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71
교랑의경 571화
중재인들은 빠르게 진안 군왕의 시종들을 모두 죽인 뒤, 무기도 없는 진안 군왕을 상대했을 터. 이미 다 이긴 싸움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폭죽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폭죽 소리가 워낙 크고, 폭발 때문에 불길까지 번지게 되어 몹시 당황한 중재인들은 진안 군왕을 놓치게 되었고, 뒤늦게 민란 잔당의 속셈을 알게 된 석당은 산채에 남아 있던 중재인들을 모조리 죽였다. 민란 잔당들은 석당을 사지로 몰기는커녕, 자신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셈이 됐다.
참으로 운이 좋은 녀석이로구나.
황제가 고개를 저으면서 감탄했다.
그런 행운은 용감한 자에게만 찾아오는 거겠지.
“진안 군왕이 신선의 보호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진안 군왕이 인간계에 강림한 신선과도 같다면서, 산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군왕을 향해 큰절을 올리면서 신선처럼 떠받들었다네요. 그래서 석당 두 사람이 하늘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면서 자발적으로 조정에 투항한 것이라고요.”
귀비가 웃으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이 하늘의 뜻을 의미한다는 말에,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하지만 황제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상황이 그렇잖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환한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주위에 있던 잔당들이 한꺼번에 바닥에 쓰러졌을 테니. 더구나 군왕은 짐이 보낸 칙사가 아닌가. 짐을 대신해서 나랏일을 한 것이니, 하늘의 뜻이고말고.”
“성질나 죽겠어!”
귀비가 소리치면서 탁자를 뒤엎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급기야 귀비는 탁자에 대고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어느 자식이 친아들인지 구분도 못 하시나! 누구는 하루가 멀다고 칭찬하고 지켜 주기 급급한데, 왜 친자식한테는 하루에 세 번을 꾸중해도 부족한 것처럼 트집을 잡지 못해서 안달이시냐고! 뭐? 하늘의 뜻? 하늘의 뜻이라고? 나중에 남의 자식이 하늘의 뜻이 되면, 그때도 웃을 수 있으시려나?”
내시들이 황급하게 귀비 주위를 에워싸며 그녀를 만류했다. 내시들은 바닥에 깨진 찻잔과 접시 조각들이 귀비의 발에 밟히기라도 할까 몹시 두려운 기색이었다.
“마마, 폐하께서 이렇게 기뻐하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폐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무예를 좋아하셨잖습니까. 이번 일은 폐하께서 군왕을 천자의 대리로 보낸 것이므로 기뻐하시는 것이지, 절대로 군왕을 애지중지 떠받들어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마마, 너무 과한 걱정은 삼가시는 게······.”
“본궁은 과한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본궁은 화가 나는 게야!”
귀비가 격노하면서 소리치고는 휘장을 손으로 잡아 뜯어냈다.
“아주 쓸모없는 놈들밖에 없어! 시종들도 다 죽였다면서! 그렇게 좋은 기회인데도 군왕을 죽이기는커녕 폭죽 따위에 목숨을 잃어? 네놈들은 어쩜 그리도 쓸모없는 것들을 구해 온 게냐? 이 일을 광대놀이 정도로 여기는 게야?”
내시들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연신 손사래를 쳤다.
“마마, 마마, 말씀을 삼가십시오. 삼가셔야 합니다.”
귀비가 악을 쓰면서 휘장을 세게 끌어내리고 뒤돌아서서 탁자를 향해 발길질했다. 하지만 실수로 발가락을 세게 부딪히게 되자 악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마, 마마, 큰일 났습니다”
문밖에서 궁녀 한 명이 황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바닥에 주저앉은 귀비와 어지러운 방 안을 보고 깜짝 놀란 궁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또 얼마나 큰일이 났느냐? 어디 한번 말해보아라. 싹 다 말해보라고! 괜히 하루에 하나씩 이야기하지 말고, 한꺼번에 이야기하란 말이다!”
귀비가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궁녀가 두려움에 떠는 눈빛으로 귀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마, 안비마마께서 태백성을 품는 태몽을 꾸셨다는 소문 들으셨습니까?”
궁녀가 목소리를 낮추고 묻자, 귀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왜? 이번에는 또 뭘 품에 안았다고 하디?”
“마마, 그 소문이 거짓이 아닌 듯하옵니다.”
궁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귀비가 고개를 돌리고 허튼소리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마마, 안비마마께서 정말로 그런 꿈을 꾸셨는지는 모르겠으나, 하늘에 태백성이 정말로 나타났었다고 합니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다고?
귀비가 바른 자세로 고쳐앉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뭐라 하였느냐?”
월식이 태백성과 만나면, 태자가 위태로워진다.
진안 군왕이 무평 민란을 평정했다는 소식은 급보와 함께 온 경성에 퍼졌다.
일반적으로 민란을 평정했다는 소식은 서북에서 오랑캐를 무찌르고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보다 큰 파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무평 민란은 달랐다.
민란을 평정시키는 데 아주 중요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사건이 바로 천자를 대신해서 백성을 위로하러 무평으로 간 진안 군왕이 홀로 석당 산채에 쳐들어갔다는 점이었다.
“딱 네 명만 데리고 들어갔대.”
“아니야, 내가 알기로는 진안 군왕 혼자서 의연하게 산채로 들어갔대.”
흥미진진하게 잡담을 하는 사람들 뒤로 박자감 있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하늘에서 눈부신 금빛이 번쩍하더니 태상노군(太上老君: 노자에 대한 도가의 존칭)께서 나타났습니다. 태상노군께서 주문을 외우고는 신광검을 촥 하고 휘둘렀더니, 악당들이 한 번에 사방으로 튕겨 나가더군요. 그 후 진안 군왕이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걸어 나와서는, 소매를 홱 털고 호통쳤습니다. ‘네 이놈들, 언제까지 시간을 끌 셈이더냐! 당장 조정에 투항하도록 하여라!’”
이야기꾼이 손에 쥔 나무판을 탁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찻집 안에서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대청을 내려다볼 수 있는 별실 안. 젊은 사내 한 명이 탁자를 손으로 내리치면서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육낭, 뭐가 웃겨서 웃는 건가?”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흥미진진한데 뭐.”
주복이 웃으면서 탁자 위에 놓인 건과를 한 움큼 집어 들고 자신의 입안에 던져 넣었다. 그는 편하게 난간에 몸을 기대어 이야기꾼의 말에 집중했다.
“진안 군왕은 본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수왕비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관음보살께서 웃으며 금으로 만든 박을 품에 안겨 줬다더군요. 꿈에서 깬 수왕비는 자신의 회임 사실을 알게 됐고, 그렇게 낳은 아이가 바로 진안 군왕이지요. 보살님께서 안겨 준 동자이기에 진안 군왕을 곁에 두면 아이도 잘 생기고, 재물 운도 좋아진다고·········.”
이야기를 듣던 주복이 또 한 번 크게 웃음을 터트릴 기세로 입을 벌리자, 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돈주머니를 탁자 위로 던졌다.
“그만 가세. 저런 헛소리를 지껄이다니. 진안 군왕과 얼마나 원한이 깊은 자기에 저러나 모르겠군.”
주복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진호를 따라 나왔다.
“재밌잖아. 군왕 전하께서 정말로 복이 많으시긴 한가 봐. 폭죽으로 적을 물리치다니. 이런 경우는 아마 전무후무하겠지?”
“폭죽으로 적을 무찔렀다는 말, 자네는 믿나?”
진호의 물음에 주복이 진호를 슬쩍 쳐다보고는 웃었다.
“직접 목격했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자네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두 눈으로 봤다고 해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 사람들은 제 눈으로 본 것을 믿는다지만, 그 눈 또한 믿을 바가 못 되지(所信者目也, 而目猶不可信 – 공자).”
“에이, 그게 진실이든 거짓이든, 일이 해결되긴 했잖아.”
주복이 말했다. 진호는 대꾸하지 않고 방금 나온 찻집을 돌아보았다.
찻집에 잔뜩 몰린 사람들 때문인지, 이야기꾼은 침까지 튀기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군왕 전하에게 복이 많다면, 친왕은 어떻겠나?”
진호가 냉랭하게 말하자 주복은 진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군왕 전하는 복을 타고났으니, 나중에 태묘(太廟: 역대 제왕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편전에 위패를 모실 때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겠지. 친왕은 딱히 복을 타고나지 않았어도, 태묘 정전의 끄트머리라도 차지할 수 있는 거고. 십삼, 군왕과 친왕은 한 글자 차이지만, 이미 그것만으로도 하늘의 뜻으로 복을 타고난 자가 갈리지 않나.”
“하늘의 뜻이 어떤 것인지 그렇게나 훤히 알고 있으면, 본분을 지킬 줄 알아야지. 지금의 군왕은 제 본분을 잊었어.”
진호가 말했다.
“본분을 잊긴 뭘 잊어. 폐하께서 백 명의 관리들을 동원하여 귀환을 환영하고, 평왕에게 천자를 대신해 군왕에게 술을 올리라고 명령했는데, 무평을 구제하러 간 병사들과 관리들이 한사코 사양했다더군. 이 얼마나 본분을 지킬 줄 아는 자들인가? 적어도 본분은 알고 있다고 해야지.”
주육낭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더니 진호에게 가까이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고작 민란 하나 평정한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군왕이 상대한 자들은 백성들이거나 기껏해야 산적들 정도야. 민란 하나로 천자가 귀경길을 환영할 정도라면, 우리 서북 군사들의 공로는 어떻게 환영할 건데?”
진호가 웃음을 터트리고는 어깨로 주복을 밀쳐냈다.
“잘난 체는. 그건 본분을 지킨 게 아니야. 이번 일로 공로를 세우고 명성을 얻은 것도 모자라 폐하 앞에서 겸손함까지 지킨 게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주 잘 아는 자니 고명하다고 할 수밖에.”
주복이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자네는 허구한 날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 사는 게 힘들지도 않아? 똑똑한 건 알겠는데, 정작 그 머리를 제대로 쓸 곳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야? 차라리 그 여인의 일을 어떻게 도울지나 빨리 생각해 봐.”
그 여인의 일.
진호가 대꾸하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겼다.
그건 내가 제일 많이 생각하는 일이지. 하지만 그 여인은 단 한 번도 내 생각을 필요로 한 적이 없어.
주씨 저택으로 돌아온 주복과 진호는 때마침 마차를 타고 문을 나서는 정교랑과 마주쳤다.
“어디 가?”
주복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물었다.
“경왕부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주복은 대수롭지 않게 알겠다고 걸음을 옮겼지만, 진호는 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정 낭자.”
정교랑이 발걸음을 멈추고 진호를 쳐다보았다.
“계속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진안 군왕 전하께서 뭘 하셨기에, 경왕을 돌봐 주기로 한 거죠?”
진호가 웃으면서 물었다.
“내게 부탁을 했는데, 마침 할 수 있는 일이라서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낭자에게 부탁하는 게 그리도 쉬운 일이었군요.”
정교랑은 웃으며 예를 표하고 마차에 올랐다.
“뭐 하는 거야?”
주복이 눈을 부릅뜨고 팔꿈치로 진호를 툭 쳤다.
“궁금하잖아.”
진호가 먼저 걸음을 옮기면서 대답했다.
“궁금할 게 뭐 있다고?”
주복이 물었다.
“낭자가 누구에게 시집갈지 궁금해.”
진호가 웃었다.
주복이 덕승루에서 한바탕 난리를 친 탓에 고씨 가문은 낭패를 봤지만, 덩달아 소란을 피우지는 않고 조용히 지내며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고 대인이 나설 모양이야.”
진호가 말했다.
“어제 중매인이 정씨 가문에 갔다던데, 그쪽 사람들은 참 낯짝도 두꺼워.”
주복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런 때엔 낯짝이 두껍지 않은 게 멍청한 거지.”
진호가 따뜻한 차를 한 잔 우리면서 말했다.
“이래서 고 대인의 수가 평범하지 않다고들 하는 거야.”
“그럼, 우린 뭘 해야 하지?”
주복이 진호가 건넨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 물었다.
나도 이대로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는 건가?
진호가 고개를 들어 주복을 쳐다보았다.
오후의 햇볕이 붉게 달아오른 소년의 거친 얼굴을 비췄다. 소년의 얼굴이 붉어진 이유가 뜨거운 햇볕 탓인지, 아니면 좀 전에 들이켠 따뜻한 차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궁금하다는 거야.”
진호가 웃으면서 자신의 손에 쥔 찻잔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