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35
제34화 뒈지기 싫으면 비켜!
행복한 나날이었다.
나는 운공에 드는 시간을 제외하면 진종일 늪지에서 광객과 비무를 하며 보냈다. 낮밤을 가리지 않았고 비무 후엔 반드시 그와 더불어 중요한 대목을 복기했다. 그로서는 별 이득이 없는 일이었으나 광객은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내 수련을 도와주었다. 그는 최고의 훈련 상대였다.
괴선과도 이따금 손을 섞었다. 다양한 시도를 통한 무학의 심화에 중점을 두었던 광객과는 달리 그와는 전력으로 맞붙었다. 그럼에도 첫 번째 대결처럼 위험한 국면에 이르는 경우는 없었다. 내가 시종여일 주도권을 행사하다가 약이 오른 괴선이 너 죽고 나 죽자는 태도로 나오면 선선히 물러섰기 때문이었다. 부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승패를 가릴 까닭이 없었다.
단기간에 내 무공이 깊어졌을 뿐만 아니라 원력도 증가했음을 알아차린 괴선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노골적으로 샘을 냈다. 나는 집요하게 비결을 추궁하는 그에게 ‘뼈를 깎는 노력’이라는 답을 주었다. 광객은 수긍한 반면 괴선은 하나마나한 소리라며 신경질을 냈다.
나는 두 기인과의 어울림을 즐겼다. 하루하루가 더 바랄 나위 없는 충일함으로 이어졌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일 년만 이런 시간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행복의 시간은 일 년은커녕 한 달도 허락되지 않았다.
늪지로 찾아온 강태수를 따라 장원으로 돌아가니 진청운이 와있었다.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본 나는 올 것이 왔음을 알았다. 보성 현가가 드디어 움직인 것이었다.
“어서 오게나. 어르신들은?”
“수련장에 계십니다. 장원에 잠깐 다녀온다고 양해를 구하고 왔습니다.”
“그랬는가. 들어가세. 그 아이도 깨워야겠네.”
나는 중천에 뜬 해를 바라보았다. 진소월은 한창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터였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현가의 일이라면 그녀와 이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니 그냥 말씀해주시지요.”
“알았네. 그럼 말함세. 실은 보성 현가가 아니라 정맹에서 온 전갈일세. 자네더러 오는 보름 미시(未時)까지 집법전(執法殿)에 출두하라는군. 현가 봉공 시해 건에 대한 재판을 열고 자네의 처벌 여부와 수위를 결정할 터인데 만약 소환령에 불응할 시엔 죄를 인정한 것으로 간주하고 자네를 무림 공적으로 선포한 후 추포령을 내릴 거라고 했네.”
나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진소월이 예측한 상황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괴선과 광객을 의식한 현가가 정맹을 끌어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보았다. 기실 진청운이 전한 정맹의 통보는 그녀가 스무날 전 그 아름다운 분홍빛 입술로 읊었던 내용 그대로였다.
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의 위치를 보아 정오 전후일 터였다. 오늘이 십일월 십삼일이니 정맹이 지정한 날짜는 이틀 후였다. 내게 여유가 많지 않다는 뜻이었다.
“가 봐야겠습니다.”
“어디로 말인가?”
“그야 정맹이지요.”
진청운의 창백한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곳은 자네 사지가 될 수도 있네. 내가 그 아이를 깨울 테니 어르신들을 모시고 오게나. 다 같이 대책을…….”
나는 진청운의 말허리를 잘랐다.
“죄송하지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진 소저하고는 사전에 의논한 바가 있으니 나중에 들어보십시오.”
진청운이 나를 잡았다.
“꼭 그렇다면 항상 두 분과 함께 하게나. 무왕이 친히 집법전에 나오지 않는 이상 사정이 자네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경우라도 퇴로를 마련할 수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지 진청운이 내 소매를 놓아주었다. 나는 늪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진청운의 충고를 따를 생각은 노루 꼬랑지만큼도 없었다.
괴선과 광객에게 급한 볼 일을 보러 가니 자세한 사정은 진소월에게 들으라고 이른 나는 서북 방면으로 향했다. 괴선이 나를 수백 장이나 쫓아오며 무슨 일인지 꼬치고치 캐물었지만 나는 답을 진소월에게 미루었다. 역정을 내던 그가 떨어져나가자 나는 경신의 속도를 올렸다.
목적지인 세연(洗緣)까지는 삼천리 길이었고 나는 내일의 해가 뜨기 전에 그곳에 당도할 작정이었다. 그러려면 부지런히 날아야했다.
늦가을의 풍경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가급적 인적이 없는 경로로 이동했다. 떠버리 아저씨에게 전수받은 지리 지식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의존한 건 진소월이 준 정보였다. 그녀가 너무나 상세하게 세연까지 이어진 기나긴 지형지물을 일러준 덕분에 장도인데다 초행임에도 일절 헤매는 법 없이 쭉쭉 나아갈 수 있었다.
해가 떨어진 직후 일각가량 휴식을 취했다. 사시사철 깔리는 보랏빛 안개로 유명한 평주 자운산(紫雲山)에서였다.
두 시진 반 동안 거의 일천리를 주파한 셈이니 엄청난 강행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탈진지경에 이르지 않았다. 진(進)에 섬(閃)을 가미한 내 경신은 내공 소모가 극히 적다는 특장점이 있었다. 이는 한줌의 공력으로 절정고수 급의 속도를 내고자 했던 아버지의 치열한 이십 년 연구의 결실이었다.
* * *
새벽별들이 떴다.
산정에 오른 나는 지친 몸을 바위 위에 뉘였다. 전신의 근육이 욱신거렸고 뼈들은 아우성을 쳤다. 내 몸의 항의를 묵살한 나는 반각도 지나지 않아 몸을 일으켰다. 운기조식을 취하기보단 좀 더 나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싶었다. 상황이 강제한 바가 없지 않으나 이런 기회가 자주 오진 않을 터였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달빛 아래 잠긴 도시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세연은 가을이면 도시 전체가 붉은 단풍으로 물드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천하에서 손꼽히는 악질들의 터전이기도 했다. 황당하게도 악질 패거리는 인우당(仁友堂)이라는 멋들어진 이름 아래 뭉쳐있었다.
성주 무림의 패자(霸者)를 두고 다투는 태극검문이나 백도방보다 상위 등급으로 평가받는 강대세력이지만 인우당은 생긴 지 고작 십이 년밖에 안 되는 신흥방파였다. 그들의 주력사업은 인신매매였다. 특히 남색을 즐기는 변태들에게 최상 품질의 색동을 독점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천문학적인 수입을 거둔다고 알려져 있었다. 우습게도 인우당이 같은 업종에 종사하던 흑도를 소탕하거나 장악한 덕분에 강호가 깨끗해졌다는 소리도 있었다.
인우당이 짧은 기간에 텃세가 심한 사파 무림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창립자이자 당주인 고루색귀(骷髏色鬼) 윤승(尹承)의 존재감과 처세술에 있었다.
윤승은 일찍이 강호십대악인의 한 자리에 이름을 올린 마두이자 초절정 중상(中上)의 무위로 공인받은 강자였다. 무림초출 이후 삼십 년 가까이 독보강호하며 무차별적인 살인과 성별과 연령을 가리지 않는 겁간으로 양주와 서주 일대의 민중들을 공포의 도가니에 빠뜨렸던 윤승은 환갑 무렵 세연의 터줏대감이었던 풍운방을 몰아내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그곳에 터를 잡았다.
세연을 영향권에 두고 있던 일월검문(日月劍門)과 삼절문(三絶門)에서 그들을 즉각 응징할 거라던 세간의 예상을 비웃고 인우당은 오히려 세를 확대했다. 나중에서야 윤승이 사전에 사파칠문에 속하는 두 문파의 승인을 얻어 일을 벌였음이 드러났다. 그들에게 풍운방이 바치던 세금의 세 배를 내겠다는 약속은 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파칠문의 수장들과 극소수의 수뇌부를 제외하면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무력의 소유자였지만 윤승은 철저하게 자세를 낮췄다. 그는 일월검문과 삼절문의 특사들에게도 허리를 접으며 그들을 상전으로 대접했다. 빨아먹을 게 많은 데다 알아서 기어주니 양(兩) 문파로서는 그를 제거할 까닭이 없었다.
한편 오랫동안 윤승을 처단하기 위해 분투하던 정파의 협사들은 지붕에 올라간 닭을 쳐다보는 개가 되었다. 중립지대를 떠나 사벌(邪閥)의 영토에 정착한 악당을 징치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물론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얘기였다.
산을 내려간 나는 저자로 들어섰다.
번화한 거리였지만 행인은 없었다. 나는 곧장 산정에서 봐두었던 장소로 향했다. 만물이 잠든 시각이었음에도 그곳만 유일하게 빛 무리가 일렁였다. 인우당임에 틀림없었다.
대문에는 덩치가 크고 인상도 험악한 경비무사들이 있었다. 양편에 둘씩 도합 넷이었다. 기합이 빠진 듯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며 건성으로 밖을 살펴보고 있던 허우대들은 나를 발견하고는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그들 중 한 명이 물었다.
“누구냐?”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누구냐?”
무사가 움찔했다.
“누, 누구십니까?”
“그건 알 것 없고 당주를 불러와라.”
무사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와 말을 섞은 무사가 눈짓하자 덩치가 제일 큰 자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다른 무사들은 엉거주춤 칼을 빼들었다.
“뉘신지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임무를 수행하는 무사에게 엄포를 놓았다.
“시끄러. 뒈지기 싫으면 비켜.”
내가 성큼성큼 걸어가자 기세에 눌린 무사들이 줄행랑을 놓았다. 대문에 들어서자 경호성과 난잡한 발자국소리가 나를 맞았다. 한 무리의 무인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대충 이삼십 명쯤 되어보였다. 개 중 서넛은 제법 기세가 삼엄했다.
“네놈은 누구냐?”
무리의 선두에 선 애꾸눈이 물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당금 무림 최고의 유명 인사를 코앞에 두고도 몰라보다니.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애꾸와 달리 나는 그의 정체를 알았다.
맹아도(猛牙刀) 봉사한. 절정 극상의 고수이자 고루색귀 윤승의 심복이었다. 자기 심기를 건드린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쪼개는 잔인무도한 칼질로 악명을 떨친 악종이기도 했다.
나는 대답 대신 철봉을 꺼내들었다. 내 표적은 맹아도가 아니라 고루색귀였다. 하지만 일단 맹아도부터 손을 봐주기로 했다. 개를 패면 주인이 나오는 법이었다.
내가 전투의사를 드러내자 맹아도가 칼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저자를 죽여라!”
주머니에서 꺼낸 쇠구슬들을 던지며 나는 맹아도에게 짓쳐들었다. 캉! 헉! 내 철봉을 막아낸 맹아도가 경악성을 터뜨렸다. 그는 나름 강호로 행세해왔지만 최대치의 절반에 육박하는 원력을 감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일합에 내가 감당불가의 강적임을 파악한 맹아도가 발을 빼려들었다. 나는 그에게 퇴각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나를 협공하는 자들에게 다시 쇠구슬을 뿌린 나는 퇴보를 밟은 맹아도를 쫓아 철봉을 휘둘렀다.
캉! 캉! 캉! 퍽!
찰나지간에 가한 세 번의 공격을 버텨낸 맹아도는 내 네 번째 일격을 두부에 허용하고 말았다. 그의 머리통이 박살나며 허연 뇌수가 공중에 휘날렸다. 후방과 좌우에서 날아드는 암습을 회와 절로 흘려낸 나는 신경이 쓰였던 자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했다. 맹아도에 이어 세 명의 고수가 내 철봉에 머리를 잃은 시체로 화하자 졸개들은 공황에 빠졌다.
대항의 의지를 상실한 적들은 사방으로 달아났다. 현장으로 달려오고 있던 그들의 동패들도 기변을 감지하고는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내 목표는 악적들의 소탕이 아니라 그들의 우두머리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적들이 사라지자 경내에 정적이 깔렸다. 그러나 내 기대대로 정적은 금방 깨졌다. 기다리던 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네놈은 마웅이구나. 어째서 본당에 와서 무도한 행패를 부리는 게냐?”
퍼러럭.
옷자락이 날리는 기음을 달고서 시커먼 그림자가 장내에 떨어져 내렸다. 그 인영에 이어서 백영(白影)도 빠른 속도로 내가 선 곳으로 날아왔다. 흑백의 괴인들이 나타나자 방금 전 달아났던 벌레들도 다시 돌아왔다. 이로써 나는 오륙십 명의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