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57
교랑의경 457화
이번에 정교랑이 황제를 알현하게 된 곳은 외궁인 근정전이 아니라 내궁이었다. 어린 나이라 하더라도, 외간 여인을 만나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던 황제는 정교랑과 대면하는 곳을 태후궁으로 골랐다. 태후가 서예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게 대외적인 이유였다.
사실 태후는 신의 낭자에 관한 소문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면 고쳐 주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는 이상 이를 대외적 이유로 대기는 적절치 않았다. 불길하기도 하거니와 그리 대담한 여인이라면 어명을 거역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저렇게나 어린 낭자였다니.”
바닥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큰절을 올리고 있던 정교랑을 보고 태후가 놀란 눈으로 말했다.
저렇게 어린 낭자였어?
아마 정교랑을 본 모든 사람에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일 것이다.
저렇게 어린 낭자가, 저토록 어린 낭자가, 온 경성을 떠들썩하게 뒤집어 놓고, 천자까지 쥐락펴락했다니.
“올해로 열일곱입니다.”
황제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이제 겨우 열일곱이라고? 위낭보다 아직 두 살 어리구려.”
태후가 미소를 보이며 말하자, 황제가 그렇다고 했다. 팽팽한 기 싸움이 펼쳐졌던 조당 분위기와는 달리 태후궁의 분위기는 몹시 화기애애했다.
“고개를 들어 보거라. 얼굴을 좀 보여 다오.”
태후의 말을 들은 정교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허리를 곧추세우고 고개를 들었다.
미인이라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봤던 태후였지만, 정교랑의 얼굴을 보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참 곱게도 생겼구나. 단정하고 우아한 게, 참 고와. 강주 사람이라고 했느냐?”
“강주 정씨입니다.”
황제가 대신 대답했다.
“아, 땅을 파서 강을 길어 우공이산의 힘을 보여 주었던 그 정씨 말이오?”
태후의 물음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복이 타고났다고 했소. 그러니 도가의 선인께서 저 아이를 돌봐주시는 게지.”
태후가 웃으면서 말했다. 일국의 황제로서, 그는 차마 도가를 운운하는 태후의 말에 맞장구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네 선인 사부는 세상을 떠났다지?”
드디어 정교랑에게 직접 물을 수 있게 된 태후가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향해 물었다.
정교랑이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녀는 태생부터 바보였던 탓에 정신이 깨어난 뒤의 일을 기억할 뿐, 유년 시절의 기억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옵니다.”
진소가 병주로 사람을 보내 정교랑의 스승을 찾았던 일은 황제도 알았다. 황제 역시 사람을 보내 소상히 알아보았지만, 진소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황제가 알아낸 정보는 진소의 것보다 훨씬 더 상세했다.
“곡원산 사람으로, 서생 출신이지만 이룬 것 없이 죽었다더구나.”
황제가 말했다.
태후와 정교랑은 황제의 말을 집중해서 들었다. 심지어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황제의 용안을 빤히 쳐다보는 결례까지 범했다. 정교랑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황제는 초조함과 호기심, 은근한 흥분이 담긴 정교랑의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 보군. 고의로 짐을 속인 것이 아니야.
“그자의 성은 송(宋)이고, 이름은 금(今)이니라.”
황제가 자신의 스승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이름을 말했지만, 정교랑은 고민 끝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 뜻이냐?”
황제가 서둘러 물었다.
“기억에 없습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과거시험에서 몇 번 낙방한 뒤로, 어느 날 갑자기 미치광이가 됐다더군. 도복을 입은 채 도가의 고사를 읊고 다니다가 행방불명된 자라고 들었다.”
황제가 설명을 덧붙였다.
“역시 도가와 관련이 있었던 게로군. 무언가 깨달음을 얻고 아무런 구속 없이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던 모양이오.”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태생이 바보인 저 여인의 병을 말끔히 고치고, 그렇게나 진귀한 비술들을 알려주었는데, 스승인 본인은 얼마나 더 대단할까. 어떻게 그런 인재가 죽었단 말인가.
그자가 죽지 않았다면, 일단 제자부터 속세에 내보내 이름을 널리 알렸겠지. 그럼 누군가가 삼고초려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그자를 세간으로 나오게 했을 것이야.
병주에 사람을 보내기 전까지는 황제 또한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수소문해봐도 송금이라는 자는 정말로 죽은 것이지, 숨어 있는 게 아니었다. 성현을 모셔 온 옛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흔한 게 아님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정교랑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송금이라는 이름을 몇 번이고 빠르게 되뇌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인 정방과는 달리, 송금이라는 이름은 기억 속에 없었다.
방금 들은 폐하의 말씀에 따르면, 송금이라는 자는 갑자기 미치광이가 됐다고 했어. 그건 바보였던 내 병이 갑자기 나아진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도대체 누구일까? 누가 나를 깨운 거지? 그리고 왜 또 죽은 거야? 왜 내가 병주로 돌아가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정교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폐하.”
정교랑이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폐하께서 알아보신 송금 선생의 일생과 외모에 대한 정보를 소녀에게 알려 주실 수 있으실지요?”
황제의 눈에 비친 정교랑은 무언가에 홀린 것 같기도, 어딘가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저런 반응은 진실된 것이다. 작위적으로 꾸며 낼 수 있는 반응이 아니야.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승이었던 사람이니, 당연히 그리해야지.”
황제가 흔쾌히 대답하고는 황성사로 내시를 보내 송금의 정보가 담긴 책자를 가져오게 했다.
“네 글씨도 스승이 가르쳐 준 것이냐?”
태후가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들어 올리고 감탄을 금치 못한 얼굴로 물었다.
태후도 정교랑의 글씨에 들은 바는 있었지만, 그저 지나가는 풍문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정교랑의 글씨를 모사한 작품을 받고 나니, 왜 정교랑이 글씨로 이리 유명한지, 박양 군주가 집에 가서 왜 눈물을 흘렸는지 알 것 같았다.
“무슨 내용이 있는 글을 쓴 것도 아니고, 이름 석 자에 날짜를 남긴 것뿐인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슬프기도, 비통하기도 하게 만들더구나.”
태후가 말했다.
“호방한 붓끝이 천 리 밖까지 달하여, 강직한 힘이 보이다가도, 유려함이 돋보인다. 전주(篆籒: 주나라 선왕 때 태사 주籒가 만든 서체) 같아 보이기도, 깊이 새긴 글씨 같아 보이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손을 거쳐 나온 글씨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묘해. 하늘을 울리는 지극한 충절이 비석을 새기는 사람의 손끝에 그대로 드러나 더없이 비통하더구나.”
황제가 정교랑의 글씨에 대해 진지하게 칭찬한 뒤, 잠시 뜸을 들이고 이어 말했다.
“정씨, 네 오라비들은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했으니, 부디 슬픔을 거두거라.”
정교랑이 큰절을 올리며 답례했다.
“서북에서 급보를 보내왔다. 우리가 빼앗겼던 성보 두 채를 되찾았다지. 전부 신비궁의 공로니라.”
황제가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정교랑은 다시 한번 이마가 땅에 닿게끔 큰절을 올렸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사실과 다릅니다. 그건 서북의 병사와 장수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몸을 바친 공로이고, 폐하의 혜안과 은덕 덕분입니다. 하찮은 물건 따위가 어찌 사람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정교랑의 말에 황제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정씨, 네 오라비들은 모두 포상을 받았다. 그리고 짐은 말편자와 신비궁이 모두 네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 그러니 어떤 상을 원하는지 말해 보거라.”
“폐하, 첫째로 그것들은 본래 소녀의 것이 아니라 스승에게 배운 기술입니다. 둘째로 소녀는 어떤 기술을 배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라버니들이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는 걸 안 덕분에 그것들을 기억해 냈습니다. 마지막으로, 폐하의 인자함과 넓은 아량이 없었다면, 신비궁이 서북에서 쓰이는 일도 결코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것들은 소녀와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소녀의 것이 아니며, 소녀 덕분에 쓰임새를 찾은 것도 아닌데, 어찌 소녀의 공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넋이 나간 황제는 웃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황제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이, 태후가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어쩜 말도 저리 잘할까. 공로를 탐하지 않는 겸손함에다 사람을 설득하는 이치까지 깨달았어.”
태후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황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 여인이 공로를 짐에게 넘김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짐의 입을 막은 셈이거늘.
오라버니들이 이루고 싶어 하던 게 있었으니, 누이로서 그들을 위해 기억해 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오라버니들이 더는 존재하지 않으니,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게지.
정말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짐에게 원한을 품은 걸까?
원한을 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적어도 원하는 것에 대한 욕심이 있다는 뜻이니까. 아무렴, 아무 생각도 없이 허송세월하는 자들보다는 훨씬 나아.
게다가 어린 처자가 성질을 부려 봤자 얼마나 부릴 수 있다고. 짐이 황제라는 사실을 잘 알고, 마지막에는 칭찬까지 몇 마디 덧붙였지 않나.
지금 저 여인이 보여 주는 모든 언행은, 짐이 듣던 바와 똑같구나. 솔직하고, 아부를 떨거나 굽히는 법이 없지만, 그렇다고 극단적이거나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태도. 저건 절대로 진소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이번 일은 확실히 저 여인 혼자서 꾸미고 해낸 것이로군. 진소와 다른 이들은 그저 저 여인의 바람을 타고 돛을 올린 것이고.
대화가 한창이던 그때,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뛰어오는 듯한 소리였다.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감히 태후궁에서 저리 결례를 범하는 것이야?
하지만 황제는 곧 무언가 알아챈 듯한 표정을 지으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문밖에서 잠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내시가 난색을 표하며 아뢰었다.
“폐하, 진안 군왕께서 안으로 들기를 청하옵니다.”
태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다니까. 역시나 그 일 때문에 정 낭자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구려.”
태후가 황제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고 조용히 말했다. 신의 낭자이기 때문에 보러 온 거겠지. 황제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진안 군왕이 안 오는 게 더 이상하지. 군왕도 저 낭자에게 미움과 기대를 동시에 품고 있을 텐데. 밉긴 해도, 그때는 도와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군왕이 저 여인을 도왔던 이유가 뭐겠는가. 저 여인처럼,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위해서였겠지.
“들라 하라.”
황제가 말했다.
내시가 황제의 명을 전하자, 좀 전에 들렸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정교랑이 아직 고개를 들기도 전에, 누군가가 바람처럼 빠르게 걸어와 정교랑의 앞에 멈춰 섰다. 고개를 숙인 정교랑의 시야에 아직 흔들리는 장포와 정교하고 아름다운 관화가 들어왔다. 그리고 태후궁 전각 안에서 나는 묵직한 진향(陳香)과는 다른, 산뜻한 향이 정교랑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정 낭자, 왔군요.”
청량한 목소리가 정교랑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소년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흥분이 섞여 있었다.
정교랑이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예를 올렸다.
* * *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듯한 귀비가 기다란 손톱으로 탁자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녀는 궁녀가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금잔을 보지 못한 듯했다.
“예상대로, 진안 군왕께서는 그리로 가셨습니다.”
내시가 급하게 들어와 조용히 말했다. 귀비가 냉소를 지으며 궁녀가 올린 금잔을 받아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경왕을 치료해주는 대가로, 황제와 태후께서는 그 낭자에게 뭘 해 주기로 했지?”
귀비가 묻자 내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경왕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습니다.”
귀비가 멈칫하면서 내시를 쳐다보았다.
“아직 말하지 않았다고?”
귀비가 피식 웃으면서 금잔을 다시 입가에 가져다 댔다.
“하긴, 이렇게 오랫동안 잘도 기다려 왔는데, 성급하게 굴 것 없겠지. 괜히 모양새만 추해져.”
귀비가 금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가자. 우리도 정 낭자를 한 번 만나 봐야지. 듣기로는 정 낭자의 글씨가 천하제일이라던데, 이참에 우리 대황자에게 글씨를 가르치라고 데려와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