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48
교랑의경 448화
“임관보에서 백 명 남짓한 병력으로 성보를 지키며 죽을힘을 다해 싸운 용사들의 충의를 높이 사는 바이니 그 가족들에게······.”
옥대교 저택 안, 조정에서 보낸 관리가 조서를 높이 들고 문장의 고저 기복을 맞추며 공로 치하하는 조서의 내용을 읽었다.
“범석두, 서무수, 서납월, 범삼축, 서봉추를 정명 장군에 추서하고, 범강림을 전시 직에 봉하며, 서봉추의 아들을 삼반차직(三班借職: 하급 무관 관직)에 위임한다.”
옥대교 저택 앞에 모여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저쪽에서 여인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저런 어린애가 무장이 되다니. 가장 하급의 무관이라고는 하나, 목숨을 바치고 정명 장군에 오른 제 아버지에 비하면, 관직을 참 쉽게도 얻는군.
폐하께서 너그럽고 통 큰 결정을 내리셨네.
“인자한 황제 폐하께서는 공을 세우면 포상을 내리는 것을, 억울한 게 있으면 조사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분이셔. 이번에는 대신들 때문에 폐하의 성총이 가려진 거래.”
조서를 읽던 관리는 백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놓으면서도 딱히 감격하지는 않았다.
지금 폐하께서는 서북 일로 골머리를 앓고 계시니 이런 일에 크게 신경 쓰실 겨를이 없어. 이번 일에 한 치의 실수라도 있었다간, 황제가 무당의 협박에 굴복한 일로 만천하의 웃음거리가 될뿐더러 조정 대신들도 반기를 들고 일어나겠지.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는 열성조(列聖朝) 앞으로 달려가 통곡하며 사죄드려야 할지도 몰라.
관리가 손에 쥔 조서를 범강림에게 건넸다. 엎드려 감사 인사를 올리던 범강림이 일어나 조서를 받들자, 관리는 두어 마디 말을 건넨 후 수하들을 이끌고 옥대교 저택을 떠났다.
관리들이 떠나자, 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시녀가 서둘러 사환을 시켜 동전이 가득 담긴 광주리 두 개를 들고 오게 했다.
“다들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전한 시녀가 사환에게 돈을 뿌리라고 명했다. 옥대교 문 앞이 갑자기 왁자지껄해졌다.
같은 시각, 소식을 들은 태평거, 신선거, 이춘당도 문을 활짝 열고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 주기 시작했다. 저잣거리가 또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옥대교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은 바깥의 소란과는 상관없이 대청 안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범강림은 붉어진 눈시울로 자신의 앞에 놓인 조서와 임명장을 몇 번이고 훑어보았다. 범강림의 아내도 그 옆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을 훔쳤다.
“누이, 무덤 앞에 가져가서 아우들을 기쁘게 해주는 건 어때?”
범강림이 임명장과 조서를 품에 안고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급할 거 없어요. 아직, 부족해요.”
아직 부족하다고?
범강림이 멈칫하면서 의아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오라버니, 하고 싶은 게 뭔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범강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다행히 거동에 불편함은 없지만, 전투에서 다친 이후로 범강림은 더 이상 예전처럼 삼석궁을 당기거나 화살을 연달아 열 발 이상 쏘아낼 수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전장에서 칼을 휘두르며 적군의 갑옷을 뚫을 힘도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가까운 거리에서 쇠뇌로 적을 쏘아 죽이는 정도였다.
범강림은 여태껏 형제들의 명예를 위한 투쟁만을 생각했지,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드디어 원하던 바를 이룬 지 얼마 안 된 않은 지금, 갑작스럽게 하고 싶은 게 없냐고 물어보는 정교랑 때문에 범강림은 풀이 죽었다.
이제는 폐인이 된 내가,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눈물을 훔치던 범강림의 아내가 놀란 얼굴로 조심스럽게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적절치 않아 보이는데.
“나? 나야 뭐, 경성에 남아서 점포나 보면서 살아야지.”
범강림이 너스레를 떨면서 웃었다.
“오라버니는 적군을 죽이고 싶은 마음 없어요?”
적군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내가 어떻게 적군을 죽일 수 있겠어?
범강림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누이는 절대로 남을 대신해 결정을 내리는 법이 없지. 누이는 언제나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누이 앞에서는 내 본심을 숨길 필요 없고, 누이의 의중을 추측할 필요도 없어. 누이가 뭘 물으면, 난 큰 소리로 솔직히 대답하기만 하면 돼.
“있지.”
깊은 한숨을 내뱉던 범강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라버니가 만인적(萬人敵)이 되도록 도와줄게요.”
만인적? 장수를 말하는 건가?
화들짝 놀란 범강림은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범강림은 만인적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서무수가 형제들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은 필부지용(匹夫之勇)일 뿐이고, 아무리 기마와 궁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일인적(一人敵)에 불과하다고 했다. 혼자서 적군을 죽이고 공로를 세운다고 한들, 그 수를 셀 수 있는 정도였다. 만인적이란, 오직 전술이 뛰어난 장수들에게만 쓰이는 호칭이었다.
군사들을 지휘하는 장수를 말하는 건가? 지금의 내가 어떻게 장수가 될 수 있겠어! 글씨도 못 읽는 사람인데!
정교랑이 진지하게 입을 뗐다.
“이 세상에서 만인적이라고 불리는 건, 비단 장수들뿐만이 아니에요. 날 따라와요, 오라버니.”
“끝장이야. 이제 다 끝장이라고.”
주 노야가 대청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회랑 아래 꿇어앉아 있던 시녀들은 전혀 두려운 기색 없이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주 노야가 사나흘째 저 말만 반복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두려워하던 시녀들도 두려움이 점차 무뎌졌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괜히 당신까지 덩달아 상소를 올릴 거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도 꼭 써야겠다면서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 이젠 하느님이 저쪽 편에 섰네요.”
주 부인이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어째서 하느님이 그자를 돕느냔 말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 우리 교교야말로 하느님의 친자식인데.”
주 노야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교교니 뭐니, 그만 좀 해요. 폐하의 뜻에 반하는 일을 저질렀는데도 여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의 자식 같으니까.”
주 부인은 주육낭 걱정에 감정이 북받쳐 울먹거렸다.
“아이고, 가여운 우리 아들. 이를 어쩌면 좋아. 이번 일로 남주로 쫓겨나 난이라도 평정하러 가게 되면, 정말 목숨을 내놓아야 할 텐데.”
주 부인이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문 앞에 있던 시녀에게 주육낭은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다. 문 앞에 있던 몸종 중 하나가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저, 그게, 육공자께서는 출타하셨어요.”
“어디로!”
눈치를 보는 몸종의 모습에 주 부인이 호통을 쳤다.
“정 아씨 댁에 가셨어요.”
몸종들이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그 애 때문에 죽게 생겼네. 전생에 우리 주씨 가문과 대체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래!”
주 부인의 울음소리가 주 노야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덮고 문밖으로 울려 퍼졌다.
“어딜 갔던 거야?”
같은 시각, 옥대교 저택의 마당에서는 주육낭이 문턱을 넘어서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볼 일 있어요?”
정교랑이 멱리를 벗으며 주육낭의 물음에 대답 대신 반문했다.
“짐 챙겨. 나랑 섬주로 돌아가자.”
주육낭이 말했다. 마당 안에 서 있던 반근과 어린 몸종들, 사환들이 놀란 얼굴로 주육낭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주육낭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일이 생겼다고 도망가요? 군인이 맞긴 해요?”
“예봉(銳鋒)을 피하는 것도 일종의 전술이야. 나약해서 피하는 게 아니라고.”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면서 대꾸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맞아요. 사람이 예봉을 피할 뿐, 예봉이 사람을 피한 적은 없죠.”
주육낭이 다시 반박하려 하자, 정교랑이 가볍게 손을 올려 제지했다.
“활은 잘 쏴요?”
주육낭은 정교랑의 물음에 멈칫하며, 언짢은 듯 흥 소리만 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의 궁술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면······.”
나한테 내 궁술이 믿을 만하냐고 묻는 건 또 무슨 경우야? 이 고약한 여인이 이젠 입만 열면 망신을 주네!
주육낭이 눈을 부라리며 대답하려던 찰나,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나 좀 도와줄 수 있냐니!
순간 주육낭은 온몸에 열이 확 올랐다.
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나더러, 자기를 좀 도와줄 수 있냐고 물은 거야?
드디어 내가 자기 옆에 있는 게 보였구나. 드디어 나도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어, 드디어!
형제들이 없어졌으니, 따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겠지.
주육낭이 고개를 푹 숙였다.
미칠 듯이 기쁘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쓰라려 오는 기분이 참······.
“무슨 도움?”
주육낭이 물었다.
“날 따라와요. 날 도울 담력이 있는지부터 봐야겠어요.”
뭐라고?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들고, 벌써 뒷마당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정교랑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입술을 삐죽이던 주육낭이 목에 힘을 주고 정교랑을 따라갔다.
말에서 내린 진십삼은 예전처럼 곧장 신선거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고개를 들어 신선거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어 주위에 있는 다른 식당들을 둘러보았다.
신선거의 주위에는 온통 식당 건물들로 가득했다. 식사 시간이 가까워진 터라 신선거 좌우에 있던 식당들은 모두 만석이었다. 날씨가 점점 더 추워지다 보니, 낙득자재를 찾는 손님들이 많아져서 뽀얀 김이 서린 식당의 창가는 신선경을 방불케 했다.
진십삼은 다시 신선거로 시선을 돌렸다. 신선거 앞은 늘 그렇듯이 조용했지만, 예전과는 사뭇 다른 조용함이었다.
“정말 이상하네. 손님이 많이 줄었어.”
오 관리인이 장부를 훑어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주인어른의 일은 이미 좋은 쪽으로 결정 난 거 아니었나?”
“태평거는 그럭저럭 괜찮아요.”
시녀가 말했다.
진십삼이 신선거 안으로 들어서자, 오 관리인과 시녀가 서둘러 그를 맞이했다.
“태평거가 별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는 찾아오는 손님이 다르기 때문이지. 태평거는 서민들이 많이 찾는 가게다 보니, 무원산 형제들을 포상한 것으로 이번 일이 끝났다고 생각해서 손님이 끊이지 않는 거야. 하지만 신선거는 태평거와는 다르게 고위 관직자나 권문세가 사람들이 찾는 곳이잖아. 그러니······.”
진십삼이 말끝을 흐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조정 일을 꿰뚫고 있는 고위 관직자와 권문세가의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해결된 모양새인 무원산 형제들의 사건이 실은 여전히 위태위태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직 승패가 갈리지는 않았잖아요.”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도 운이 너희 아씨를 따를지는 잘 모르겠구나.”
진십삼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진십삼도 이번 일에 대해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필 이런 때에 서북에 또다시 전투가 생길 줄은 미처 몰랐다. 한 달만이라도 시간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인간은 역시 하늘의 뜻을 예측할 수 없구나. 모두 때와 운명이니라.
시녀가 깔깔거리고 웃으며 손에 쥔 장부를 탁 덮었다.
“저희 아씨는 한 번도 운에 모든 걸 맡기신 적 없어요.”
진십삼이 시녀를 쳐다보면서 눈썹을 으쓱했다.
“너희 아씨는 요즘에 뭐가 그리 바쁜 거야? 왜 자꾸 집에 없어?”
진십삼의 물음에 시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를 위한 커다란 선물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커다란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진십삼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또 선물이라고? 무원산 형제들이 경성을 떠나서 서북으로 갈 때 했던 선물 같은 건가?
그렇다면 정 낭자가 준비하는 선물이 뭔지, 정말로 기대되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