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51
교랑의경 151화
태평거.
시녀가 비전 증서를 내밀자, 서무수가 이를 받아 오 관리인에게 전달했다.
“그럼 이제 관리인이 수고해 주시오.”
오 관리인은 지난 십수 년간 취봉루를 운영해 왔던 터라, 큰돈을 만져본 적이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 관리인도 이렇게 많은 돈을 한꺼번에 다루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 이걸 다 써도 되는 겁니까?”
관리인이 묻자 서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걸로 부족하다면 알려주시오.”
오 관리인은 웃으며 비전을 정중하게 건네받았다.
“반근 낭자, 성으로 가는 길에 좀 태워 주시오.”
“그러세요. 아, 그리고 아씨께서 진 노태야께 말씀드렸대요. 적당한 때에 태평거를 언급해 달라고요.”
시녀의 말을 들은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방법도 그냥 한번 해 보자는 겁니다. 지금의 보수사는 돈만 보면 좋다고 달려들던 예전과는 다르기도 하고, 매년 공양을 올리는 사람이 많아 별로 대수로울 것도 없거든요. 우리가 그 수조 상인만큼의 인기를 얻을 수 있을지도 확실치 않아요. 부디 아씨와 주인어른께서 이 점을 감안해 주시길 바랍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씨도 그 수조 상인처럼 되길 원하진 않는다고 하신걸요.”
서무수와 관리인은 놀라서 시녀를 쳐다봤다.
“그럼 어찌?”
관리인이 물었다.
“아씨께서 말씀하시길, 부처님이 알아보실 정도로 정성 들여 공양을 올리기만 하면 충분하다고 하셨어요.”
뭐라고? 정말 단지 공양을 위했던 거야?
“옳습니다, 정성을 들여야죠.”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마당으로 돌렸다.
이대작은 탁자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렇게 서서 가장 손에 익는 칼을 찾기 위해 죽 늘어놓은 칼들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래, 부처님이 아실 정도라면, 백성들도 당연히 알 수 있겠지. 이 세상에서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없지 않은가.
보수사는 보름 전부터 선다회 준비로 부쩍 바빠졌다. 준비할 것이 많지만, 선다회가 관례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기에 모두가 익숙한 듯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게다가 보수사에서 지내는 승려의 수가 많아진 덕에, 일손이 모자라 어수선해질 일은 없었다.
“또 큰 건이 하나 들어왔다면서?”
뚱뚱하고 큰 귀를 가진 승려 하나가 장부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천 관입니다.”
다른 승려가 말하며 비전 증서를 건네자, 뚱뚱한 승려가 비전을 쓱 훑어보고 웃었다.
“이제는 이만한 돈을 쓰는 바보도 몇 없는데, 바깥 자리로 하나 내줘야겠네.”
바깥 자리는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노출될 수 있기에, 제일 좋은 자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요즘은 사람들이 바깥 자리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냥 공양일 뿐이잖아. 차라리 그 돈을 백성에게 뿌리면 더 이름이 날 텐데.
“아니요, 이 집은 가장 안쪽 자리를 달랍니다.”
뚱뚱한 승려가 흠칫 놀라더니 손에 쥔 비전을 흔들면서 웃었다.
“재밌군.”
“온 마음을 다해 불상 앞에서 공양을 올리겠다더군요.”
뚱뚱한 승려가 호탕하게 웃으면서 종이 한 장을 북 뜯어냈다.
“좋아, 그럼 더 좋지. 이리 정성이 가득하면 부처님도 당연히 그 마음을 알아주실 테고. 대웅보전 맨 앞자리를 내줘야겠다.”
대웅보전 앞은 선다회를 진행하는 동안 가장 주목받을 수 있는 곳이지만, 공양으로 이름을 날리고자 하는 이들이 선호할 만한 자리는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공양한 음식이 아니라 오직 명해선사가 차를 내리는 모습에 집중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돈을 써가면서 바보짓을 하겠다는 사람이 다 있네. 안타깝지만 굳이 막을 필요는 없지. 난 자비로우니까.
다음날, 날이 밝기 시작할 즈음 진씨 가문의 마차가 옥대교 저택 앞에 도착했다.
“우리 언니는 다른 언니들이랑 먼저 가서, 내가 언니를 데리러 왔어요.”
진단랑이 신이 나서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밖으로 나오고 있는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정교랑이 손을 뻗어 진단랑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일찍?”
“일찍이 아닌걸요. 이따 사람이 많아지면 줄까지 서서 들어가야 한다고요. 지금 가야 우리끼리 밖에서 먼저 놀 수 있어요.”
어린 단랑으로서는 열댓 가지의 선다(禪茶) 의식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보다, 대웅보전 밖에서 조금이라도 더 노는 게 훨씬 좋았다.
“그럼 우리는 밖에서 놀면 되지.”
정교랑의 말에 진단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요? 언니는 다른 사람들처럼 선다 의식을 보러 가는 게 아니에요?”
“‘본승흥이래’라잖아. 그러니 충분해.”
진단랑은 정교랑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마냥 즐겁게 앞장섰다.
“아씨께서 뭐라고 하신 거야?”
뒤에 서 있던 금가아가 시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옛날에 왕휘지라는 사람이 갑자기 흥이 나서 멀리 있는 지인을 보러 갔어. 꼬박 하루나 걸려서 갔지. 그런데 막상 지인의 집 문 앞에 도착하니까 별로 안 보고 싶어진 거야. 그래서 왕휘지는 그 지인을 보지도 않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갔대. 어떤 이가 왕휘지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그가 ‘본승흥이래, 흥진이반(本乘興而來, 興盡而返)’이라고 답했어. 본래 흥이 나서 왔으나, 이제 흥이 떨어졌으니 돌아가는 것이라고.”
“그게 무슨 헛수고야.”
금가아와 반근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시녀가 웃으며 말했다.
“헛수고가 아니라, 그냥 그랬다는 거지. 덕분에 금가아는 좋은 거 아냐?”
선다에는 족히 여남은 가지의 의식이 있다. 정교랑이 만약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가서 선다 의식을 빠짐없이 보고 나온다면, 금가아는 한참 동안 아무 데도 못 가고 꼼짝없이 문밖에 서 있어야만 할 것이다.
금가아가 헤헤 웃었다.
정교랑을 태운 진씨 가문의 마차 외에, 시녀는 다른 마차 한 대를 더 빌려 금가아와 반근과 함께 탔다. 각자 자리를 잡고 앉자, 마차가 보수사를 향해 출발했다.
보수사 앞은 언제나 인파로 붐볐지만, 지금은 적막감만이 맴돌았다. 새로이 황토를 깔아놓은 길 위에는 오성병마사(五城兵馬司) 병졸이 일렬로 쭉 서 있었다. 대웅보전에서 선다 의식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사람들부터 먼저 입장한 후에야 일반 백성이 들어갈 수 있었다.
오성병마사 병졸까지 질서유지를 위해 나온 이유는 황족도 참석하기 때문이었다. 밤부터 선다회를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을 막아서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왔다, 왔어.”
이 한마디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한곳으로 집중됐다. 황제는 몸이 편치 않아 웬만해서는 이런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 황자가 둘이나 있지만 모두 나이가 어려 궁 밖을 나서기 어려웠기에, 그간의 선다회에는 경성에 있는 친왕 두 명만 참석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의장대의 크기와 기세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보수사 쪽을 다시 쳐다보니, 오직 천자를 위해서만 열리는 중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대황자께서 오셨네!”
대황자는 천자가 아니지만, 천자를 대신하여 온 것이니 보수사도 그에 맞는 큰 예를 표한 것이다.
소식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갔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서로 밀고 밀치며 시끌벅적해지자, 병마사가 채찍을 몇 차례 땅에 휘둘러 소란을 잠재웠다.
황실 의장대가 지나가자 이어서 경성 안팎의 권문세가 사람들이 입장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백성들은 점점 지치고 흥이 떨어져 빨리 좀 움직이라고 속으로 재촉했다.
황궁 안. 진안 군왕은 무료하게 편전에 앉아 손에 든 책을 위아래로 던지고 있었다.
“전하, 정말 가지 않으시렵니까?”
내시가 물었다.
“안 가. 그 노승이 반나절 내내 다기나 붙들고 으쓱거리는 걸 답답해서 어떻게 보나? 차라리 다 끝나고 찾아가서 나한테만 차 한 잔 우려 달라고 하는 게 편하지.”
“오늘은 북적북적하잖습니까. 전하 혼자 차를 드시는 것은 재미가 없지요.”
내시가 한숨을 내쉬다가,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소인, 전하께서 처음으로 궁에 오신 날이 기억납니다. 밤새도록 소인의 옷소매를 놓아주시지 않아, 소인이 결국 바지에 실례를…….”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안 군왕은 점점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더니, 내처 들고 있던 책까지 바닥에 내던지고 허벅지를 치며 웃었다. 내시는 군왕을 따라 웃으면서도, 절로 눈물이 고이는지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이번에는 대황자께서 행차하셨으니, 전하께서는 행렬을 크게 거느릴 것 없이 편히 둘러보고 오시면 됩니다.”
내시가 재차 타일렀다.
“보수사에서 국수 한 그릇만 들고 오셔도 좋고요. 다른 때면 몰라도 오늘은 도저히 전하께서 혼자 계시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진안 군왕은 미소를 지은 채로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얼마 전부터 전하께서 별다른 묘책 없이 계속 고민하시던 일도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사람들이 많이 온다니, 진씨 가문 사람들도 틀림없이 갈 겁니다. 그 여인이 진씨 가문 사람이어도 갈 테고, 진씨 가문의 손님이면 더더욱 가지 않겠습니까.”
내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안 군왕이 벌떡 일어섰다.
“그건 그래.”
진안 군왕이 웃으며 양팔을 넓게 벌렸다.
“여봐라,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 * *
워낙 성대한 행사다 보니, 장 노태야도 빠질 수 없었다. 장 노태야가 마차에서 내릴 무렵, 보수사 안은 이미 인파로 북적였다. 장 노태야를 뒤따르는 이는 맏손자 장성(張成)이었다.
“할아버지, 소손 내일 먼 길을 떠나면 적어도 이, 삼 년 동안은 못 돌아옵니다. 보수사의 차는 한동안 마시기 힘들겠네요.”
장성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승려가 우린 차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이조차 깨우치지 못한 녀석은 그 차를 마시지 않아도 그만이지.”
장 노태야가 손자와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멀리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태야, 노태야.”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자 저 멀리서부터 뛰어오고 있는 몸종이 보였다.
“반근!”
장성이 놀라서 외쳤다.
“공자님.”
몸종은 아차 싶어 서둘러 장성에게 예를 올렸다.
“네가 모시는 낭자도 왔고?”
장 노태야가 웃으며 물었다.
“예.”
“차를 마시러 왔느냐?”
몸종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손으로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네, 그리고 태평거에서 공양을 드리러 왔어요.”
장 노태야와 장성은 몸종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람들이 어깨와 양손 가득 광주리를 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공양? 태평거에서?”
장 노태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널 데려갔던 게로구나.”
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평거? 네가 태평거에 있다고?”
장성이 놀랐는지 큰 소리로 물었다. 몸종이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성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데, 몸종은 급한 표정으로 예를 올렸다.
“죄송하지만 얼른 일을 도우러 가야 해서요. 나중에 노태야의 시중을 들러 다시 올게요.”
장성은 멀어져 가는 몸종의 뒷모습을 보며 놀란 표정으로 장 노태야에게 말했다.
“태평거가 저 애 주인의 것이란 말입니까? 그럼 차정사에 있는 그 글씨를 누가 썼는지도 알 텐데요!”
장성이 흥분해서 손을 비벼댔다.
“참으로 잘됐습니다! 할아버지, 어서 저와 함께 가서 그 글씨를 쓴 사람이 대체 어느 분인지 물어봐 주세요.”
장 노태야 역시 처음엔 놀란 표정이었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과연 그랬구나. 바로 그 여인이었어, 그 여인이었다고!”
“누구요?”
장성이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저 낭자가 또 태평이라는 이름을 썼네.”
장 노태야는 장성이 물어보는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허허 웃기만 했다.
“‘하늘의 도는 공평무사하여 선함을 칭찬하니 이는 곧 태평이라.’ 훌륭한 이름이구려.”
언젠가 나눴던 말이 귓가에 절로 울렸다.
“태평 만두가 확실히 맛있긴 했지.”
장 노태야가 껄껄 웃었다.
태평 만두? 장성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게 태평 만두랑 무슨 상관이지? 태평거가 만두를 파는 곳도 아닌데.
장성이 잠시 멍해진 사이, 장 노태야는 말없이 대웅보전 안으로 들어갔다. 장성도 잽싸게 뒤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