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5
교랑의경 45화
주육낭이 강주에 갔다가 며칠 만에 돌아오면서 꽃다운 나이의 아리따운 몸종을 데려온 일은 집안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력을 두고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그 몸종은 부모와의 논의 끝에 주육낭의 측근 시녀가 됐다.
측근 시녀 자리로 말할 것 같으면 집안에서도 최소 3년은 갈고닦으며 재주를 익혀야 얻을 수 있는 자리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여자아이가 그토록 공자의 총애를 받으니 화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말로야 주씨 가문 노부인이 생전에 계실 때 사서 정씨 가문 바보에게 증여한 몸종으로, 이제 바보가 집으로 돌아가게 됐으니 자연스레 주씨 가문으로 돌아온 것이라지만 그게 어디 그리 간단한 일이던가. 믿는 사람이 바보지.
반근은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본디 말주변이 뛰어나지도 않았거니와 어릴 때부터 도관에서 자란 탓에 집에서 생활해 온 몸종들과 어울릴 때면 주눅이 들었다. 주육낭의 체면을 봐서 다들 살갑게 대해 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남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웃고 떠드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아씨께서 계셨다면 뭐라고 하셨으려나? 아씨라는 말이 떠오르자 반근은 갑자기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슴속에 놓인 무거운 저울추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듯했다.
아씨는, 잘 계실까? 그리 버려두고 혼자 왔는데 슬퍼하진 않으실까? 어쩌면 이 세상에 반근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으셨을지도 모르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땐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생각도 제대로 안 해 보고 바로…….
“어이, 드디어 왔구나.”
머리 위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반근이 정신을 차리고 올려다보니 2층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소년이 눈썹을 치켜뜨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소년의 태도는 도도하고 거만했다. 마음속에 걸려 있던 저울추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올라가요.”
얼른 대답하고 술집으로 들어간 반근은 점원의 안내에 따라 시끌벅적한 중앙을 지나 2층 별실로 향했다. 막 층계를 오르려는데 맞은편에서 여인 몇 명이 걸어왔다. 대체로 오색 비단으로 만든 너울을 쓰고 있었는데 그중 두 여인은 5~6살쯤 되었을 법한 여자아이와 각각 손을 잡고 있었다. 반근이 몸을 비켜서는데 그중 한 여자아이가 어머, 하며 놀라는 소리를 냈다.
“언니? 그 언니네!”
아이의 말에 여인들은 영문을 몰라 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반근의 눈앞에 반갑게 웃는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어머, 어머.”
반근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여자아이는 더욱 반가워하며 작은 손을 들어 보였다.
“비도 부르고 바람도 부르는 아씨의 몸종이잖아!”
반근은 아이의 얼굴을 보고 퍼뜩 깨달았다. 비 오는 날, 낡은 사당, 노인에 의지해 팥 춘권을 게걸스럽게 먹던 여자아이. 다만 지금 아이의 곁엔 노인이 없고, 반근의 곁엔 아씨가 없었다. 순간 반근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너구나.”
반근은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꼬마야, 너도 경성으로 왔니?”
아이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잡고 있는 여인의 손을 마구 흔들었다.
“언니, 이 언니는 나랑 할아버지가 길에서 만난 언니인데 진짜 대단해. 비도 막 내리게 하고 맛있는 것도 만들 줄 알아.”
아이는 아이답게 조잘조잘 떠들었다. 옆에 있던 여인들은 이 아이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길에서 만난 인연을 다시 만나는 일은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기에 반근을 힐끔 보고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여인은 반근에게 살짝 고개를 까닥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고 반근도 얼른 인사했다.
“언니, 이름이 뭐야? 어디 살아? 난 단랑이라고 해, 어디 사냐면…….”
아이는 흥분해서 떠들었지만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여인이 아이를 가볍게 잡아끄는 바람에 말이 끊어지고 말았다. 몸종도 저쪽에서 재촉했다.
“반근 언니, 빨리. 공자님이 기다리시잖아.”
양쪽에서 재촉하는 바람에 반근과 여인들은 다시 예를 표하고 헤어졌다. 아이는 못내 아쉬워하며 걸음을 옮겼다. 길 위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더라도 결국엔 각자의 길을 가야 하는 법이다.
“우리 단랑 아씨도 아는 사람이 계셨네.”
함께 가던 여인들이 아이를 놀리자 아이는 득의양양한 모습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라던 환경을 떠나 경성으로 왔으니 어린아이로서는 외로울 만도 했다. 특히 할아버지까지 병석에 누우셨으니…….
할아버지! 할아버지 생각이 떠오르자 아이는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집에 가자, 얼른. 할아버지한테 가서 말씀드릴래.”
아이는 신이 나서 말했다. 할아버지라는 말에 여인들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아래층으로 내려가 마차에 올랐다. 거리를 가로질러 외진 골목으로 접어든 마차는 평범해 보이는 민가 앞에 멈춰 섰다. 평범해 보이는 집이었으나 마중을 나오는 이가 적지 않았고 기세도 제법 대단해 보였다. 아이는 여종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나 할아버지한테 갈래.”
아이가 소리치며 마당을 향해 뛰어가자 여종은 급히 그 뒤를 따랐다. 아이는 작은 체구로 여인을 가볍게 따돌리고 마당으로 들어서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과 부딪쳤다. 상대방이 잽싸게 붙잡은 덕에 그나마 걸려 넘어지진 않았다. 넘어지진 않았지만 아이는 코를 부여잡으며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용서하십시오. 이 늙은이가 꼬마 아씨를 못 봤네요.”
백발의 노인이 몸을 휘청이며 얼른 아이를 달랬다. 노인의 옆에 선 사내가 엄숙한 표정에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단랑, 무례하구나.”
진씨 가문은 가정교육이 엄격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4살 때부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만 5살인 단랑도 벌써 언행에 관한 예절을 익힌 터라 부친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얼른 노인에게 깍듯히 예를 표했다.
“제가 결례를 범했어요.”
단랑이 잘못을 시인하자 노인은 미소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아버지, 저 할아버지 보러 가고 싶어요.”
단랑이 부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가지 마라. 방금 약을 드셨어. 괜히 가서 깨우면 안 돼.”
전전긍긍하며 걸어오는 여종을 향해 진소가 손짓을 했다.
“아씨를 데려가라.”
여종은 얼른 다가와 아이를 잡아끌며 타이르고는 안아서 데려갔다. 진소가 가볍게 숨을 토하자 노인은 그런 진소의 모습을 눈여겨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손을 내밀었다. 뒤에 있던 시종이 얼른 약상자를 가져왔다. 노인은 그 안에서 자기(磁器)로 된 병을 하나 꺼내 진소에게 건넸다.
“이걸 쓰십시오.”
진소가 반색을 하며 노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이 태의, 이 약을 부친께 쓰면…….”
진소의 떨리는 목소리에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인께서 쓰시라는 겁니다.”
노인은 자기로 된 병을 쥔 진소의 손을 가볍게 토닥여 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진 대인의 근심이 과중하니 건강을 챙기셔야 합니다. 이 약으로 원기를 보충하면 식욕 부진과 불면증이 좀 나을 겁니다.”
말을 마친 노인이 이번에는 진소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대인, 마음을 다잡으셔야 합니다.”
병자를 가족으로 둔 이에게 태의가 건강을 챙기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으라는 말을 하다니 다소 기이하게 들릴 법도 했지만 진소는 눈치가 빨랐다. 부친의 병은 갑작스럽게 넘어지면서 시작됐다. 연로한 나이라 근육이 다치거나 뼈가 부러지진 않았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도 부친은 찰과상만 입었을 뿐이었고 의원들도 푹 쉬면 나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쉬어도 좋아지기는커녕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다. 처음엔 몸을 일으키지 못했고 곧 다리에 감각이 없어지더니 얼마 안 가 대소변도 혼자 처리할 수 없게 되고 급기야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보내는 날이 길어졌다.
정정하던 노인이 병석에 누워 부지불식간에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가 되기까지는 불과 보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빠르고 갑작스럽게 진행된 일이었다.
의원이 수없이 다녀갔지만 병의 원인으로 내놓는 진단조차 전부 말이 달랐다. 나중에는 의원조차 섣불리 청하기 힘들어졌다. 부친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당에서 진소의 부친상에 관한 일이 논의되기 시작해서였다. 벌써 진소의 자리를 대체할 사람을 천거하는 상소가 황제에게 올려갔다는 말까지 돌았다.
이제 겨우 경성으로 돌아왔는데 큰 뜻을 펼치기도 전에 또다시 떠나야 한다니. 이번에 떠나면 또 3년이다. 3년, 3년, 인생에 3년이 몇 번이나 있단 말인가. 진소로서는 마음이 편치 못할 수밖에 없었다.
부친의 병환과 자신의 앞날, 집안의 장래에 관한 근심으로 이 학식 있고 기개 넘치는 문인은 날로 야위어갔다. 이런 모습을 누군가가 본다면 소문은 더욱 빠르게 퍼져 나갈 터였다.
진소는 손에 든 병을 꽉 쥐었다. 이 약은 자신의 정신을 온전하게 지켜 주고 진중한 모습으로 보이게 해 줄 터였다. 일개 태의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다? 진소는 노구를 이끌고 비틀비틀 문을 나서는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누군가로부터 가져다 주라는 부탁을 받았나?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마음을. 진소는 자기로 된 병을 꽉 쥔 채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서 있었다.
시녀가 약을 내오는 틈에 자그마한 형체가 방 안으로 쪼르르 들어갔다. 방 안에는 약 냄새와 퀴퀴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지만 단랑은 개의치 않고 휘장 뒤편부터 확인했다. 노인은 침상 위에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단랑이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다가갔다. 침상 위에는 비단 이불을 두 겹으로 덮은 노인이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입으로 미약하게 후후 내쉬는 숨소리만이 그나마 노인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아직 병환과 죽음을 분간하지 못하는 단랑은 할아버지가 피곤하여 오래 쉬어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단랑은 침상 옆에 꿇어앉아 인형을 높이 들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제가 뭘 샀는지 좀 보세요.”
아이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천천히 잠에서 깬 노인이 고개를 돌리고 흐린 눈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모처럼 의식이 또렷했다. 손녀딸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아, 단랑이구나.”
노인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는 할아버지가 깨자 더욱 기뻐하며 시장에서 보고 들은 것을 재잘재잘 떠들었다.
“할아버지, 얼른 좋아지셔야 해요.”
아이는 할아버지의 손을 흔들며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우리 15일에 등불놀이 구경 가요. 할아버지 목말을 타고 구경할래요. 높이 보여 주세요.”
노인의 흐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좋아지긴 힘들 것 같구나. 단랑, 이 할아비는 너와 등불놀이에 갈 수 없어. 더는 네 곁에 있을 수 없단다.
“아, 참. 할아버지, 저 오늘 그 언니 만났어요.”
단랑은 손에 든 인형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팥 춘권을 줬던 그 언니요.”
노인은 어리둥절했다. 팥 춘권이라.
“할아버지, 기억하시죠? 그, 길에서 만났잖아요. 비 오는 날에, 아씨가 비 올 거라고 하니까 비가 오고, 안 올 거라고 하니까 안 오고. 그 아씨, 그러니까 그 아씨의 몸종이요. 저한테 팥 춘권을 줬잖아요. 엄청 맛있는 거.”
아이의 말이라 내용이 뒤죽박죽이었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다 보니 논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지러운 말이었지만 노인의 귀에는 더없이 또렷하고 분명하게 들렸다. 그 낭자라면……. 그 낭자!
어르신, 병을 빨리 치료하셔야 해요.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노인은 벌떡 일어났다. 물론 힘이 없다 보니 팔을 휘저으며 어어, 하는 소리를 내뱉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그 낭자!”
노인이 쉰 목소리로 외쳤다. 깜짝 놀란 아이는 버둥거리는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고 문밖에 있던 이들이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왔다. 곧 진소도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로 두 눈을 부릅뜬 부친의 모습을 보자 진소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안 되는데, 이렇게 빨리…….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버지.”
진소가 잽싸게 달려가 부친의 손을 붙잡자 부친 역시 아들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 손에는 전에 없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삼낭, 그 낭자를…….”
노인은 아들을 보며 힘을 주어 소리쳤다.
“살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