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28
교랑의경 428화
진안 군왕이 걸음을 내디디는 모습을 본 대황자가 얼른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대황자가 한발 앞서가려고 하자, 진안 군왕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멈추고 먼저 가도록 양보했다.
대황자와 진안 군왕이 앞장을 서자 진소도 걸음을 옮겼고, 나머지 관료들도 관직의 고하에 따라 순서대로 그 뒤를 따랐다.
아주 긴 족자에 경성의 서문에서부터 시작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묘사하는 정경이 썩 훌륭한 건 아니었고 붓놀림도 평범했다. 하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한 생동감만은 가히 일품이었다.
처음엔 침묵을 지키며 그림만 쳐다보던 관료들이 걸음을 옮기며 나지막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날의 일을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관료들도 소문을 들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게 그림이 눈 앞에 펼쳐지자, 그 속에 들어가 있는 듯 생생한 느낌이 들었다.
노사안은 과연 노첩의 후손이었다. 묘사가 어찌나 세세한지 말 머리에 달린 흰 꽃 하나까지도 대충 그리는 법이 없었다.
관을 들고 있는 사람, 하얀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사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품속에 안겨 있는 아이의 표정까지도 움직임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었다.
아기는 흰 깃발을 잡으려고 손을 뻗기도 하고, 눈을 비비기도 하고, 손가락을 빨기도 하며 순진무구한 모습이었다.
거리로 나온 남녀노소의 표정도 하나하나 달랐다. 놀라는 사람, 무슨 일인지 묻는 사람은 물론이고 만취했으면서도 술을 보며 달려드는 사람까지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서 튀어나올 듯 생생했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본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대황자는 느긋하게 그림을 보는 진안 군왕을 힐끔 보고는 따라서 걸음을 늦추었다. 진안 군왕은 행여 하나라도 놓칠세라 미간을 찌푸리며 구석구석 꼼꼼히 살폈다.
대황자는 그림 보는 게 따분했다. 꼭 지도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선으로 이은 그림을 보는 건 늘 따분하고 지루했다.
하지만 대황자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고개를 들고 도도한 시선으로 진지하게 그림을 쳐다봤다.
찾았다!
진안 군왕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그림의 한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지러이 모여 있는 인파 속에서 낭자 하나가 손을 뻗어 말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멱리를 쓰고 있는데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노사안의 그림은 확실히 그 조부만큼 정교하지는 못했다. 그 여인의 기품은 멱리로도 가릴 수 없는 것인데, 노사안의 붓 아래에서는 평범하기만 했다.
여기는 좀 더 높이 그리고, 옷소매는 좀 더 품이 넓어야 하는데. 아무리 멱리를 썼어도 그렇지 그냥 검게 칠하기만 하면 쓰나. 어렴풋이 얼굴이 보이게 해야지.
“전하.”
옆에 있던 누군가가 나지막이 군왕을 부르며 주의를 주었다. 진안 군왕이 몸을 똑바로 펴고, 진소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뜻을 전한 후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뭘 저리 넋을 놓고 본 거지?
진소도 고개를 빼고 들여다봤지만, 딱히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길고 긴 그림은 동문까지 계속됐고, 이어서 묘지 앞의 떠들썩한 광경과 하늘이 터지는 불꽃이 보였다.
“그림이 어떻소?”
옥좌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그림은 그냥 그런데, 그림이 너무 가증스럽군.
고능준은 이를 갈았다. 그림이나 가무는 언제나 글로 묘사한 것보다 더 직관적이고 훨씬 충격적이었다.
이 일을 그저 상소문 한 장으로 묘사했다면 읽는 사람에 따라 느끼는 감정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 황제가 훨씬 차갑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해 내면 훨씬 직관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례 행렬과 빼곡하게 둘러서서 구경하는 인파까지, 경성에서 일어난 떠들썩한 사건이 종이 위에 생생하게 펼쳐져 있었다. 한 해에 한두 번 정도 출궁하고, 그나마도 몇 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있는 어화원에 가는 게 전부인 황제에게 이 그림이 가져다줄 충격은 실로 어마어마하리라.
황제는 그림 속에 펼쳐진 그날의 광경을 따라 걸으며, 그 기분을 함께 만끽한 듯했다.
“백성이 울분을 토하며, 구경하는 열 중 아홉은 슬퍼했습니다. 서쪽에서 동쪽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렬이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지전은 눈처럼 휘날리고 흰 깃발은 숲을 이루었으며, 온 경성이 무원산을 떠들어댔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 일에 대해 은밀히 조사하던 중, 강문원 일파에게 폐하를 기만한다는 공격을 받아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경성을 떠나다가,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와 하늘에 영령의 안녕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죄인의 몸이라고는 하나 폐하께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억울하게 원성만 들으시는 모습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분에 맞지 않는 언사임을 알면서도 강문원이 폐하를 기만한 죄를 낱낱이 고하고자 합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신의 목을 베어 선덕문 밖에 거신다 하여도 기꺼이······.”
대전에 있던 내시가 노사안이 올린 상소를 목청 높여 낭독했다. 그림을 다 보고 난 관료들은 또다시 침묵에 빠졌다.
“대답해 보시오. 노사안의 그림이 어떻소?”
황제가 다시 물었다.
대황자는 자신이 앞으로 나가 한두 마디 하고 싶었지만,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림의 좋고 나쁜 점을 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어쨌든 황제가 질문을 던지는 의도는 거기 있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를 말하는 건 더욱 적절치 않아 보였다.
그저께 수업에서 스승님은 말을 삼가라고 하셨지. 확신이 없는 일이라면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말라고 하셨어.
그런 생각을 하며 주저하는 사이, 진안 군왕이 앞으로 나와 있었다.
“폐하, 노사안의 그림은 그저 그렇습니다.”
진안 군왕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진안 군왕에게로 모아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들 놀라는 표정을 감출 수 없는 듯했다.
황족은 조회에 참석하더라도 대부분의 경우 장식에 불과했다. 장차 태자로 책봉될 몸으로 실력을 키우기 위해 논쟁에 참여하는 대황자의 경우와는 확연히 달랐고, 이 점은 진안 군왕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사적인 자리에서는 황제와 무언가를 논하더라도, 조당의 관료 앞에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한 일은 전혀 없었다.
오늘이 처음이었다.
황제가 진안 군왕을 바라봤다. 기쁨이나 분노가 드러나지 않는 표정이었다.
“폐하, 신이 폐하께 그려 올린 ‘삼산오악 유람도’를 기억하십니까?”
진안 군왕이 편안한 표정으로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했다.
무, 무슨 그림이라고?
자리에 있는 관료들은 다들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지만, 황제의 낯빛은 미묘하게 변했다.
“신이 그림은 잘 모릅니다만, 그래도 노사안의 그림이 평범하다는 건 알겠습니다. 신의 그림과 비교해도 썩 나은 건 아니죠.”
진안 군왕의 시선은 내시들이 펼쳐 들고 있는 그림으로 향했다.
“하지만 신에게는 노사안이 마음을 썼다는 게 보입니다. 신이 폐하께 바친 그림을 볼 때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거든요. 눈으로 보고 붓으로 옮긴 그 마음이 똑같습니다.”
마음을 썼다!
그건 평가였다. 이 그림에 대한 평가이자 이 일에 대한 평가였고, 이는 황제가 듣고 싶어 하는 평가이기도 했다.
그 말 한마디에, 그림 뒤에 숨어 있던 일들이 그림을 찢고 나와 모두의 앞에 펼쳐졌다.
방위(方瑋)!
말을 참 거침없이도 하는구나! 어딜 감히 쓸데없이 나서는 게야!
고능준은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눈빛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속으로 포효했다.
그 말에 놀란 건 아니었다. 그 말을 한 사람 때문에 놀란 것이었다.
어차피 누군가의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올 말이었지만,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진소 일파의 사람이어야 했다.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는 군왕이 아니라.
진소가 했다면 어땠을까. 도리상 진소 일파의 사람이 말했어야 했다. 노사안은 진소가 천거한 인사이므로 황제의 눈에 그는 진소의 사람이었다.
진소가 입을 다물고 있다면, 이는 속으로 찔리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진소가 앞으로 나서며 노사안이 옳았다고 한다면, 이는 가까운 이의 허물을 덮어 주는 꼴이 될 터였다.
아무튼 진소가 말을 하든 하지 않든, 결과는 똑같았다. 황제의 의심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 의심은 이 일을 진소가 뒤에서 조종했을 거라는 의심이었다.
그런데 지금 난데없이 진안 군왕이 입을 열고 나선 것이다. 게다가 예전의 무슨 그림 얘기까지 꺼내며 황제의 생각을 끌어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폐하, 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진소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거 보라고. 신’도’ 그리 생각한다는 게 됐잖아. 신’은’ 그리 생각하는 게 아니라! 겨우 한 글자 차이지만, 이는 황제의 마음속에서 의심이 사라지게 하기 충분했다.
“폐하, 노사안이 마음을 쓴 건 사실이나 그 의도가 심히 불순합니다!”
고능준도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지금 급선무는 논쟁이 아니라 사건의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고 대인의 감상은 참으로 이상하외다. 어디서 그 의도가 불순하게 보인단 말씀입니까?”
“노사안은 강문원의 무리가 공을 가로채고자 폐하를 기만했다 주장하는데, 신이 보기에는 도리어 노사안이 백성을 선동해 폐하를 협박하는······.”
“백성을 선동해요? 온 백성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고 대인께서는 노사안을 너무 과대평가하십니다.”
조용했던 대전이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광풍이 휘몰아치고 세찬 비가 내리는 듯 반박과 힐난이 끊이지 않았다.
대황자는 다소 멍한 채로 서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제대로 파악조차 못한 상황에 침묵을 지키며 바짝 엎드려 귀먹고 눈먼 듯 고분고분 움직이던 조정 관료들이 한마디도 지지 않을 기세로 싸우고 있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일 태세였다.
이게 뭐야. 대체 뭐 때문에 저리 떠들고 싸우는지 모르겠네. 따분하기만 하고.
대황자는 대전에 잠자코 서 있었다. 어릴 적 부황을 대신해 조회에 참석했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었다. 그때는 그나마 앉아 있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서 있어야 하니까.
이 인간들이 대체 언제까지 떠들 작정인지 모르겠네.
불꽃이 펑펑 터지도록 도화선에 불을 붙인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꾹 참고, 예의 가벼운 표정으로 돌아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림에 시선을 두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관료들의 소리는 어느새 배경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그림이 마음에 드네요.”
진안 군왕이 대황자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대황자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진안 군왕은 그런 대황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보며 말을 이었다.
“보십시오. 얼마나 잘 그렸습니까. 진짜처럼 생생하기도 하고요. 전엔 황궁 밖에 나가면 동문과 서문을 자주 갔습니다. 여기 이 다리도 알아보겠네요. 다리 어귀에 사자 석상이 세 개 있었는데······.”
대황자는 아예 걸음을 옮겨 진안 군왕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진안 군왕의 시선이 그림 끝자락의 불꽃에 머물렀다.
성 밖에서 본 그날의 불꽃놀이는 이렇게 찬란했구나.
그 불꽃은 진안 군왕도 봤지만, 별처럼 작은 불꽃 몇 개에 불과했다. 그날 불꽃이 터질 때, 진안 군왕은 높은 곳에 위치한 황궁의 버려진 뜰에 육가아와 함께 앉아 있었다.
갑자기 시작된 불꽃놀이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날 경성 거리는 저토록 시끌벅적했다니.
진안 군왕의 눈길은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몇 번이고 돌고 또 돌았다.
정말 화나고 또 화나고, 슬프고 또 슬프겠구나. 본디 가진 것도 별로 없는데, 이젠 그것마저 잃고 말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