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06
교랑의경 606화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면 못 이룰 게 없지. 진안 군왕이 자진해서 봉지로 가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정 낭자와의 혼사를 강행한다면, 태후도 분명 동의할 거야.”
진호가 말했다.
“봉지로 나간다고? 경성에 멀쩡히 잘 있다가 봉지로 나가긴 왜 나가?”
주복이 물었다.
“멀쩡히 잘 있다고? 멀쩡하게 잘 있으니 당연히 봉지로 나가야지. 종친 주제에 무슨 연유로 경성에 남아 있겠어? 황제와 태후에게 총애받는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마음 편히 경성에 있으면서 황실이 유생들과 세간의 비난을 받도록 두고 보란 말이야?”
종친이 진안 군왕처럼 굴면 남의 이목을 너무 끌잖아. 어렸을 때도 송자동자라는 별명 때문에 유생들의 질타를 불러일으키더니, 지금은 장성해서도 경성을 떠나지 않고 있어. 도리어 공까지 세워가면서 명망을 얻으려고 하고 있지.
“지금 평왕이 죽었고, 폐하는 병세가 위중하셔. 그나마 남아 있는 경왕은 불구가 됐지. 그런데도 허구한 날 황궁을 들락거리다니, 진안 군왕은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말하던 진호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자가 뭘 하고 싶든 말든, 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내 누이의 미래가 궁금할 뿐이라고. 자네 말대로라면, 그 애는 진안 군왕과 함께 경성을 떠나는 건가?”
주복이 진호의 말을 끊고 물었다.
“떠나지 않아도 되긴 하는데, 나한테 시집오긴 싫다잖아.”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주복이 진호를 노려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계속 이해가 되지 않는 게 하나 있어.”
진호가 주복을 쳐다보면서 계속 말하라고 손짓했다.
“그 여인이 뭘 잘못했지?”
주복이 묻자, 진호는 멈칫했다. 주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진호에게 다시 물었다.
“그 여인이, 뭘 잘못한 적은 있어?”
진호는 주복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먼저 간다. 그늘 밑에서 쉴 만큼 쉬었어. 그리고, 날 찾아줘서 고마워.”
주복이 진호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포권의 예를 취했다. 진호는 주복이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고 점차 멀어져 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여인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언제나 다른 사람이 먼저 그 여인을 건드리고, 의심하고, 미워하고, 계산한 거야. 잘못도 없고, 잘못한 적도 없는데, 왜 항상 그 여인이 피하고 물러서야 하지?
상대가 황실이라서? 그 여인이 피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공자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진호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진 시강의 수하가 이쪽으로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궁에 계실 텐데, 설마 궁에 무슨 일이라도?
진호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태자 책봉을 논하기 시작했습니다.”
진호 곁에 멈춰선 수하가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말했다.
근정전 안에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직도 애가의 말이 명확하지 않소?”
침묵을 참지 못한 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게야!”
태자 책봉을 결정하라며? 이놈의 조정 대신들은 죄다 들어왔으면서 왜 아무도 본론을 꺼내지 않는 게야! 황상의 용태와 평왕 안장에 대해 묻고 이것저것 잡다한 이야기까지 다 끌어다 논의하고는, 그게 끝이야?
이러니 당초 평왕이 조회에 나가길 꺼렸던 게로군. 정말 무료하기 짝이 없구나. 애가는 지금 여기서 이런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단 말이다.
태후가 또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진소가 물었다.
“마마께서는 누구로 결정하고자 하십니까?”
태후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진소를 쳐다보았다.
쓸데없는 소리. 누가 또 있다고?
“당연히 경왕이 아니겠소.”
태후의 대답에 근정전 안은 또 한 번 침묵에 휩싸였다.
“대신들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게야.”
황제의 얼굴을 세심하게 닦아주던 황후가 말했다.
“아니요. 그들은 모르는 게 아니라, 말할 수 없어서 하지 않는 겁니다.”
정교랑의 말에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바보를 보필하여 제위에 올렸다는 명성을 얻고 싶은 대신은 아무도 없겠지. 정말 우스운 농담이긴 하나, 이 농담에 웃을 수가 없다는 게 참.”
황후는 몸을 일으키고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곤히 잠들어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특히 본궁은 더욱 웃을 수가 없지.”
황후가 말하던 도중, 문밖에서 궁녀 한 명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마마, 큰일 났습니다.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
황후의 안색이 급변했다.
“설마, 못 구한 것이냐?”
황후가 물었다.
“구해 냈습니다. 하지만 식음을 전폐하고, 약도 드시지 않겠다며 거부하셔서요.”
궁녀가 조용히 대답했다.
황후가 한숨을 내쉬고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안비가 폐하를 흠모하는 마음이 몹시 깊은지라, 폐하께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거의 실신하기 직전까지 갔었어. 어쩌면 본궁이 안비를 본받아야 할 수도 있겠군. 폐하께서 붕어하실 때, 본궁이 폐하를 따라 저승으로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러게요. 그렇게 되면, 황후마마께서는 폐하와 함께 안장되는 영광을 누리고 명예롭고 마음 편한 죽음을 맞이하시겠지요. 앞으로 닥칠 고난의 나날을 굳이 견디지 않으셔도 되고요.”
정교랑의 대답에 놀란 황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 낭자, 아무래도 본궁이 낭자의 배짱을 얕봤나 보군.”
“소녀는 거짓말을 싫어할 뿐입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그래도 말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본궁은 황후야. 설령 폐하께서 부재하시더라도, 본궁은 여전히 황후지.”
황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마께서도 잘 아실 텐데요. 경왕을 태자로 세우고 폐하께서 양위하시면, 태후마마께서는 필시 수렴청정을 하실 겁니다.”
“그럼 본궁은 황태후가 되겠지.”
“그야 모를 일이지요. 양(楊) 태후는 폐서인되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굶어 죽지 않았습니까.”
정교랑이 태연하게 말하자, 황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조정에는 가남풍(賈南風)이 없지 않으냐.”
황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하지만 곧 진혜제(晋惠帝)가 생기지 않습니까. 가남풍은 진혜제가 나온 후에야 나왔죠.”
정교랑이 바로 맞받아치자, 황후가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저었다.
“가남풍이 나온다 해도, 본궁의 친가에는 직권을 남용하는 간신이 없느니라. 정 낭자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한 듯하구나. 본궁은 한낱 여인일 뿐이야. 조정의 일과 나랏일은 본궁이 알 수도 없고, 관여할 수도 없는 일이지. 조정의 일은 대신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본궁은 그저 궁에 틀어박혀 하늘이 보우해 주시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어.”
정교랑이 웃었다.
“마마, 마마의 부친께서는 직권을 남용하여 다른 사람의 심기를 건드린 적 없다지만, 마마께서는 이미 다른 사람을 노하게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귀비의 광증과 평왕의 죽음에 대해서, 태후마마께서 의심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설마 소녀 하나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황후의 표정이 또 한 번 변했지만, 정교랑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황후마마께서도 충분히 잘 알고 계신 것들인데, 굳이 소녀의 입을 통해서 다시 들으셔야겠습니까.
소녀에게는 기껏해야 공모의 죄가 있겠지요. 태성(台星)이 하늘을 지나간 일을 숨기고, 안비가 회임했던 태자를 잃고, 평왕이 벼락에 맞아서 죽고, 폐하께서 쓰러지신 것까지 소녀의 몫으로 칠 수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태후마마는 절대로 소녀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만큼, 이 일의 주모자 또한 놓치지 않으려 하실 겁니다. 태후께서 어떠한 일을 빌미로 소녀를 죽일 수 있다면, 주모자에게도 똑같은 죄목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 하실 테지요.
어쩌면 태후께서는, 지금 당장 주모자를 확실하게 죽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시간을 좀 더 끌면서 차츰 권력을 키운 후에 후궁과 조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그때 이 일을 다시 처리하시려는 걸 수도 있고요.
그때가 되면, 누가 황태후의 존재를 신경 쓸까요? 황태후의 생사를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감히!”
황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정교랑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황후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였다.
“지금 이 시기에 폐하의 병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는커녕, 내궁을 이간질하러 온 게냐!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황후가 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본궁이 죽을병이라더니, 이 일을 말함이더냐? 아주 허튼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구나.”
정교랑은 황후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창가로 다가가 봉선화 화분을 들어 올렸다.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게야!”
황후가 호통쳤다. 정교랑이 손에 든 화분을 망설임 없이 바닥에 내던지자, 깜짝 놀란 황후가 비명을 질렀다.
“소녀의 견문이 짧았네요. 궁에서는 봉선화를 보약까지 먹여 가며 키우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정교랑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산산조각이 난 화분 사이로 흙과 탕약 찌꺼기가 섞여 있었다.
“태후께서 황후마마의 노고를 고맙게 여기시어 보약을 지어다 주셨다는데, 약을 마시면 어떨게 될지, 한번 맛이라도 보지 그러셨습니까?”
정교랑이 말했다.
“누가 네게 말해 줬느냐? 진안이 말해 준 것이냐?”
황후는 조금 전의 침착함을 잃고 손수건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물었다.
“마마, 소녀는 황제 폐하의 풍질을 고칠 줄은 모르나, 의술과 약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침궁에 계신 폐하께 쓰는 약과 이런 보약의 향은 확실히 다르지요.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진 모르나, 소녀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정교랑의 말에 황후는 말문이 턱 막힌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이 탕약을 들지 않으셨죠? 이 탕약을 드시고, 폐하께서 붕어하실 때 함께 뒤따라가신다면 부부의 은애를 과시하기에는 퍽 좋지 않습니까? 얼마나 처연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겠는지요.”
정교랑이 이어서 말했다.
황후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듯했다.
“그래, 낭자의 말이 맞아. 지금 본궁은 죽을병에 걸렸다. 한데, 그런다고 뭘 어쩌겠느냐.”
팍 소리와 함께, 태후가 성난 목소리로 고함쳤다.
“말해 보시오!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속셈이오? 경왕이 바보인 게 싫고, 그대들의 명성에 경왕이 오점으로 남을까 봐 두려운 거라고 말을 해 보라고!
그렇다면 대안을 내놓아야지. 경왕이 아니면 어쩌라는 말인지! 황제가 남긴 혈통이 경왕 하나뿐인 것을 어떡하겠소? 애가인들 좋은 명성을 포기하고 싶었을까!”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대신들이 예를 올리며 말했다.
“빈말은 집어치우시오! 애가는 지금 이렇게 그대들과 한가하게 여담이나 나누고 있을 기분이 아니란 말이오. 애가에게 남은 손자는 경왕 하나뿐인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그대들이 한번 말해 보라니까!”
말씀이 지나치시네. 어찌 조정 대신들에게 황위 계승자를 결정하란 말인가! 역시 기분이 오락가락한 게 종잡을 수가 없는 여인이야.
대신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저었다.
경왕이 등극한다면, 분명 태후가 수렴청정하게 될 터. 이렇게 원리원칙을 무시하고, 감정 기복까지 심한 여인이 권력을 잡게 된다면, 조당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신, 경왕을 황태자로 책봉하기를 청하옵니다.”
진소가 침묵을 깨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조당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소가 먼저 나서서 바보인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자고 이야기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조정의 기강이 갈수록 무너지는구나. 이젠 위관처럼 취한 연기를 해 보려는 사람조차 없다니. 황제가 없으니, 진소도 소신껏 말하지 못하는 건가.
대신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른 대신들뿐만 아니라, 고능준과 태후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고능준의 예상으로라면, 경왕의 태자 책봉에 가장 먼저 안 된다고 소리칠 사람이 바로 진소였다. 그래서 고능준은 진소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며 진소와 결판을 내려고 별렀다. 그는 진소가 분명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다는 듯 강직한 태도를 취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태후와 끝까지 언쟁을 벌이다가 결국 소매를 홱 털고 사직을 청하며 조당을 떠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찍이 조당에서 내쫓겨야 마땅한 진소인데, 어쩌다가 제일 먼저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자는 말을 한 사람이 되었는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수작이야!
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쉬이 입을 열지 못했지만, 태후는 진소의 말에 몹시 기뻐했다.
태후는 고능준이 진소를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황제가 진소를 중용하고 신뢰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태후는 황제가 쓰러지자마자 그가 총애하는 대신을 궁 밖으로 내쫓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유림과 백성들이 얼마나 자신의 욕을 해 댈지 눈을 감고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 잘됐구나. 이렇게 되니 얼마나 좋아?
“암, 그리해야지.”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서를 준비하라고 명령하려던 찰나, 진소가 또 한 번 예를 표하면서 말했다.
“폐하의 옥체가 위독하시고, 태자 전하는 지병이 있으시옵니다. 그러니 태자의 정사를 보필할 수 있도록, 청컨대 신을 보정대신(輔政大臣: 국정을 보필하며 섭정할 대신)으로 임명해 주시옵소서.”
진소의 낭랑한 목소리가 조당 안을 가득 메웠다.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진소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