중에 뜨기도 전에 지체 없이 광참을 발출했다. 반격할 겨를을 주지 않았음에도 해왕은 쌍장을 퍼부었다. 번개 같은 손속이었다. 나는 간신히 피해냈다.
유감스럽게도 내 광참은 해왕의 목을 날리지 못했다. 경황 중에도 놀라운 신법을 현시한 그는 목 대신 어깨를 내주고는 옆 벽을 부수고 달아났다. 그를 잡을 수도 있었지만 퇴로를 열어주었다.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해왕이 뚫고 나간 벽으로 나온 나는 순간 가속을 발해 그와의 거리를 줄였다. 그가 도후를 불러내거나 그녀에게 가기 전에 끝장을 보아야 했다.
내가 순식간에 바짝 붙어가자 대경실색한 해왕이 내게 등을 보인 상태에서 손바닥만 내 쪽으로 들어 장공을 퍼부었다.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었던 특이한 장공이었다. 마치 수십 개의 창이 날아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운데다 날카로운 창들이 마치 눈이 달린 듯 나를 추격한 탓에 두 개의 창을 왼 옆구리와 허벅지에 허용하고 말았다. 장공에 실린 경기에 내장 일부가 파열되었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대단한 솜씨였다.
나에게 부상을 입힌 대가로 해왕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광망으로 그의 운신을 제한했던 나는 현재 내 최강의 절기인 광폭으로 그의 동체를 터뜨려버렸다. 수천 개의 육편으로 화한 해왕의 유해가 우박처럼 지상으로 쏟아졌다.
단 삼 초의 공방 만에 해왕을 처치한 나는 철봉과 옥소를 맞부딪치며 사자후를 터뜨렸다.
“나는 무황이다. 해왕은 내 손에 죽었다. 다음은 누가 염왕에게 갈 테냐?”
도후를 불러낸 것이었으나 엉뚱하게도 해귀들이 몰려왔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맥이 풀렸다. 그러면서 의아했다. 이 정도의 소란이 일었음에도 도후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그녀가 정맹에 없거나, 신변에 이상이 있거나. 후자이길 바라면서도 정말 그렇다면 실망할 것 같았다.
* * *
시체가 남아있지 않았지만 해왕이 목숨을 잃었음을 모르지 않을 터임에도 해귀들은 불을 본 불나방들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했다. 기실 나보다 그들에 대해 잘 아는 이는 드물 터였다.
어린 시절 나는 전력의 우열과 무관하게 일단 붙으면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싸우는 해귀들의 독기에 내심 감탄했다. 내게 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두르는 잔인무도한 야차가 아니라 불굴의 전사들이었다.
나는 나중에서야 해귀들이 보였던 불퇴전의 용기에 도사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들의 광기는 많은 이들이 의심했던 것처럼 미약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로 하여금 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질 수 있도록 만든 원동력은 신념이었다. 해귀들은 내세를 믿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자들이 죽음 이후에 이르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믿었다. 전사(戰死)가 두렵기는커녕 바라마지 않는 일이었으니 그들이 불퇴전의 전사(戰士)가 된 것도 당연지사였다.
* * *
나는 한때 나를 매료시켰던 족속에게 가차 없는 살수를 퍼부었다.
내 광환은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해귀들의 미간을 꿰뚫었다. 한 번에 수십 명씩 쓰러졌지만 해귀들은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해왕을 처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숭천전 경내엔 수백 구의 시체더미가 쌓였다. 그러고도 사방에서 자살을 갈구하는 광인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나는 기꺼이 그들의 원을 들어주었다.
일방적인 도살을 이어가던 중 해귀들 중 누군가 중원어로 소리쳤다. 칼자국이 면상을 덮은 오십대 사내였다.
“기고만장하지 마라. 신녀께서 돌아오시면 너는 한 칼…….”
칼자국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순간 이동으로 그에게로 다가간 내가 목을 틀어쥐었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는 어디에 있나?”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답이 나왔다.
“빙궁에 가셨다. 빙후를 꺾으신 후 다시 너를…….”
칼자국은 이번에도 도중에 입을 닫아야 했다. 목이 부러진 자는 말을 할 수 없는 법이었다.
* * *
나는 정맹과 원중에 들어온 해귀들을 소탕하려던 생각을 바꿔 어느 정도 청소를 하고는 북으로 몸을 날렸다. 절정 이상의 무위를 가진 자들은 거의 다 몰살시켰으니 더 이상 큰 피해는 없을 터였다. 정맹은 물론이고 멀리 원중 저자에서도 내 별호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내 손에 해왕이 천참만륙되고 대다수의 해귀들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은 내일이면 대륙 전역에 퍼질 것이었다. 나머지 처리는 다른 이들에게 맡겨도 될 터였다.
나는 빙궁을 향해 날아가는 내내 불안감에 시달렸다.
빙후는 내 걱정을 허락하지 않을 절대강자였으나 왠지 도후에게 당할 것 같았다. 부딪쳐보기 전까지 정확한 무위를 알 순 없지만 도후는 사막 수련에 들기 전의 나나 ‘신의 힘’을 얻기 전의 빙후보다 상수일 듯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는 검왕은 지금의 나라도 아무런 손해 없이 골로 보낼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나는 빙후의 행방을 발설한 자에게서 더 많은 정보를 긁어내지 않고 목을 꺾어버린 걸 후회했다. 성급한 처사였다. 적어도 도후가 언제 빙궁으로 떠났는지는 알아내야 했다. 그랬다면 시간을 계산할 수 있었을 터였다.
어쨌거나 이제 와서는 최대한 빨리 빙궁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독후가 나보다 늦게 빙궁에 이르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