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58
교랑의경 458화
진십팔랑은 귀비가 자리를 뜬 줄도 모른 채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십팔랑은 기다리는 게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그녀는 책장에 가득 꽂힌 서적 중 하나를 꺼내 읽었다. 편전 한쪽에서는 책을 읽고 그 뜻을 설명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마마께서 수업이 끝나는 대로 태후궁으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 정 낭자가 왔답니다. 태후마마께서 정 낭자의 글씨를 보기 위해 궁으로 부르셨다고 합니다. 아마 정 낭자에게 전하의 글씨 공부를 맡기고자 하실 테지요.”
“음? 그럼 진 낭자는?”
“전하, 천하제일이 있는데, 천하제이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진십팔랑이 쥐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진 낭자.”
누군가가 진십팔랑을 부르자, 그녀는 다소 황급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했다.
대황자와 대화하던 어린 내시는 진십팔랑이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진 낭자, 전하께서 안으로 들라 하십니다.”
어린 내시가 한쪽으로 몸을 돌리고 진십팔랑에게 길을 비켜 주었다. 진십팔랑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대황자의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조당에서 꼿꼿한 모습만 보이는 진소는 황제께서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존재인데, 그의 자식인 진십팔랑은 황궁이 무섭나 보군. 진소가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 자식은 그저 평범하구나.
어린 내시가 속으로 비웃으며 진십팔랑의 뒤를 따라갔다.
대황자에게 경서를 가르치던 국자감 관리가 물러나자, 그 안에는 탁자 앞에 앉아 있는 대황자만 남아 있었다.
올해로 열세 살이 된 대황자는 어느덧 애티를 많이 벗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각 분야의 전문 스승들이 대황자 곁에서 예의범절부터 경서, 산술을 도맡아 가르친 터였다. 그 덕분에 대황자는 또래 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존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진 낭자.”
대황자는 진십팔랑을 향해 정중하게 제자가 스승에게 하는 반절을 올렸다.
진십팔랑은 답례를 했으나, 곧바로 글씨 연습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대황자의 탁자 위와 주위에 잔뜩 쌓인 서적을 쳐다보았다.
“이것들은, 전부 전하께서 읽으셔야 하는 책인가요?”
진십팔랑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진씨 가문의 자제들도 당연히 책을 많이 읽어야 했지만, 대황자와 비슷한 나이대인 동생들이 읽는 책은 대황자에 한참 못 미쳤다.
대황자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손에 쥔 책을 내려놓고, 다른 책을 집어 들었다.
“진 낭자,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나는 책 한 장을 더 읽고 있겠습니다.”
대황자가 말했다. 진십팔랑의 시선이 대황자의 손에 들린 책을 향했다.
“전하께서는 벌써 그 책까지 읽으시는 건가요?”
대황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책은 부지런히 읽어야지요.”
“아유, 우리 전하께서는 매일 밤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주무십니다. 근면성실하신 분이지요. 전하의 글공부를 칭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를 정도예요.”
한쪽에 서 있던 내시가 아부를 떨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
진십팔랑 역시 대황자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에 대해 진소에게 들은 적 있었다.
“전하께서도 열심히 노력하시는군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공부와 정사를 다스리는 일은, 꾸준히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진 낭자의 글씨 또한 부단한 노력 끝에 만들어진 글씨 아닙니까?”
대황자가 단정한 자세로 물었다.
그럼요, 당연하죠. 이를 악물고 노력해서 만들어 낸 글씨인걸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분명 있을 거야. 난, 두렵지 않아.
“전하, 그럼 잠시 책을 읽고 계세요. 우선 글씨를 몇 자 써 오겠습니다.”
대황자는 알겠다고 대꾸한 뒤, 손에 쥔 책에 집중했다.
진십팔랑은 몸을 일으키고 자신의 탁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좀 전까지만 해도 조심스럽고 위태로워 보이던 진십팔랑의 걸음이, 한 걸음 한 걸음 무게 있는 걸음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탁자 앞에 앉은 진십팔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미리 준비되어 있던 붓을 들었다. 진십팔랑이 한 손으로 소매를 잡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 태후궁에 도착한 귀비는 정교랑을 만나지 못했다.
“갔다고요?”
귀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래. 경왕을 보러 갔어.”
태후가 미소를 지으며 어딘가 기뻐 보이는 눈빛으로 말했다. 태후의 눈가에 비친 기쁨을 보며, 귀비는 소매 안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정방.”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정교랑을 보며 싱긋 웃었다.
“낭자가 우리 집에 올 때는 담벼락을 넘지 않아도 돼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내시들이 천천히 열고 있는 궁문을 보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이건 이번에 새로 들어온 과일 차고, 이건 새로 만든 밤떡이에요.”
“이것도 한 번 먹어 봐요.”
늘 조용하던 경왕의 궁이 모처럼 분주해졌다. 내시와 궁녀들은 각종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전각 안을 드나들었다.
정교랑 앞에 놓인 탁자에는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음식이 올라와 있었다. 진안 군왕은 그래도 부족하다 싶은지, 계속해서 아랫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정교랑은 말없이 앉아 탁자에 오른 음식을 먹었다. 어떤 음식이 올라와도 진지하게 맛을 봤다.
“배부르면 억지로 먹지는 마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 건 있어요? 있다면 찬합에 담아 가져가요.”
진안 군왕이 신이 난 얼굴로 물었다.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 위에 놓인 음식 중 몇 가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거, 이거, 그리고 이거요.”
옆에 서 있던 궁녀와 내시들은 정교랑의 행동에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시선을 어디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저 낭자는 어쩜 사양도 안 하네.
진안 군왕은 싱글벙글하며 사람을 시켜 정교랑이 가리킨 음식을 찬합에 담으라 명했다. 그러고는 내시에게 경왕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두 내시가 경왕이 깼는지 확인하러 얼른 밖으로 나갔다.
“전하가 일 년 내내 하신 말보다, 오늘 하신 말이 더 많네.”
두 내시가 서로 눈짓을 하며 속닥거렸다.
“언제 강주로 돌아간 겁니까?”
진안 군왕은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정교랑에게 말을 걸었다.
“일 년 전에요.”
진안 군왕이 아, 하면서 말을 이어 갔다.
“오라비들의 일은 몹시 유감입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애도를 표한 것에 감사하다는 건가? 아니면 내가 그때 도와준 게 고맙다는 건가?
어쩌면 둘 다겠지.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렸다.
“경왕께서 안으로 드십니다.”
내시의 목소리를 들은 진안 군왕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왕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졸린 눈을 비비며 내시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왔다.
“육가아, 어서 이리 와 봐. 정 낭자가 왔어.”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경왕의 손을 잡았다.
진안 군왕도 못 알아보는 경왕인데, 한 번 봤던 정교랑을 알아볼 리가 만무했다. 경왕은 알 수 없는 옹알이를 하고는 바닥에 철퍼덕 앉아 손을 뻗어 탁자 위의 음식을 마구 입안에 욱여넣었다.
진안 군왕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경왕을 쳐다보고는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때요? 일 년 사이에 키가 많이 컸죠?”
진안 군왕은 자랑하는 듯한 말투로 정교랑에게 물었다. 정교랑이 진지하게 경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가 컸네요.”
“여전히 너무 뚱뚱하긴 하죠.”
진안 군왕이 우걱우걱 음식을 먹는 경왕을 보면서 말했다. 실내에는 경왕이 음식을 먹는 소리와 웅얼거리는 소리만 맴돌았다.
문가에 서 있던 내시가 몇 번씩이나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지만, 진안 군왕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경왕과 정교랑을 번갈아 쳐다볼 뿐, 정교랑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자, 문가에 서 있던 내시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더는 기다릴 수 없지.
“전하, 소인들은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정 낭자와 편히 말씀 나누십시오.”
내시가 의미심장하게 말끝을 늘리며 조용히 말했다. 흠칫 놀란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시의 말을 못 들은 건지, 정교랑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탁자 위에 놓인 간식과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살면서 정교랑만큼 진지하게 음식을 음미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정교랑은 평생 음식이란 걸 먹어 보지 못했던 사람처럼 맛을 음미하고, 맛을 느끼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어쩌면 정 낭자가 음미하고 있는 건 음식이 아니라, 나의 성의일지도.
어릴 적 명절 때면 부왕과 모친께서 나와 형제자매들에게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차려 주셨던 것처럼. 가득 차다 못해 넘치는 부모님의 사랑처럼.
비록 기억에 몇 번 없는 명절상이긴 하지만, 적어도 정 낭자보다는 많이 받았겠지. 어쩌면 정 낭자는 그런 사랑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거야.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진안 군왕은 내시와 궁녀들의 발걸음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게 섰거라.”
진안 군왕이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문가에서 이제 막 걸음을 내딛으려던 내시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뒤를 따라 문밖으로 나가려던 사람들도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정 낭자, 일 년이나 지났는데, 낭자는 여전히 경왕의 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까?”
진안 군왕이 물었다. 정교랑이 손에 쥔 젓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경왕은 병을 앓는 게 아니니, 치료할 것도 없죠.”
정교랑의 대답을 들은 진안 군왕이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정교랑이 예를 표하며 작별을 고했다.
“소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진안 군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정교랑이 고개를 숙인 채 뒷걸음질로 물러나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시야에서 점점 더 멀어질수록, 다시는 정교랑을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진안 군왕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정교랑이 갑자기 문가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올리며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방백종, 슬퍼하지 마요.
진안 군왕이 퍼뜩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일순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뜨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조용히 몸을 돌려 경왕의 궁을 떠났다.
한참 음식을 먹다가 배가 부른 경왕은 소매로 입가를 쓱쓱 닦은 뒤 밖으로 나가 놀았다. 내시와 궁녀들이 서둘러 경왕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가자, 전각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온몸이 굳어 버린 듯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진안 군왕을 보고, 좀 전에 문가에 서 있던 내시가 다가와 털썩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찧었다.
“소인이 경거망동했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전하.”
“네 마음을 알고 있다. 나를 위해서 그런 게지.”
“전하.”
내시가 고개를 들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데, 나를 위한 게 무엇이더냐?”
진안 군왕이 내시의 말을 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만이, 나를 위한 것이다.”
내시는 창백해진 얼굴로 손을 떨면서 바닥에 몸을 바짝 엎드렸다.
“무슨 일이든, 천만 가지 방법이 있는 법이다. 그러니 굳이 아끼는 사람을······.”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떠나간 문밖을 내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해칠 필요는 없지.”
방백종, 슬퍼하지 마요.
진안 군왕은 환하게 웃었다.
아슬아슬했다. 아슬아슬했어. 천만다행이로구나.
태후궁 안. 귀비가 이따금 밖을 내다보았다.
“마마, 경왕도 이리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그 낭자가 어떤 진단을 내리는지, 우리도 한번 들어는 봐야죠. 거기 숨어서 무슨 말을 할지 누가 알아요?”
“경왕은 잠들었다고 했다. 위낭이 어찌 자는 경왕을 깨워서 데려오겠느냐. 여기까지 오는 길에 또 어느 눈 안 달린 것이 경왕을 놀라게 하면 어쩌려고. 그리고 숨는다는 말이 무엇이냐? 그게 숨길 일이라도 된다는 게야?”
귀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경왕을 놀라게 해?
진안 군왕이 있는 한, 황궁에서 경왕을 놀라게 할 바보가 어디 있어? 까딱 잘못했다간 경왕을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초주검이 되도록 매를 맞을 텐데.
내시 한 명이 잰걸음으로 태후궁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께 아뢰옵니다. 진안 군왕께서 경왕의 병세에 대해 물었지만, 정 낭자는 여전히 경왕을 치료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시가 허리를 숙이고 말했다. 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 그 말이 사실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