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301
교랑의경 301화
시간이 흘러 어느새 늦가을인 10월이 됐다.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나뭇잎들이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만 흔들거렸다.
나막신 한 켤레가 일부러 낙엽을 밟고 지나가자, 마당 안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그러시면 안 돼요.”
여종이 소리 나는 곳을 향해 웃으면서 말했다.
진단랑은 치맛자락을 들고는 달각달각 나막신 소리를 내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방 안에서는 진 노태야와 진소가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단향목으로 만들어진 쌍육 말판이 있었다.
“일이 그렇게 심각했단 말이냐? 태창로 전운사가 그 정도로 간덩이가 부었다니.”
진 노태야의 말에 진소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조정에서 집으로 돌아온 지 꽤 지났지만, 진소의 얼굴에는 아직 노여움이 남아 있었다.
“이게 다 고씨 가문이 뒤에서 받치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지요. 감히 전운사까지 손을 뻗다니, 욕심에 눈이 멀어 체면을 내팽개쳤습니다. 참, 풍림은 관을 옆에 두고 역참을 떠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듣기로는 왼쪽 팔을 못 쓰게 될 거라고 합니다.”
진 노태야는 진소의 말을 들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풍 머저리도 참 재수가 없었네.”
“아닙니다. 어쩌면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죠. 큰 재난에도 죽지 않고, 결정적인 증거까지 확보했으니까요. 그러지 못했다면, 그거야말로 재수 없는 일이었겠죠.”
“지나가던 행인이 불의를 보고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지?”
“네. 비가 올 것 같은 날이라, 사람들이 역참에 많이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태창로 그 나쁜 놈들한테 운이 없기도 했지요. 역참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맞섰다고 하니.”
진 노태야는 짧게 아, 하고 대꾸를 하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폐하께서 크게 진노하셔서 어사대를 시켜 사람을 잡아 오라고 명하셨습니다. 태창로에 주군하고 있던 장병들에게 풍림의 호위를 도우라고도 하셨고요. 이번엔 고씨 가문에서 또 얼마나 주도면밀할지······ 감히 못 나설까 걱정이기도 한데······ 나선다면야······.”
진소는 혼자 말을 계속 이어나갔지만, 진 노태야는 넋이 나간 모습으로 쌍육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듣기로는 행인 덕분에 불길을 잡을 수 있었고, 불을 질렀던 두 명의 태창로 서리들을 행인이 화살로 쏘아 죽였다지. 태창로 놈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목에 힘을 주고 으스대며 도망치지는 않았을 터. 필경 남몰래 빠져나가려 했을 텐데, 그 난리 통 속에서 두 놈을 정확히 명중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자로구나.
행인이라······.
행인?
진 노태야가 갑자기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자, 말하고 있던 진소가 깜짝 놀랐다. 진 노태야가 눈을 크게 뜨고 진소에게 물었다.
“정 낭자가 떠난 지 얼마나 됐지?”
진 노태야가 정교랑을 언급하자, 문 앞에 쪼그려 앉은 채 여종들이 곤충 낚시를 하며 노는 것을 구경하던 진단랑이 고개를 휙 돌리고 외쳤다.
“할아버지, 정 언니가 떠난 지는 한 달쯤 됐어요.”
진단랑이 벌떡 일어나 방 안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진 노태야는 진단랑을 향해 미소 짓고는, 책상 한쪽에 끼워져 있던 족자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 펼쳤다. 황궁에서 복제해 왔기에 천금의 값을 지니는 매우 귀중한 지도였다.
진소가 서둘러 진 노태야 옆으로 다가가 지도를 펼치는 것을 도왔다. 진단랑도 호기심 어린 얼굴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진 노태야가 지도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럼 열흘 전에 정 낭자가 지나갔을 지점이 바로······.”
진 노태야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따라 천천히 동선을 그리다가 한 곳에서 손가락을 멈추고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 노태야가 움직임을 멈추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진소는 고개를 숙이고 진 노태야가 손가락으로 짚은 위치를 보았다. 진소도 진 노태야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태창로.
태창로!
“아버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진소가 좀 전보다 목청을 높여 말했다. 진 노태야가 웃으며 지도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나도 네가 생각하는 걸 생각하고 있다.”
진 노태야가 비꼬는 투에 진소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저는 정 언니를 생각해요!”
진단랑은 이때가 끼어들 틈이라고 생각했는지 천진난만한 말투로 말했다. 진단랑의 말을 들은 진 노태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진소는 별다른 말 없이 물러나겠다고 예를 올린 뒤, 서재에 돌아가 손에 책을 한 권 쥐고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읽지 못하고 책을 내려놓았다.
풍림이 친필로 작성한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도움을 주었던 일행은 약 이십 명이고, 경성에서부터 한 여인을 호송해 오고 있었다.’
여인!
현장에서 두 명을 화살로 쏴 죽였다? 설마 정말로 그 강주 바보는 아니겠지?
황궁 안. 두 내시가 지도를 펼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가까이 다가와 손가락으로 지도 위를 가리켰다.
“걸어서 가는 속도로 계산하면, 오늘은 이쯤 갔겠군.”
진안 군왕은 미소 지으면서 지도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천천히요, 천천히.”
뒤이어 진안 군왕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외치는 듯한 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황자가 그의 뒤를 향해 덮쳐올 때까지, 진안 군왕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도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형님, 뭘 보고 있어요?”
이황자가 진안 군왕의 팔을 끌어안으며 물었다. 진안 군왕은 안은 이황자의 팔을 당겨 이황자를 지도 앞에 세웠다.
“지도요.”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지도가 뭐예요? 그림이에요?”
이황자가 눈앞의 커다란 두루마리 그림을 보면서 물었다. 어린 이황자의 눈에는 수많은 곡선과 점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이 딱히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음, 지도가 뭐냐면, 천하예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손가락으로 지도 위를 가리켰다.
“봐요. 여기가 경성이에요.”
진안 군왕이 가리키는 곳을 보기 위해 이황자는 지도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놀란 눈으로 말했다.
“경성? 내 손가락보다 작은데요?”
이황자가 단풍잎 같은 통통한 손가락으로 진안 군왕이 가리키는 곳을 함께 짚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이황자의 이마를 살짝 튕겼다.
“이건 축소한 거니까요. 이러지 않으면 이 넓은 천하를 어떻게 종이 하나에 다 담겠습니까? 나중에 좀 더 자라 사부님께 천문과 지리를 배울 때쯤이면 알게 될 겁니다.”
이황자는 알겠다는 듯이 탄성을 뱉고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으면서 여긴 어디고 저긴 어디냐고 끊임없이 물어댔다. 진안 군왕은 웃으면서 이황자의 질문에 다정하게 하나씩 대답해 주었다.
그렇게 한참 놀고 난 뒤, 진안 군왕은 이황자에게 황후한테 가 보라고 했다.
“황후마마께서는 자꾸 저한테 숙제하라고 하시잖아요.”
이황자는 가기 싫다는 듯 몸을 배배 꼬면서 진안 군왕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황후마마께서는 전하를 걱정하셔서 그러는 겁니다. 비록 황후께서 전하를 낳아 주신 건 아니지만, 전하를 키워 주셨잖습니까. 그러니 이토록 전하를 아끼시지요.”
진안 군왕은 이황자를 타이르며 그의 눈높이에 맞도록 자세를 낮추어 앉았다.
“애정이 있는 만큼, 가르침이 있는 법이지요. 제가 전하처럼 애정을 받으려면······.”
진안 군왕은 순간 아차 싶어 재빨리 말을 고쳤다.
“아니, 전하처럼 애정을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이황자는 군왕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충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가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대한다면, 그들도 똑같이 전하의 마음을 느낄 겁니다. 그러니 진심을 다해 남을 잘 대해 줘야 해요.”
진안 군왕은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얹어 두어 번 치면서 말했다.
“압니다. 형님이 저를 진심으로 잘 대해 주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이황자가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황자의 해맑은 모습을 본 진안 군왕은 웃음을 터트리고 손으로 이황자의 통통한 볼을 꼬집으며 다시 한번 타일렀다.
“그럼 어서 가세요.”
이황자를 보낸 뒤, 진안 군왕은 내시들에게 지도를 거두라 명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전하, 약을 드실 시간이옵니다.”
내시 하나가 탕약 한 그릇을 들고 왔다.
“벌써 약 먹을 시기가 됐나?”
진안 군왕이 물었다.
“예, 벌써 늦가을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군.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잊고 있을 뻔했어. 어쩐지 요즘 통증이 다시 도진다 싶었는데.”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이 약, 몇 년을 더 먹어야 한다고?”
진안 군왕은 탕약을 받아와 단숨에 들이켜고는 물었다. 내시가 옆에서 손가락으로 숫자를 꼽아보고 대답했다.
“약을 드신 지 오 년째이니, 앞으로 삼 년만 더 드시면 됩니다.”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렸다.
“벌써 오 년이구나.”
그는 감탄하듯이 말하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의 회상 속 과거는 썩 즐거운 시기는 아니었다.
“시간이 빠르긴 하네. 역시 뭐든 지나가긴 하는구나.”
진안 군왕이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예, 전하. 모든 고난은 다 지나갑니다.”
내시가 울컥한 듯 이를 깨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은 음, 대꾸하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가만히 펼쳤다. 반쯤 채워 둔 서신이었다.
내시는 목례를 하고 몸을 일으켜 안에서 물러났다. 그러면서 밖으로 나가기 직전 고개를 돌려 단정한 자세로 편전에 앉아있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벌써 오 년이 지났구나.
내시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고씨 가문의 연회에서 돌아왔던 날, 저 아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을 듯이 구토하던 모습을.
이 태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 소년은 이미 백골 시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 겨우 목숨을 구해내긴 했지만, 몸 안에 남은 독을 깨끗이 비워낼 방법이 없어 매년 늦가을이면 약을 먹여야 했다.
그때부터였지, 아마. 어떤 일들은 태감이나 궁녀들이 단순히 겁을 주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로 사람이 죽을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을 저 어린아이가 깨닫게 된 게. 자기 자신이 후궁들에겐 복덩어리인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눈엣가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게.
“그리고 우리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에 우리를 좋아했던 사람들입니다.”
진안 군왕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붓을 들어 글을 써 내려갔다.
“그러니 이 모든 것 또한 지나갈 겁니다. 고난도, 기쁨도 전부 다요. 이런 게 인생무상이겠지요.”
그럼 어느 날에는, 지금 이 순간 또한 지나간다?
진안 군왕은 다시금 멈칫하며 붓을 멈추었다.
지금의 그리움과 기쁨, 익숙한 듯 낯선 친구도······.
붓을 쥔 진안 군왕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일지도. 부왕, 어머니, 형제자매. 폐하, 마마들. 황자······.
진안 군왕은 눈앞의 종이를 마구잡이로 구겨 집어던졌다. 그래도 속이 시원하지 않은지 다시 종이를 주워 좌우를 살피고는 향로 뚜껑을 열어 그 안에 종이를 버렸다.
불씨가 붙어 있던 향로에서 금세 연기가 피어올랐다.
매운 연기에 진안 군왕은 기침을 몇 번 하고는 향로 뚜껑을 다시 닫았다. 연기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본 그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돌려 책상을 바라보더니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서신은 결국 쓰지 못했네.”
진안 군왕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몸을 일으켜 책상 앞으로 돌아갔다.
“떠날 때 작별인사도 못 했는데, 서신 한 통도 보내지 않는다면 정말로 친구답지 못하겠지.”
—
작가의 말:
일명 ‘낙타 낚시’라 불리는 곤충 낚시는 당나라 때 어린아이들이 자주 하던 전통 놀이 중 하나입니다. 낙타 낚시라고 불리는 이유는 풀로 낚는 곤충이 낙타처럼 등에 봉오리가 있는 갑각류 유충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