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10
교랑의경 210화
새벽빛이 어슴푸레 비출 무렵, 사환은 지팡이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사환의 눈에 진 공자가 실내에서 걸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도련님, 필요한 거 있으세요?”
사환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활 두 개를 챙겨야겠다. 저번에 배나무로 만들었던 활은 어디 있지?”
사환이 진 공자와 함께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활을 찾았다.
“근데 정오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직 시간이 이른데요.”
사환이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물시계를 보며 말했다. 여름이라 해가 일찍 뜨긴 했지만, 아직 묘시밖에 안 된 시각이었다. 그 말에 진 공자도 손을 멈추고 물시계를 쳐다봤다.
“아직 이르구나.”
진 공자는 아득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물건들을 내려놓고, 지팡이를 짚으며 밖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진 공자는 날이 다 밝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디 가지?”
정오가 가까워졌다. 진 공자가 서둘러 문을 나서려는데, 진 부인이 불러세웠다.
“요새 뭐가 그렇게 바쁘니?”
“하하, 노느라 바쁘죠. 무슨 일 있으세요, 어머니?”
진 부인이 막 입을 떼려는데 진 공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인지 다음에 하세요. 늦으면 안 될 약속이 있어서요.”
걸음을 재촉하는 진 공자의 뒷모습을 보며 진 부인은 실소를 터트렸다.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었는데.”
둥글부채를 흔들던 진 부인은 아들이 나가는 방향을 가리키며 옆에 있던 여종에게 말했다.
“뭐라 둘러대고 빠져나가나 보려고 일부러 온 거야.”
곁에 있던 여종들이 쿡 웃었다.
“뭐하러 도련님을 놀리세요. 안 그러셔도 마음이 붕 떠 있을 텐데.”
“내 아들이 처음으로 여인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 아니더냐. 어미가 되어서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진 부인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도련님께서 잘 보이려 하시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다리를 고치기 위해서잖아요. 부인께서 도와주시지는 못할망정, 구경하느라 바쁘시네요.”
여종들은 탓하듯이 종알거렸다. 진 부인은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도와줘야지, 도와주고말고. 여봐라, 진 상공 댁으로 가자꾸나.”
진 상공 댁에 가신다고? 여종들이 서로 눈짓을 했다. 진 상공 댁에 가서 무얼 하시려고?
“공자님, 뭐로 가져다드릴까요?”
주육낭은 점원의 물음에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고 미간을 찌푸렸다.
“대충 있는 거로 주시오.”
식당 안으로 들어왔으면서 무슨 음식을 파는지 묻는 게 아니라, 가만히 창가에 앉아 풍경을 감상하는 사람이라니. 식당을 찾는 이들이 많아 별별 사람을 다 본지라 점원도 딱히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점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고기 요리 하나, 채소 두 접시, 식전 과일 네 가지를 올려 드리고, 마실 것으로는 옥당춘의 술과 보수사의 차를 올리는 게 어떨까요?”
보수사의 차까지 들여왔다고? 주육낭은 잠시 멈칫했다.
보수사의 차라면 단순히 태평 두부로 바꿔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진십삼한테 이런 일까지 시키다니, 아주 당당하게도 요구하네!
아니지, 도움 따위 필요 없다고 하는 것보단 도움을 청하는 게 훨씬 나아. 그래도 주육낭은 어딘가 찜찜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공자님?”
점원이 멍하니 앉아 있는 소년을 다시 불렀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어쩜 저리 수심이 가득한지.
정신을 차린 주육낭이 귀찮은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렇게 주시오.”
주육낭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찡그리며 게슴츠레 뜨자, 마차 두 대가 태평거 뒷마당으로 줄지어 들어서는 게 보였다.
무뢰배를 화살로 쏘아 죽이고, 신선거를 박살 낸 후로도 무사평온한 날들이 이어지자, 부처님이 태평거를 지켜준다는 소문이 사람들 마음속에 더욱 깊이 자리하게 됐다.
뒷마당은 아무나 들어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뒷마당을 거리낌 없이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태평거 사람들뿐이었다.
텅 하는 진동 소리와 함께 긴 화살이 활시위를 벗어나 열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과녁의 정중앙을 맞혔다. 과녁에는 각각 위아래로 네 개의 화살이 꽂혀 있었다. 가히 전부 명중이라고 할 만했다.
“나쁘지 않네요.”
정교랑이 말했다. 시녀는 정교랑의 소매를 동여매고 있었다. 진 공자가 정교랑을 보며 씩 웃었다.
“잘 서지도 못하면서 용케도 활을 쏘는군요.”
이어지는 정교랑의 말에도 진 공자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긴 소매를 깔끔하게 정돈한 정교랑은 활을 들고 꼿꼿하게 서서 활시위를 당겼다. 또 한 번의 진동 소리와 함께 긴 화살이 날아갔지만, 화살은 과녁을 빗나갔다.
손재는 얼른 문 옆으로 몇 걸음 옮겼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실력은 전혀 안 느셨네.
진 공자가 하하 웃었다. 정교랑은 분하고 열 받는 듯한 표정으로 진 공자를 힐끔 쳐다봤다. 물론, 그저 진 공자의 추측에 불과했지만. 웃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무뚝뚝한 표정만 짓는 여인이니 말이다.
정교랑은 곧이어 화살을 세 개나 더 쏘았지만, 과녁에는 겨우 두 개만 위태롭게 꽂혀 있을 뿐이었다.
“낭자는 아직 힘이 부족한가 봅니다.”
진 공자는 다시 자신의 활을 들며 말했다.
“그럼 뭐 어때요. 난 내가 보통 사람과 같다는 걸, 이런 거로 남들한테 증명해 보일 필요도 없는데.”
정교랑이 활을 내리고 진 공자를 보며 냉담하게 말했다. 진 공자는 팔을 올리다가 멈칫하고는 잠자코 웃기만 했다. 또 한 발의 화살이 날아가 과녁을 명중했다.
“큰오라버니.”
정교랑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회랑 아래 서 있던 범강림이 얼른 대답하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큰오라버니도 한번 해 봐요.”
정교랑의 말에 범강림은 진 공자를 힐끔 쳐다봤다. 진 공자가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활을 건넸다.
“내 활을 쓰십시오. 반곡궁(反曲弓)입니다.”
범강림이 굳이 사양하지 않고 활을 건네받은 후, 손에 들고 한번 움직여 본 후 곧장 활시위를 당겼다.
“큰오라버니, 망신당하면 안 돼요.”
정교랑의 말과 함께 매섭게 날아간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을 맞혔다. 힘이 어찌나 셌는지, 화살은 과녁의 정중앙을 뚫어버렸다.
깜짝 놀란 손재는 안으로 뛰어 들어가 숨어버렸다. 궁술은 좋지 않아도 위험하고, 너무 좋아도 위험하네.
시녀가 환호성을 질렀다.
“큰도련님, 정말 대단하세요!”
시녀가 손뼉까지 치면서 외치는 모습을 보니, 일부러 놀란 척을 하는 건 같진 않았다. 진 공자도 웃으면서 감탄했다.
“역시 한밤중에 늑대 떼를 물리칠 정도의 호걸이군요.”
범강림은 쑥스러운 듯 아니라며 몸을 낮췄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봤어요? 이게 바로 진정한 사내대장부의 모습이죠. 당신은, 아무리 연기를 해도 이렇게 안 돼요.”
정교랑의 말에 뒷마당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저 녀석, 아씨께 원수를 졌나?”
안에 있던 손재는 조수 쪽에 대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말을 너무…….
어린 낭자였다면 벌써 울음을 터트리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진 공자는 어린 낭자가 아닌지라 잠시 당황하다가 금세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연기한 적 없습니다.”
“연기한 적 없다고요? 그럼 절름발이 주제에 뭐하러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우죠? 절름발이면 분수에 맞게 가만히 마차에 앉아서, 남들이 활 쏘고 말 타는 걸 구경하면 되잖아요. 뭘 배운다 한들, 당신이 절름발이라는 사실을 바꿀 순 없어요.”
누군가의 발길질에 뒷마당의 문이 쾅 소리와 함께 거칠게 열렸다. 범강림이 화들짝 놀라며 즉시 싸울 태세를 갖췄다. 주육낭이 손에 젓가락을 꽉 쥔 채 달려들었다.
“정교랑! 그만하라고 했잖아!”
주육낭이 고함을 질렀다. 범강림은 정교랑 앞에 서서 돌진해 오는 주육낭을 막았고, 진 공자 역시 얼른 지팡이를 짚으며 주육낭을 저지하기 위해 다가갔다.
“그만 못 한다고 했잖아요.”
정교랑이 주육낭을 빤히 보며 대답하자 주육낭은 쥐고 있던 젓가락을 바닥에 세게 내팽개쳤다.
“정교랑! 뭘 어쩌고 싶은 건데? 사람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셈이야! 너처럼 이렇게 끝도 없이 모욕을 주는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어!”
“뭘 어쩌고 싶은 건 아니에요. 둘이 이러는 걸 보면, 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정교랑의 담담한 말에 주육낭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눈도 터질 듯 붉어졌다. 진 공자는 주육낭을 잡아 세우며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정 낭자, 난 믿지 않습니다.”
진 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뭘 안 믿는다는 거지? 다들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정교랑도 진 공자를 따라 미소지었다.
“사실 나도 믿지 않아요.”
정교랑은 진 공자를 쳐다보며 한 손으로 주육낭을 가리켰다.
“정말, 저 사람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아요?”
주육낭은 찢어질 정도로 눈을 부릅뜨고,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떨었다. 누가 보아도 미칠 듯이 분노가 차오른 모습이었다.
“사실 난 한마디면 돼요.”
정교랑이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인 주육낭을 가볍게 무시하고 진 공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계속 좋은 사람인 척 연기할래요? 아니면, 본심을 인정할래요?”
진 공자가 정교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못 믿겠습니다.”
뭘 못 믿는다는 거야, 도대체?
“정교랑, 내가 죽어야 끝내겠다는 거지? 빌어먹을, 대체 얼마나 더 들볶을 생각이야? 진십삼이 그동안 도와준 게 얼만데. 왜 이렇게 양심이 없어?”
주육낭이 정교랑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입 다물어!”
급작스러운 우렁찬 고함이 주육낭의 말을 끊었다. 마당에는 다시 한번 적막감이 맴돌았다.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진 공자에게 시선을 모았다.
언제나 온화한 문인의 분위기를 풍기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온 저 소년이 이렇게나 거친 소리를 낼 수 있었다니.
“맞습니다. 원망하죠, 원망하고말고요.”
진 공자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원망하는 건 저 녀석이 아닙니다. 이 일은 다른 사람과 아무 상관 없어요.”
그는 팔을 벌리고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건 아무와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게, 내 운명일 뿐이죠.”
진 공자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난 절름발이예요. 절름발이로 점쳐진 운명이라고요. 근데 또 딱히 방법이 없잖습니까. 내가 울고불고 욕한다 해서, 절름발이가 아닐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진 공자가 마지막 한마디를 외쳐내자, 한쪽에서 씩씩거리던 주육낭은 화난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진 공자를 쳐다봤다.
“맞아요, 난 절름발이죠.”
진 공자는 지팡이를 짚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연기하고 있는 것도 맞습니다. 연기를 안 하면 어떡합니까! 남들의 비웃음과 조롱 속에서 엉엉 울까요? 아니면 어디로 숨을까요? 숨는다 한들, 어디로 숨을 수 있겠습니까? 죽지 않는 한, 내가 어디로 숨을 수나 있냐고요!”
진 공자는 정교랑을 쳐다봤다.
“이제 만족합니까? 무릎 꿇고 빌라고 하면, 지금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빌겠습니다. 어차피 낭자 한 사람 앞에 꿇으면 될 일 아닙니까. 아무렴 평생을 꿇어 있는 것보다는 낫지요!”
진 공자의 외침이 멈추자 마당은 일순간 고요해졌다.
“십삼, 그만 가자.”
주육낭이 진 공자를 잡아끌려 하자 진 공자가 곧바로 소리쳤다.
“자넨 저리 비켜. 이건 자네와 상관없는 일이야!”
주육낭은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서서 긴 한숨을 토했다.
“정 낭자, 난 믿지 않습니다. 낭자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믿지 않아요.”
진 공자가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믿지 않아요. 못 믿겠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