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61
교랑의경 261화
이 여인은 언제나 그랬다. 왕 공자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면, 분명 한 치의 숨김 없이 말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지금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괜히 기분만 상하게 할 수 있으니. 지금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갑작스레 찾아온 이 기쁨을 만끽하련다.
“낭자, 날 따라와요.”
진십삼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화려한 불꽃이 하늘 곳곳에서 터지고, 알록달록한 꽃등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모습은 여름 밤하늘을 수놓는 은하를 연상케 했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물가의 안개 덕분에 몽환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정말 아름답네. 역시 달라.”
진십삼이 감탄했다.
“뭐가 다른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십삼은 창밖의 은하수를 내다보며 대답했다.
“예전에 했던 꽃등 놀이도 즐거웠어요. 내가 남들과 같은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진십삼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병이 낫고 보니 또 다르네요. 보통 사람의 기쁨은 이런 거구나 싶어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요.”
진십삼은 물가에 자욱한 물안개처럼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정교랑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교랑이 진십삼을 진지하게 빤히 쳐다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정교랑이 진십삼의 다리를 고쳐줄 때였다. 하지만 당시 진십삼은 마음이 불안하여 정교랑이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는지 알아챌 겨를이 없었다.
덕승루는 바깥의 등불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실내의 등불을 몇 개 꺼 두었다. 이따금 하늘을 수놓는 불꽃이 어두컴컴한 실내를 잠시나마 환하게 비췄다.
어두운 등불 아래서 보니, 저 여인의 무뚝뚝한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 보이네. 보통 사람이라면, 환골탈태하여 운명이 크게 바뀐 것에 대해 감개무량하겠지.
“아니요. 당신은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보여요.”
정교랑의 말에 진십삼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낭자는 그렇게 생각합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아직도 진정한 사내가 아니에요.”
진십삼이 흠칫 놀랐다. 전에도 이런 말을 들어 본 적 있었다. 정교랑이 자신을 분통 터트려 죽이려 할 때였다.
“과거를 돌이키며 감상에 젖어 허세를 부리고 있잖아요. 지나갔으면 지나간 거지, 감개무량할 게 뭐 있어요? 감당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다는 태도는, 사내대장부답지 않죠.”
정교랑이 천천히 말했다. 진십삼은 잠시 놀라나 싶더니,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시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네. 맞아요. 낭자 말이 맞습니다. 낭자를 알게 된 후로 시시각각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네요.”
진십삼이 허리를 곧게 펴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건 내 덕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 덕분이에요. 내가 할 모든 말들은, 전부 당신이 먼저 하는 말에 달렸으니까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낭자와 대화를 나누는 게 책을 십 년 읽는 것보다 유익하네요.”
“그럼, 속수(束修: 옛날에 선생과 제자가 처음 만날 때, 제자가 존경심을 표하기 위해서 선생께 바치는 육포 묶음)는 어디 있죠?”
안팎으로 드리우는 불빛이 소녀의 진지한 얼굴을 비추었다. 진십삼은 멈칫했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을 곱씹을수록 정교랑의 말이 웃겼는지, 아예 창틀에 손을 짚으며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고개를 돌린 시녀는 반근과 금가아를 쳐다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뭐가 웃겨?”
반근과 금가아도 진십삼을 따라 웃음을 터트리긴 했지만, 시녀의 질문을 듣자 맹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됐다. 안 물어본 거로 치자.”
시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감미로운 피리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이쪽을 향해 천천히 돌아오는 화려한 꽃배의 움직임에 꽃등으로 가득한 은하가 넘실거렸다.
“꽃배가 어딜 가는 거지? 왜 다시 돌아가는 거요?”
사람들 틈에 껴 있던 왕십칠은 돌아가는 꽃배를 보며 한탄하듯 외쳤다.
이제야 다리 위에 좋은 자리를 잡았다 싶어서, 꽃배가 내 쪽으로 오기만을 기다렸거늘. 손만 흔들면, 주 낭자가 볼 수 있는 자리에까지 왔는데!
물론 이 수많은 사람이 죄다 주 낭자를 불러대는 통에 주 낭자가 쉽사리 날 찾지는 못하겠지만, 내 편인 춘령이 그 계집애가 낭자 옆에서 나를 가리키기만 한다면 낭자는 바로 날 볼 수 있을 거야.
잠시 뒤의 광경을 상상하던 왕십칠은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로 기대에 찼다.
근데 왜 배가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돌아간 거지?
“타지 사람이라 잘 모르나 본데, 꽃배는 어쨌든 덕승루의 것이니 당연히 손님을 모으기 위한 용도 아니겠소. 주 낭자가 뭐하러 굳이 꽃배로 경성 바닥을 한 바퀴 도나? 꽃배로 손님을 좀 모은 다음에, 덕승루 앞으로 돌아가 가무를 선보이지.”
가무? 왕십칠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주 낭자의 가무라니!
“그건 부잣집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거요. 덕승루의 방을 예약한 사람들은 창가 앞에서 주 낭자의 가무를 감상할 수 있지. 댁과 나처럼 돈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라도 즐길 수 있는 거에 감사해야 해.”
옆 사람의 장광설을 듣던 왕십칠이 악 소리를 내질렀다.
“예약한 방에서 볼 수 있었단 말이오?”
왕십칠이 그 사람의 팔을 꽉 움켜쥐며 외쳤다.
“당연하잖소. 무려 예약인데.”
옆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왕십칠은 분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일찍 좀 말해주지 그랬소! 이럴 줄 알았으면 바보같이 뛰어나오지도 않았을 텐데!”
왕십칠은 주위 사람을 밀치면서 서둘러 다리를 내려갔다. 그는 빽빽한 사람들 사이를 거꾸로 비집고 들어가면서 연신 욕을 해댔다.
“퉤. 누가 들으면 예약해 둔 방이 있는 줄 알겠네.”
다리 위에 있던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침을 뱉으며 욕했다.
주 낭자가 탄 꽃배가 덕승루 앞에 멈춰 섰다.
주위의 소란스러움이 차츰 잦아들고, 곧이어 잔잔한 수면 위에 옥구슬을 떨구듯, 경쾌하고 아름다운 비파 연주곡이 감미롭게 울려 퍼졌다. 한 곡이 끝나자 주위에서 열띤 환호를 보내왔다.
미소를 머금고 뱃머리에 앉아 있던 춘령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덕승루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덕승루의 이 층, 삼 층 예약 방들의 창문이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창가에 장식되어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들과 창문 너머로 방마다 가득한 사람들이 보였다.
무수히 많은 시선 아래서, 춘령은 돌연 하던 동작을 멈추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창문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춘령이 쳐다보고 있던 곳에는, 다른 이들처럼 주 낭자의 가무를 즐기고 있는 사람 몇 명이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저 사람이 여기에!
춘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몇 걸음 내디디고 눈을 힘주어 껌뻑였다.
등불과 불꽃 때문에 방 안은 밝아졌다 어두워지길 반복했지만, 춘령은 틀림없이 그 여인을 봤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여자잖아! 저 사람이 어떻게 예약 방에 들어갔지?
춘령은 왕십칠에게 방을 예약했다고 했지만 실은 거짓이었다.
일개 몸종이 어떻게 방을 예약할 수 있겠어? 아무리 내가 아씨의 몸종이라지만, 그건 아씨께서 직접 나서 주시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지.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씨께 가서 방을 달라고 말씀드릴 순 없잖아?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아씨의 의심을 사는 짓을 했다가는 내 앞길이 끝장나 버릴 거야. 복수도 당연히 물 건너가겠지.
그나저나, 저 사람들은 어떻게 방을 예약한 거야? 왕십칠이 그렇게 대단해?
춘령은 창가에 있는 사람들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춘령.”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춘령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주 낭자가 춘령에게 비파를 건네고 있었다. 넋이 나간 춘령 대신 다른 시녀가 비파를 받아 준 덕에 민망한 상황은 모면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춘령이 당황해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아. 처음이라 긴장될 거야.”
주 낭자가 따뜻하게 미소지으며 춘령을 다독였다. 춘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감격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북소리가 울리자, 좀 전과는 다르게 꽃배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다. 배 위의 모든 빛이 중앙으로 모일 수 있도록 구리거울을 비스듬하게 세워 만든 무대는 대낮보다도 훨씬 더 밝아 보였다.
그새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주 낭자가 가벼운 몸짓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소매와 치맛자락이 강바람에 살랑이자 주 낭자의 모습은 마치 월궁의 선녀 같았다.
“춤을 잘 추네요.”
진십삼이 웃으면서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부단한 노력이 있었겠어요.”
진십삼이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보며 싱긋 웃었다.
“낭자의 춤은 어떻습니까?”
춤?
“아씨께서 춤을 추실 줄 아시나?”
반근이 시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진 공자님이 갑자기 춤에 관해서 물으신다고?
“문외한은 구경만 하지만, 전문가는 기술을 본다잖아. 단번에 주 낭자가 부단한 노력을 했다고 하시는 걸 보니, 아씨께선 전문가가 맞는 것 같은데?”
시녀가 조용히 대답하고는 반근을 쳐다보며 되물었다.
“근데 아씨께서 춤을 출 줄 아신다는 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하긴 그렇지. 반근은 머쓱하게 웃음 지었다.
춤이라……. 정교랑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앞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춤을 추며 빠르게 사라졌다.
“모르겠어요.”
정교랑이 눈을 뜨고 대답했다.
춤을 출 줄 모른다는 건가? 혹은 자신의 춤이 뛰어난지 모르겠다는 건가?
정교랑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지만, 진십삼은 그녀가 일순간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눈치챘다.
“내가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었네요.”
진십삼이 강가에서 시선을 떼고 다소 불안한 듯 말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엔 당신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에요.”
“그럼, 내가 도울 수 있는 겁니까?”
진십삼이 정교랑을 쳐다보며 미소 지었다. 이때,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진십삼의 말을 삼켰다.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젓고 불꽃놀이를 올려다보았다. 찬란한 불꽃이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춘령은 다시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뎌 좀 전의 그 창문을 노려보았다. 창가에 있던 소년의 준수한 얼굴이 불꽃에 반짝 빛나다가, 사그라지는 불꽃을 따라 희미해졌다.
하지만 춘령은 그 소년이 어떤 눈빛과 웃음으로 정교랑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저건 왕십칠이 아니잖아! 그럼 누구지? 저 여자를 보며 왜 저토록 애틋하게 웃는 거야?
저 여자, 왕십칠한테 버림받은 창피함을 느끼긴커녕, 다른 사내가 와서 비위 맞추는 걸 받아주고 있어. 심지어 딱 봐도 왕십칠보다 훨씬 나아 보이는 소년 공자가!
춘령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는 주 낭자를 따른 이후 처음으로 후회란 것을 느꼈다. 그 후회란, 주 낭자와 함께 꽃배를 타고 있느라 지금 당장 아무나 붙잡고 저 공자가 누구냐고 물어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후회였다.
내가 저 바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너무 적었어!
등불이 또 한 번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던 차에, 창가에 서 있던 소년이 춘령 쪽을 가리켰다. 춘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이며 뒤로 물러섰다. 춘령의 심장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쿵쾅거렸다.
날 발견한 건가? 날, 날 알아본 거야?
“저기 좀 봐요.”
진십삼이 꽃배 위의 주 낭자를 가리켰다.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제자리에서 빠르게 돌고 있는 주 낭자의 모습은 흩날리는 눈꽃처럼 아름다웠다.
“우리의 인연을 말하다 보니 생각이 난 건데, 낭자는 저 여인의 은인입니다.”
정교랑은 진십삼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