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59
교랑의경 459화
귀비가 같은 표정으로 내시를 쳐다보았다.
“예. 그때 소인이 문가에 서서 군왕과 정 낭자의 대화를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경왕은 병이 없으니, 치료할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어찌하여 병이 없다는 것이냐?”
귀비가 물었다. 내시가 대답하기 전에, 태후가 귀비의 말에 대답했다.
“당초 위낭이 육가아를 데리고 정 낭자를 찾아갔을 때도 똑같은 말을 했어. 육가아는 바보가 된 것이지,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고 말이야. 그리고 죽을병은 더욱 아니니, 자신이 치료할 수 없고, 치료할 것도 없다고.”
태후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슬픈 표정으로 진안 군왕의 상태를 물었다.
“위낭은?”
“전하께서 경왕을 돌봐야 하는 탓에, 마마께 직접 아뢰지 못하여 송구하다고 하셨습니다.”
내시가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 또 한 번 무너진 게야.”
태후가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비는 태후 옆에서 마음 아프다는 듯한 몇 번 탄식을 내뱉은 뒤, 태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후궁을 벗어난 뒤에야 귀비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 그 말이 참이더냐?”
좀 전에 태후궁으로 들어왔던 내시가 웃으면서 조심스럽게 귀비에게 말했다.
“소인이 감히 마마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소인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옵니다. 정 낭자의 대답을 들은 뒤, 군왕은 넋이 나간 채로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습니다. 아까부터 지금까지 쭉,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멍하니 앉아만 있사옵니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던 귀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귀비가 경왕궁 쪽을 쳐다보며 물었다.
“만에 하나, 경왕에게 병이 생긴다면?”
“그럼 그 병만 고치겠지요. 정 낭자가 바보는 병이 아니라고 했잖습니까. 귀비마마께서는 걱정이 너무 과하십니다.”
급하게 불려온 고능준이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진안 군왕과 정 낭자가 모두 거짓말을 했다면요? 분명히 고칠 수 있는 것인데, 일부러 숨긴 거라면요?”
귀비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마마,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단언했는데, 그 둘이서 뭘 어떻게 숨기겠습니까? 황제 폐하를 속이는 게 무슨 재미라고요. 천자를 손아귀에 넣고 쥐락펴락하는 일이, 한 번으로 부족하단 말입니까? 아무리 안하무인이라고 해도 그런 짓을 또 할 리는 없지요.”
고능준이 대답했다. 귀비는 반신반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정 낭자가 두 번씩이나 고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 만천하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따귀를 치는 일은 한동안 벌이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정 낭자는 잠시 내려두시지요. 대황자를 위협할 만한 인물이 아니기도 하고, 폐하께서도 아직 정 낭자를 내치기는 아까우실 겁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우리가 그 낭자를 궁지에 내몰 필요는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도리어 우리가 잃는 것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어요.”
고능준이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무슨 일이든지 경중을 따지고,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일이 꼬여버릴 것이야.
“이 일이 아직도 심각하지 않다고요? 안 그래도 진안 군왕이 온종일 황궁 안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신경 쓰여 죽겠는데, 무슨 신의 낭자니 뭐니 하는 사람까지 나타나서는.”
귀비가 미간을 찌푸리고 조급해했지만, 고능준은 담담하게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다.
“해결해야 할 일은 해결해야겠지만, 가능한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은 끌어들여야 합니다. 별로 급할 것은 없습니다.”
“이게 어떻게 안 급해요? 군왕이 벌써 열아홉인데도, 아직 황궁에 남아 있어요. 이번에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면 안 고친다는 망언도 서슴없이 늘어놓는 신의까지 궁에 들어왔는데, 무슨 괴상한 비방을 쓸지 누가 알아요? 도가 사람들이 제일 잘하는 게 몸을 수양하고 기를 통하게 하는 거잖아요. 죽었다 살아난 동 내한이 그 나이에 아들을 또 낳았다는데, 동 내한의 나이는 폐하의 춘추와 비슷하다고요. 그 신의가 무슨 도술이라도 부려 폐하께 아들을 하나 더 안겨 주면 어쩌냔 말이에요!”
귀비가 눈을 부릅뜨고 숨 쉴 겨를도 없이 소리쳤다. 고능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군왕을 출궁시킵시다.”
고능준이 말했다.
“대체 어떻게요!”
귀비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그놈이 주둥아리를 어떻게 놀렸길래, 태후와 폐하께서는 그놈을 세 살배기 어린애 대하듯이 대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군왕을, 누가 감히 내쫓아요? 군왕을 해치려는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태후가 그 사람을 산 채로 잡아먹으려고 들 텐데.”
귀비의 말에 고능준이 입꼬리를 올렸다.
“태후께서 진안 군왕이 황궁에 살지 않으면 남이 해친다고 생각하여 황궁에 두시는 거라면, 오히려 일이 쉬워지지요. 대황자도 황궁 밖으로 내보내면 그만입니다.”
대황자를?
깜짝 놀란 귀비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럴 순 없어요! 나는 군왕을 내쫓으려는 거지, 우리 사가아를 내쫓으려는 게 아니라고요! 사가아는 이제 겨우 열세 살인데, 그렇게 어린 애를······.”
“그러니까요. 그렇게 어린 대황자도 출궁을 두려워하지 않고 친왕부로 가 지내는데, 대황자보다 나이가 더 많은 진안 군왕이 어찌 출궁을 두려워할 수 있겠습니까.”
고능준이 말했다.
“그, 그래도······.”
귀비가 고개를 저었다. 고능준이 귀비의 말을 끊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마도 아시겠지만, 최근 들어 폐하께서 정사를 돌보며 진안 군왕의 의견을 더욱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귀비는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이가 갈렸다. 고능준이 한 말은 이미 귀비가 수차례 들었던 이야기였다. 황제가 늘 진안 군왕의 의견을 칭찬하는 탓에, 대황자가 허수아비처럼 멍청해 보인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그놈을 내보내겠다는 거예요!”
귀비가 소리쳤다.
“군왕은 황궁 안에서나 지금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지, 출궁하게 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대황자는 친왕인 데다 폐하의 혈통이고, 군왕은 그저 군왕일 뿐입니다. 마마, 친왕이 황궁에 들르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경우지만, 이미 출궁한 군왕이 무슨 핑계로 황궁에 들를 수 있겠습니까? 폐하와 태후께서는 군왕을 자유롭게 황궁 안으로 들이고 싶겠지만, 조정 대신들의 생각은 다를 겁니다. 친근이라는 말이 왜 있겠습니까? 친하고 가까워야 친근이란 말을 쓸 수 있지요. 친하긴 하나 가까이 있지 않다면, 사람 마음은 물처럼 옅어지기 마련입니다.”
고능준이 말했다.
그런가? 군왕이 궁을 나가게 된다면, 확실히 지금처럼 제멋대로 황궁 곳곳을 누비면서 폐하와 태후의 눈에 띌 수는 없을 것이야. 하지만 대황자는 다르지. 진정한 황실 혈통인 데다, 황궁 안에는 이 어미가 있어. 하지만 군왕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도 없잖아!
귀비가 손에 깍지를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경왕은요? 그놈은 분명히 경왕을 방패 삼아 떼를 쓸 거예요.”
“경왕이라.”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황궁에 있는 공주가 어디 한 둘입니까. 다 큰 아이든, 어린아이든, 실수로 경왕과 부딪혀 놀라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귀비는 고능준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하고 눈빛을 반짝였지만,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도 경왕 때문에 놀랐던 공주가 있었어요. 그런데 태후께서는 도리어 공주만 꾸중하셨잖아요.”
고능준의 입꼬리가 점점 더 올라갔다.
“마마, 그때와 지금은 다릅니다. 벌써 2년이나 지난 일이니까요. 경왕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서는 다들 마음이 아프겠지만, 평생 마음 아파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러니 무슨 일이든 경중을 따지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는 거지. 이럴 때일수록 조급해지면 안 돼. 일을 그르치는 수가 있거든.
그래도 지금은 사람을 정리할 때가 되긴 했어.
무슨 일을 할 때,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니 진안 군왕도 갑자기 끼어들어서 내 일을 그르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가 됐지.
나 고능준은, 원수라면 절대로 잊지 않는 사람이야. 군왕, 네놈 때문에 내가 이렇게 큰 손해를 봤으니, 절대 그냥 넘어갈 수가 없게 됐다. 그러니 내가 조금씩 조금씩, 그 빚을 돌려받을 것이야.
한차례 가을비가 지나간 뒤, 경성 날씨는 한층 더 쌀쌀해졌다.
동쪽 성문의 감문관 이무는 성문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곧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말을 타고 성 밖을 향해 달려갔다.
성 밖의 길 위에는 행인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성문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사람이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더 많아졌다. 좀 더 앞으로 가 보니, 길가는 초시(草市: 도성 밖에 열리던 시장)라도 열린 것처럼 떠들썩했다.
“여기에 웬 초시가 열렸지? 경성이 바로 근처인 데다, 서쪽으로 삼 리만 더 가면 초시가 따로 있을 텐데.”
지나가던 행인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중얼거리자, 누군가가 나서서 설명했다.
“서쪽으로 삼 리를 더 가면, 초시는 있어도 무원산 형제의 무덤은 없잖소.”
설명을 들은 행인은 화들짝 놀랐다.
남의 무덤 앞에 초시가 열렸다고?
행인이 입을 다물기도 전에, 근처에서 통곡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행인이 고개를 돌리자, 울타리를 두른 무덤 앞에서 나이가 지긋한 사내 하나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저자는 성묘하러 온 사람이오?”
행인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오. 글씨를 보고 바보가 된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게지.”
옆에 있던 노점 상인이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글씨를 보고?
행인은 다시 고개를 돌려 대성통곡을 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옷차림만 보아도, 연로한 학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손님, 제게 좋은 붓, 먹, 종이와 벼루가 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저 비석을 직접 탁본한 글씨도 팔고 있는데.”
행인이 관심을 보이는 듯한 모습에 노점 상인은 더욱 목청을 높였다.
“모사품을 탁본한 다른 이들의 것과는 급이 다르다 이거예요.”
행인은 아직 상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야기를 듣던 주위 사람들이 혀를 차면서 손사래를 쳤다.
“허풍 좀 작작 떠시오. 울타리에다가 위병까지 붙은 마당에, 어떻게 비석에 종이를 대고 직접 탁본했다는 것이오?”
“아, 거 진짜라니까 그러네. 내 셋째 외숙의 손자의 이모의 아들의 조카가 태평거에서 일하는 덕에, 주인어른께 부탁하여 허락을······.”
“지랄도 유분수지.”
“뭐라고?”
금방이라도 싸움이 날 것 같은 분위기에, 행인은 더욱 혼란스러운 듯 말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무덤 앞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늙은 서생을 쳐다보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쉼 없이 서예 대가들의 글씨를 연구해 겨우 나만의 서체를 만들었단 말이오. 온 경성에 소문이 났던, 천하제이 행서라 불리던 차정사의 글씨를 보고도 인정할 수 없었거늘.”
늙은 서생이 울면서 말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날이면 날마다 듣고 있는 말이기도 하고, 자신들 또한 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무언가에 홀린 듯 비석의 글씨를 모사하는 일에 정신이 팔려 늙은 서생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저런 늙은 서생이 체통을 잃고 통곡하는 모습은 몇 번이나 보아도 재미있는지, 구경꾼들이 나서서 그에게 물었다.
“그럼 남보다 부족하다는 사실을 부끄러이 여기는 것이오?”
“그건 당연한 거고, 내가 우는 것은 이 글씨들이 너무도 비통하기 때문이오. 지극한 정성이 하늘을 울리고, 인생무상에 대한 분개와 비통함이 글씨에 새겨져 있잖소. 마음이 글씨에 깃든 것이고, 글씨가 곧 사람의 영혼인 것이지. 그러니 이것은 서예기도 하면서 서예가 아니고, 글씨면서도 글씨가 아니라는 뜻이오.”
늙은 서생이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구경꾼들은 워낙 제정신이 아닌 듯한 말들을 많이 들어서인지, 우습다는 듯 웃는 사람도 있었고, 늙은 서생의 말을 대강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다.
늙은 서생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쪽에서 멍석을 깔고 글씨를 모사하던 서생 한 명이 손뼉을 치면서 바닥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알겠다, 이제야 알겠어!”
서생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듯 날뛰었다.
“서예이기도 하면서 서예가 아닌, 글씨면서도 글씨가 아닌 경지. 손과 마음 모두, 서예를 한다는 생각 없이 글씨를 썼기 때문에 저 글씨가 훌륭한 것이야!”
서생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비틀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주위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수군댔다.
“도가 튼 사람이 한 명 늘었네.”
“미친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 걸 수도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