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36
제35화 너희 같은 인간말종들은 이 세상의 공기를 들이켤 자격이 없어
나는 새로 등장한 인물들의 무위를 가늠하며 재빨리 형세판단을 했다.
흑색 장포를 걸친 노인이 누군지는 불문가지였다. 낙낙한 장포에 앙상한 체구를 감추고 있었지만 해골이나 진배없는 면상은 가릴 수 없었다. 고루(骷髏)라는 별호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외양이었다.
고루색귀와 거의 동시에 당도한 백의 중년인은 신원불명이었다. 급하게 나왔는지 의관이 단정치 못했다. 그러나 그가 발산하는 기운은 고루색귀에 버금갔다. 초절정의 강호라는 의미였다.
졸개들의 회군은 큰 변수가 아니었다. 이미 맹아도를 비롯한 절정의 고수 넷을 처치했기에 추가된 자들 중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무인이 그 수만큼 있다고 가정해도 딱히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문제는 백의 중년인이었다. 적수공권이었으나 서두르느라 병기를 챙기는 걸 깜빡하고 나왔을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는 수공(手功)이나 권공(拳功)의 대가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삼절문의 인사일 공산이 컸다. 십중팔구 상당한 고위직일 터였다.
기억을 뒤져 진소월에게 들었던 사파 고수들의 정보를 차근차근 탐색할 여유는 없었기에 나는 이르게 결단을 내렸다. 중년인의 존재로 인해 내 열세라는 형세판단을 내렸으나 내가 택한 전술은 정면 돌파였다.
설명은 길었으나 내 행동은 번개처럼 빨랐다.
고루색귀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에게로 쇄도한 나는 섬을 발하면서 꺼내든 옥소로 천라도망을 펼쳤다. 왼손의 철봉으로는 뇌전참참을 날렸다.
최대치에 육박하는 원력을 담았기에 공간이 울었다. 나는 이 공격에 승부를 걸었다. 고루색귀가 버티면 즉각 퇴각해야 했다. 그를 상대하는 동안 백의 중년인이 뒤를 노리면 한 순간에 위급지경에 처할 수 있었다.
결과만 말하자면 내 기대는 절반만 충족되었다. 내 기습에 혼비백산했으면서도 고루색귀는 신법으로 회피하는 대신 반격으로 응수했다. 기실 그로서는 불가피한 대처였다. 천라도망이 그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고루색귀의 장공을 회로써 흘린 반면 그는 내 뇌전에 옆구리를 찍혔다. 나로서는 유감스럽게도 고루색귀는 즉사를 모면했다. 그 탓에 나는 그의 필사적인 구명절초와 중년인의 암습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갈림길이었다. 안전을 위해서는 이쯤에서 물러가는 게 나았다. 끝을 보겠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럼에도 나는 다시 한 번 진격을 택했다. 객관적인 전력의 열세와 무관한 승부감각의 발로였다.
음험한 기운이 아슬아슬하게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원력으로 엷은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았더라면 가공스러운 음기에 침습당해 두개골이 바스러졌을 것이었다.
백의 중년인이 쏘아낸 탄강은 이(移)로 빗겨냈다. 그 역시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늦었거나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뒷목에 직격을 허용했을 터였다.
고비를 넘긴 대가로 나는 고루색귀의 면전에 이르렀다. 그러고는 극상의 섬으로 발한 속도 그대로 철봉을 그의 왼 가슴에 쑤셔 박았다. 대경실색한 고루색귀가 상체를 비틀었지만 이미 그것까지 계산하고 날렸던 내 살수를 피해내지는 못했다.
철봉이 고루색귀의 심장이 터졌음을 전했다. 나는 승리의 기쁨을 잠시 미루었다. 마지막 승부처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루색귀를 절명시킨 순간 나는 절(折)로 상반신을 뒤로 꺾으며 백의 중년인의 암습에 대응했다. 내 콧날과 복부를 스치고 지나간 탄강들은 이미 숨이 끊어진 고루색귀의 몸뚱이를 으깼다.
이때가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만약 백의 중년인이 찰나지간 중심이 흐트러진 내게 맹폭을 가했더라면 나는 누란지위에 처했을 터였다. 내편에서는 최대치의 원력을 쥐어짜더라도 그를 즉살할 가능성이 희박한 데다 그런 연후 일시적 마비라는 중대한 위험에 노출될 반면 그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처지에 처하지는 않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백의 중년인은 몸을 사렸다. 그가 사생결단을 내려들지는 않으리라는 내 직감대로였다. 그는 필히 내가 상체를 젖히며 쏘아낸 뇌전들의 위력을 체험하고는 부상을 염려했을 것이었다.
가일수를 포기한 백의 중년인이 등을 돌려 신형을 날리자 나는 비로소 승리를 확신했다. 그를 추적하지는 않았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데다 최대치에 준하는 원력의 운용으로 기혈이 격탕되었기에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그를 쫓다가 신체에 이상이 발생하는 날엔 큰일이었다.
남아있는 자들은 문젯거리가 아니었다. 기실 그들은 번갯불에 콩 볶듯이 끝난 결과에 망연자실해 전의 자체를 잃은 상태였다.
캉!
철봉과 옥소를 맞부딪힌 나는 뒤늦게 아까 고루백귀가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
“너희 같은 인간말종들은 이 세상의 공기를 들이킬 자격이 없어.”
내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달아나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구태여 벌레들을 쫓아가 짓이기는 수고를 하지 않고 나는 그들이 도주하도록 내버려두었다.
* * *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정맹으로 향해야 했으나 나는 인우당을 치기 전 잠시 머물렀던 산정에서 꾸물거렸다.
정맹이 있는 원중(圓中)까지는 남서방면으로 직선거리로 삼천삼백 리 길이었다. 기묘하게도 소월루가 있는 전원에서도 원중은 삼천리가량 떨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전원과 인우당이 자리한 세연과 원중은 정삼각형의 꼭짓점에 위치한 셈이었다.
세연에 올 때처럼 강행군을 하면 늦어도 열 시진 이내에 원중에 당도할 수 있었다. 무리를 하면 여덟 시진으로도 가능할 터였다. 집법전에서 통고한 출두 날짜와 시각은 내일 미시(未時)였으니 상당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내가 출발을 늦춘 건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꽤 아찔한 순간이 있었으나 내-외상을 입지도 않았기에 운공에 들 필요도 없었다.
나는 유혹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우당에서 정체불명의 백의 중년인이 출현하는 바람에 예기치 못했던 위급지경에 처했으나 그 덕분에 심장이 쫄깃해지는 경험을 했다. 단순한 쾌감이 아니었다. 그로써 나는 오절신공이 보다 깊어졌음을 인식했다. 정확히 어느 정도냐고 따지면 설명할 길이 막막하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는 수련으로는 얻을 수 없는 성과였다. 아무리 열심히 갈고 닦더라도 그 성취는 목숨을 건 실전이 강제하는 초극의 집중력,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깨달음에는 못 미쳤다.
검황자나 괴선과의 비무에서도 그런 기분을 맛보았으나 그들과의 대결은 생사투라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우당에서의 교전은 달랐다. 고루색귀를 제때 처치하지 못했다면, 백의 중년인의 암습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면, 그의 다음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지 못했다면, 이 셋 중 어느 하나라도 실패했다면 나는 지금쯤 염왕을 알현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해냈다. 오절신공의 심화라는 전리품을 획득하며.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내 본능은 충족감을 얻으려면 한 발 더 나아가야 함을 알렸다. 지금 당장!
갈등은 짧았다.
처음부터 나는 내가 유혹에 굴복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라지 않은가. 나는 매번 스스로를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음으로써 한계를 돌파하곤 했던 이의 아들이었다. 극단적인 방법임을 모르지 않으나 그분에게나 나에게나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우리 부자는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도 불사할 불나방들이었다.
심상에 떠오른 어머니의 근심어린 얼굴을 ‘이번 한 번만’이라는 말로 달래며 나는 산을 내려갔다. 정맹이 있는 원중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동북으로 칠팔백 리쯤 가면 고륜산맥이 나올 터였다. 동서로 물경 이천 리에 걸쳐 뻗어있는 고륜산맥은 사벌과 마련의 경계선들 중의 하나였다. 그 너머에는 마인들이 득시글대고 있을 것이었다.
* * *
나는 나를 목격할지도 모르는 눈들을 신경 쓰지 않고 전속력으로 날았다.
여유가 있다지만 왕복 일천오백 리가 추가되니 이번 출정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으면 시간이 빠듯해질 수도 있었다. 마련에서는 당연히 속전속결을 택할 작정이었다.
어느덧 날이 밝았다. 고륜산맥까지는 아직 절반도 오지 못했다. 약간 마음이 약해졌으나 나는 오히려 속도를 더 끌어올렸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내가 무작정 충동에 따라 행동했다고 오해하지는 마시라. 다소 무모한 구석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나는 미친놈은 아니었다. 마련(魔聯) 행을 결행한 데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나는 고륜산맥 서단(西端) 건너편에 도사린 자들이 철마류(鐵魔流)의 마인들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 전부를 감당할 수는 없겠지만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한다면 크게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철마(鐵魔) 양천(梁天)과 마주친대도 일대일이라면 능히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마도팔류의 수장들인 팔마(八魔)의 무위는 중원육기와 엇비슷한 수준으로 알려져 있었다. 좀 더 세밀하게 살피자면 팔마 중 최강을 다툰다는 혈마(血魔)와 도마(刀魔)는 중원육기에게 백중우세일 거라 추정되고 나머지는 비등하거나 약간 아래라고 평가받았다.
철마는 팔마의 최약체는 아니지만 육칠 위를 오가는 서열이었다. 그가 종잇장 한 장의 차이라도 괴선보다 약하다면 내 상대는 아니었다. 생사를 두고 겨룬다면 그는 내 십초를 받아내기도 버거울 터였다.
물론 철마가 내게 단독으로 맞서줄 리는 만무했다. 나는 그가 수하들과 합공할 시, 그리고 그것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할 시엔 미련 없이 후퇴할 생각이었다. 내 극상의 섬은 광객이나 괴선의 경신속도를 능가했다. 철마를 비롯한 철마류의 마인들이 쫓아오더라도 나를 잡을 수 없을뿐더러 동료들과 떨어지는 날엔 내 먹잇감이 될 터이기에 나로서는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이 일방적인 수읽기였음을 아직 알지 못했다.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에 나는 고륜산맥에 이르렀다.
고산준봉이 까마득히 늘어선 산맥에 들지 않고 서쪽 끝을 따라 돌았다. 그러면서 새삼스레 진소월에게 감사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수월하게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전날 세연으로 가는 길을 물었을 때 진소월은 그곳만이 아니라 근방의 지리와 주요세력들에 관해서도 겸사겸사 알려주었다. 사파칠문을 중심으로 답하던 그녀가 고륜산맥과 철마류에 대해 언급하자 왠지 귀가 솔깃해진 나는 보다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당시엔 그저 말이 나온 김에 알아두자는 정도의 기분이었으나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때 들은 정보가 아니었다면 아예 철마류를 찾을 발상조차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산자락을 지나자 광야가 펼쳐졌다.
철마류의 본단은 평원의 한가운데 위치해있을 터였다. 들판에 들어서기 전에 나는 진소월이 알려준 내용을 상기했다.
본단에 주둔하는 마인들의 수는 대략 사오백. 초절정의 무위로 추정되는 마두는 적으면 셋에서 많으면 예닐곱. 절정 급의 고수들은 부지기수.
본단에는 마인들만이 아니라 그 수의 스무 배가 넘는 사람들이 거주한다고 했다. 전부 노예들이었다. 기실 마련은 채 일만도 안 되는 마인들과 그 수백 배에 달하는 노예들로 구성된 땅이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에겐 지옥이라는 의미였다.
전신의 근골을 풀어준 나는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양손에 철봉과 옥소를 쥐고 허허벌판을 질주했다. 수십 리를 단숨에 가로질러 철마류 본단에 접근함에 따라 적당한 긴장감이 일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