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13
교랑의경 413화
태후와 황제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군왕이 황후를 챙기고 있을 줄 알았소.”
태후가 말했다. 황제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지만, 군왕을 기특하게 여기는 마음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눈빛이었다.
그게 뭐? 그놈의 군왕 나부랭이가 지금은 효도한답시고 궁에 남아 있지만, 앞으로도 평생 여기서 효도나 하면서 살 줄 알아?
태후나 부황, 황후께서는 그놈의 효도, 효도. 참 좋아하신단 말이지. 그런데 나는 그놈 효도 같은 거 필요 없어.
대황자가 금잔을 쥐고 느긋하게 보양탕을 들이켰다.
금잔에 담겨 있던 보양탕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진안 군왕이 금잔을 내려놓으며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마마, 일찍 쉬십시오.”
진안 군왕이 예를 올리며 물러났다.
황후는 침상에 기대어 진안 군왕이 물러나는 것을 쳐다보았다.
“그래. 너도 인제 그만 쉬거라.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의미심장한 황후의 말에 진안 군왕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럴 필요까지 뭐 있어. 그 아이한테 평생을 묶여 살 작정인 게야? 그만 가거라. 너도 밖에 나가 너의 삶을 살아야지. 그만하면 꽤 오래 곁을 지킨 것 아니더냐.”
진안 군왕은 여전히 말없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나간다면, 폐하와 태후마마께서 너를 보호해 주실 것이다. 한가하게 왕야의 삶을 살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어. 하지만 네가 황궁에 남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너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적이 늘어날 거야. 그때 폐하와 태후마마마저 궁에 안 계신다면, 너는 아주 힘들어질 게다. 그 와중에 경왕을 어찌 챙기겠느냐? 네가 진심으로 경왕을 위한다면, 눈앞의 사사로운 감정에 연연하지 않고 네가 가야 할 길에 대해 서둘러 생각해 봐야 한다.”
황후가 이렇게 말을 길게 한 것은 2년 만에 처음이었다.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추고 황후를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그러니 부디 마마께서 강녕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희를 더 오래 돌봐 주시지요.”
진안 군왕이 말을 끝내자, 황후는 그저 고개를 저으면서 눈을 감았다. 궁녀들이 휘장을 내려놓자 진안 군왕의 시야에서 황후가 가려졌다.
경왕의 궁에는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더욱 걸음을 재촉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이 환한 전각 안에서는 내시 몇 명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어린아이와 놀아 주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굴러갈 것처럼 둥글둥글한 아이가 딸랑딸랑 흔들며 노는 흔들이북을 손에 쥐고 뛰어다녔다. 아이는 너무 즐거운 나머지 눈이 살에 파묻혀서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게 웃었다. 아이의 입가에서부터 흘러내린 침이 목에 둘린 턱받이를 흥건하게 적셨다.
뚱뚱한 몸과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때문에, 경왕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 싶으면 바닥에 넘어져 소리를 질러댔다.
다행히도 바닥에는 아주 두껍게 깔린 깔개가 있었고, 주위에 있던 탁자와 의자 역시 모두 구석으로 치워 둔 후였다. 전각 안에 있는 모든 기둥에도 솜이불을 둘러 두어, 경왕이 넘어진다고 해도 뼈마디를 다치거나 상처를 입을 염려는 없었다. 그래서 내시들은 넘어진 경왕을 보고도 크게 긴장하지 않았다.
“육가아, 왜 그래?”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경왕에게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바닥에 드러누운 경왕은 괴성을 지르면서 손에 있던 흔들이북을 힘껏 휘둘렀다. 경왕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진안 군왕은 경왕이 휘두른 흔들이북에 손과 어깨를 수차례 맞았다.
내시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급히 경왕을 제지하려고 했지만, 진안 군왕은 그들에게 물러서라고 손짓했다. 진안 군왕은 경왕이 때리는 대로 맞으며 웃는 얼굴로 그를 어르고 달랬다.
전각 밖에 서 있던 군왕의 내시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경왕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군왕께서 저러시는 것도 어차피 다 헛수고일 텐데. 저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실는지.
한참 난리를 피우던 경왕은 지친 건지 흔들이북을 한쪽에 내던지고 그대로 드러누워 잠을 자려 했다. 진안 군왕이 그런 경왕을 서둘러 일으켜 씻으러 가자고 팔을 끌었다.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경왕이 침상에 누워 새근새근 잠들었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진안 군왕은 그제야 말을 멈추고, 손에 쥐고 있던 깃발과 장난감들을 내려놓았다.
“전하, 시간이 늦었사옵니다. 전하께서도 그만 쉬시지요.”
옆에 서 있던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진안 군왕은 미동도 없이 자리에 앉아 단잠에 빠진 경왕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살이 너무 쪄도 건강에 좋지 않다던데. 어떻게 해야 살을 뺄 수 있지? 나중에 이 태의한테 물어보거라.”
진안 군왕이 경왕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전하, 어쩌면 이 태의께 물어보지 않으셔도······.”
내시가 말끝을 흐리자 진안 군왕이 의아한 얼굴로 내시를 쳐다보았다.
“좀 전에 온 사람의 말로는, 정 낭자께서 경성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내시의 말에 진안 군왕이 벌떡 일어나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정 낭자가 돌아왔다고? 언제?”
갑작스럽게 커진 진안 군왕의 목소리 때문에 경왕이 잠꼬대를 하며 몸을 뒤척였다. 아차 싶었던 진안 군왕은 재빨리 경왕을 조심스럽게 다독이고는 다시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휘장을 내렸다.
“오늘 당도했다고 들었습니다.”
내시가 이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이 아, 하고는 두 손을 모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다가도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진안 군왕은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마음이 미친 듯이 벅차올랐다. 심장이 들끓는 것 같은 그 감정을, 진안 군왕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전각 안에 잠시 적막감이 흘렀다.
“전하께서도 그만 씻고 쉬시지요.”
내시가 말했다. 진안 군왕이 응, 하고 대꾸한 뒤 걸음을 옮겼다.
궁녀들이 뜨거운 물을 진안 군왕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끼얹었다. 뜨거운 물이 진안 군왕의 넓고 단단한 어깨를 지나 목욕통 안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안 군왕이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가만히 있자, 궁녀들은 더욱 조심스럽게 물을 끼얹었다.
그 여인이 돌아왔어. 다시 돌아왔다고!
갑자기 진안 군왕이 물결이 출렁이는 소리를 내며 목욕통 안에서 벌떡 일어났다. 발가벗은 채로 서 있는 소년의 건장한 신체가 드러나자, 물을 끼얹던 궁녀들은 깜짝 놀랐다. 궁녀들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히면서 뒤로 물러났다.
황궁에는 지켜야 할 규율이 많다. 특히나 진안 군왕의 처소에서는 더욱 지켜야 할 규율이 많았기에 궁녀들은 진안 군왕을 가까이서 시중들 기회가 별로 없었다.
서늘한 바람에 정신을 차린 진안 군왕은 다시 천천히 목욕통 안에 몸을 담갔다. 궁녀들이 조심스럽게 진안 군왕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진안 군왕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 않고, 목욕통 밖으로 나와 수건을 대충 몸에 두른 뒤 맨발로 문을 나섰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진십삼의 방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십삼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게냐?”
진 부인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책을 읽으셨습니다.”
시녀들이 서둘러 대답했다. 진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진십삼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그럼 진짜 이상한데. 노야께서 잘못 보신 게 아닌가 봐.”
진십삼이 밤새 책을 읽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봐라, 어제 십삼과 함께 나간 사환이 누구냐?”
진십삼은 문 앞에서 들려오는 진 부인과 시녀들의 대화를 듣고 사람들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었다. 문 앞에서 더 이상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진십삼은 침상에서 몸을 바르게 눕고 한쪽 다리를 무릎 위에 올린 채 발끝을 까딱거리면서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는 베개 대신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베고 한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래도 일어나기가 싫네. 오늘은 뭘 해야 좋을까?
학당에 빠지면 안 될 텐데. 아니지, 안 될 건 또 뭐야? 어차피 배우면 다 알게 될 것들인데.
벗들을 보러 가야 하나? 아니야. 가 봤자 시시한 잡담이나 나누고, 정사에 대한 논쟁이나 하다 말겠지.
칠현금을 켜고, 활을 쏘기에는 날이 더워 몸을 움직이기가 싫고.
진십삼은 손에 쥔 부채를 두어 번 흔들다가 벽을 향해 몸을 돌리고 부채로 얼굴을 덮었다.
됐다. 그냥 잠이나 자자.
조용했던 문 앞에서 다시 발걸음 소리가 났다.
못 자겠구나. 어머니께서 사환한테 물어보면 다 알게 되실 테니, 오늘 편히 쉬긴 글렀어.
진십삼의 예상대로 문을 두드리는 똑똑 소리가 들려왔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진십삼은 아예 못 들은 척을 하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있어야겠군.
진십삼의 머릿속에 이 생각이 스치던 찰나, 누군가가 발길질로 문을 확 열어젖혔다.
아니, 어머니께서 이렇게까지 흥분하실 일인가?
화들짝 놀란 진십삼은 퍼뜩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쳐다보았다. 문 쪽을 쳐다보던 진십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군가가 빛을 등지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밝은 햇빛을 뒤로한 탓에, 상대의 얼굴보다 탄탄하고 다부진 몸의 윤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이, 태양이 중천에 떴는데 아직도 잠을 자? 이게 바로 자네가 말한, 장원이 될 사람의 행실인가?”
주육낭이 팔짱을 낀 채 턱으로 침상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헝클어진 머리에 청색 비단 내의를 입고 있던 진십삼을 못마땅한 듯 흘겨보았다.
능청을 떨면서 반박을 해야 할 진십삼이 평소와는 다르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주육낭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와 진십삼을 좀 더 가까이에서 쳐다보았다.
“어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멍청이가 된 거야?”
주육낭이 손으로 진십삼의 이마를 짚으면서 뒤로 밀쳤다.
“바보가 된 거냐고? 이 바보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진십삼이 주육낭의 손을 탁 하고 쳐냈다.
“꺼져.”
진십삼이 언짢은 티를 내면서 말했다.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이면 보지 말라 했거늘, 남의 침실에 그렇게 함부로 쳐들어오는 건 어디 도리인가? 전장에 다녀오더니, 더욱 야만인이 돼서 왔군.”
주육낭이 진십삼의 머리를 다시 뒤로 밀었다.
“예의에 안 맞기는. 네놈 헐벗은 몸뚱이도 다 봤던 사이인데. 고작 이런 거로 예민하게 굴기는.”
주육낭이 혀를 차면서 진십삼을 쳐다보고는, 다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얇은 마로 짠 남색 옷에 청색 신발, 구겨지지 않게 단정히 묶인 하얀색 허리띠까지, 주육낭은 자신의 멀끔한 모습에 몹시 뿌듯해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주육낭이 자신을 가리키면서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서 날 좀 보라고. 그리고 다시 자네 꼴을 한번 봐봐. 내 살다 살다 자네의 이런 누추한 꼴을 보는 날이 있을 줄이야. 남자는 자라면서 열여덟 번 변한다지만, 자네는 변하면 변할수록 더 못난 놈이 되는 것 같네.”
주육낭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자, 진십삼이 갑자기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진십삼의 주먹에 맞은 주육낭은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이야, 샌님인 줄만 알았더니, 제법 힘이 있네?”
주육낭이 너스레를 떨면서 웃음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진십삼은 또다시 손을 올리고 주먹을 날렸다.
“계속 때리면 나도 반격한다?”
“어어? 지금 내가 주먹을 휘두르면 분명 피를 본다니까?”
“자네, 어디 다쳐도 그때 가서 날 탓하지 마!”
“그래도 때리네? 진짜로? 나 진짜로 반격한다?”
방 안에서 다급한 주육낭의 목소리가 들려오다가, 이내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났다. 회랑 아래 서 있던 시녀들이 진십삼의 방 안을 힐끔 쳐다보고는 웃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두 소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주육낭은 마지막으로 진십삼을 향해 발길질을 한 번 더 날렸다.
“잘하는 짓이다. 좀 비웃었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아주 정신이 나갔군!”
주육낭이 소리쳤다. 진십삼은 말없이 주육낭을 발로 차서 반격했다. 두 사람은 바닥에 누워 또 한바탕 서로를 향해 발길질했다.
끝내 주육낭이 먼저 소리쳤다.
“아, 좀! 그만 좀 해! 전장에서 다쳤던 몸이라고!”
진십삼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발길질을 날렸다.
“아주 대단하십니다. 나한테 서신으로 다쳤다고 우는 소리 늘어놓을 시간은 있고, 경성으로 돌아온다고 미리 알려 줄 시간은 없었어? 그런 간사한 농간을 어디서 배워 온 거야?”
진십삼이 화를 내자 주육낭이 호탕하게 웃었다.
“왜? 놀랐냐?”
주육낭이 너무 얄미웠던 나머지, 진십삼은 주육낭의 얼굴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방 안에 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얼굴! 이 빌어먹을 절름발이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