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15
교랑의경 615화
꼭 이렇다니까. 정 낭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모든 원망이 정 낭자에게 향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드는 인간이든, 우스갯소리를 하다가 얼떨결에 낭자에게 불똥을 튀게 하는 놈들이든, 다 똑같아.
“이 몸은 어차피 경성을 뜨게 될 텐데, 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 되나? 자네는 이가 적으나 많으나 간지러운 건 똑같다는 속담도 몰라?”
고 관인이 냉소를 보였다.
“고 관인.”
꾀꼬리 같은 맑은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칠현금 연습을 마친 주 낭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영롱 언니 대신, 소녀가 관인을 위해 보잘것없는 재주를 보여 드려도 되겠는지요?”
주 낭자가 예를 표하며 말했다. 고 관인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주 낭자라면 제가 감히 모시지 못할 텐데요.”
주 낭자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는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
“지난번 일은 이 아형이 실례했어요. 아형이 어리석어 본분을 잠시 잊었네요. 부디 관인께서 넓은 아량으로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고 관인은 예상치 못한 주 낭자의 반응에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정씨 년이 또 주 낭자를 통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가?
“주 낭자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쳤다고 하니, 안으로 들게.”
진호의 말에 고 관인의 추측이 끊겼다. 주 낭자는 진호를 쳐다보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한 뒤, 먼저 별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나는 남이 남긴 걸 주워 먹는 취향이 아닐세.”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진호에게 말했다.
“웃기는 소리군. 이런 곳에 깨끗한 게 어디 있다고. 어차피 다 즐길 거리일 뿐인데.”
진호가 코웃음을 치면서 대꾸했다.
“주 낭자는 정씨 가문의 사람이잖나.”
고 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주 낭자가 정말로 정씨 가문의 사람이었다면, 지난번에 관인이 벌인 그 창피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진호가 별실 중앙에 앉아 칠현금을 조율하고 있는 주 낭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 여인이 정 낭자와 무슨 상관이라고!
진호가 소매를 홱 뿌리치며 별실 안으로 들어갔다.
감미로운 칠현금 연주가 별실 안을 가득 채웠다.
“말하고 싶은 게 뭔가?”
진호가 고 관인에게 말했다.
고 관인이 곁눈질로 주 낭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려나? 정말 주 낭자는 그 정씨 년과 티끌만큼도 관련이 없나?
고 관인은 황친인 진씨 가문이 항상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몹시 싫어했지만, 진씨 가문의 그 녀석은 사리 분별을 참 잘하더라는 고능준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좀 전의 사람들이랑 반나절을 토론한 결과가, 군왕을 봉지로 보내 달라는 청을 올리겠다는 건가?”
고 관인의 말에 진호가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관인은 어떤 고견이 있을지?”
고 관인이 웃었다.
“내가 책이랑은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긴 하지만, 잡초는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옛말은 잘 알지.”
고 관인이 느릿느릿 말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칠현금 연주 소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이어졌다. 칠현금을 연주하는 사람은 마치 고 관인이 한 끔찍한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 보였다.
주 낭자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연주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눈가에 눈물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그녀를 자세히 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이야 쉽지. 당신네들이 예전에도 제거하지 못했던 뿌리를 지금 와서 무슨 수로.”
진호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게 말일세. 게다가 지금은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 낸다는 신의까지 그놈 곁에 붙었으니.”
고 관인이 대꾸했다.
“그놈과 정 낭자가 무슨 상관이라고.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자네가 죽을병에 걸린다 해도, 그 여인은 자네를 살려냈을 걸세. 남들과 똑같이 말이야.”
진호가 말했다. 고 관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인가? 내가 정 낭자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군.”
때마침 한 곡이 끝나고, 별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고 관인이 주 낭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군. 주 낭자는 정 낭자와 몹시 가까울 텐데, 정 낭자에 대해 잘 아나 모르겠네?”
주 낭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관인, 무슨 말씀이세요. 정 낭자와 가까운 사람을 꼽자면, 소인의 생각에는 단연 진 관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가로 걸어가던 진호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내게 눈길을 주시네. 내게 염증을 느끼는 듯 냉랭한 눈빛이긴 하지만.
주 낭자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진호를 쳐다보았다.
“진 관인의 다리를 고쳐 준 사람이 바로 정 낭자라지요.”
진호의 차가운 눈빛에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 낭자는 끝내 하려던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 낭자는 그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가 되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진 공자님이 나를 한 번이라도 더 쳐다봐 주시길 바라서?
아니면, 정 낭자가 나와 관련 없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굳이 이 자리에 나를 끌어들인 진 공자님이 너무 미워서?
전에는 내가 일부러 두 가문을 이간질한 거라고 말하질 않나, 오늘은 아예 내가 있는 자리에서 고 관인이 저런 위험한 말을 내뱉도록 유도하질 않나.
그리고 고 관인이 내 앞에서 장차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을 죽이겠다는 말까지 했으니, 앞으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 관인 쪽에 묶인 사람이 되는 것이고, 정 낭자의 사람이 아닌 이상 영원히 고 관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셈이야.
진 공자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을까? 어쩜 이리도 독하게 나를 내다 버릴까?
아니, 아니야. 진 공자님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어.
누구나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잖아? 더군다나 나는 진 공자님이 아끼는 그 여인을 고씨 가문의 원수로 만든, 천한 계집이니까.
“맞네. 다만, 나는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야. 물론 어떤 자들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원수로 갚지만.”
별실의 문이 언제 닫혔는지도 모른 채, 주 낭자는 고 관인과 진호가 떠난 별실 안에 홀로 남아 있었다. 주 낭자는 칠현금 앞에 멍하니 앉아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진호의 말을 되새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 낭자는 갑자기 온몸에 힘이 다 빠진 듯이 맥없이 바닥에 쓰러져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관인, 이만 돌아갈까요? 아니면 좀 더 둘러보다가 가실는지요?”
수하가 복도에서 고 관인에게 물었다.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쪽은 이야기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모르겠네.”
그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구석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수하들이 재빨리 고 관인의 앞을 막고 그를 보호했지만, 튀어나온 사람은 다짜고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땅에 찧고 있었다.
“또 네년이냐? 지금 뭐 하는 게야!”
수하가 춘령을 알아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춘령이 고개를 들었다. 좀 전에 수하에게 맞은 뺨이 여전히 빨갛게 부어 있었다.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춘령의 모습은 몹시 불쌍하게 보였다.
“관인, 소인, 소인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춘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증인?
“무슨 증인?”
고 관인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물었다.
춘령이 무릎을 꿇은 채 고 관인 앞으로 기어갔다. 수하가 춘령을 막으려고 하자, 고 관인이 손을 들어서 수하를 제지했다.
“소인이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정 낭자가 벼락을 불러와 사람을 죽이는 것을요.”
춘령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 * *
“소인이 어찌 감히 고 관인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덕승루의 다실 안, 춘령이 들어와서 무릎을 꿇은 채 자리에 앉은 고 관인에게 예를 올렸다.
“벼락으로 허수아비를 죽이는 걸 본 게 아니고?”
고 관인이 입술을 삐쭉이며 물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고 관인, 제 말씨를 잘 들어 보세요.”
춘령이 연신 손사래를 치면서 화제를 바꿨다.
말씨?
고 관인이 멈칫하더니 이내 춘령의 말뜻을 이해했다.
“강주!”
고 관인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외쳤다. 춘령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강주 말씨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쩐지. 경성 기녀의 시중을 드는 몸종이 어떻게 그 정씨가 벼락을 불러와 사람을 죽이는 걸 봤나 했다.
“설마 그 여인, 강주에서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게냐?”
고 관인이 조금 놀란 눈치로 물었다.
그 여인의 나이라고 해 봐야 고작해야 열몇 살 정도인데, 몇 년 전에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면 도대체 몇 살 때부터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 거야?
“네.”
춘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 관인이 강주 말씨를 못 알아들을까 봐 경성 말씨로 재차 대답했다.
“소인은 원래 강주 정씨 가문이 운영하는 도관에서 지내던 몸종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정씨 가문에서 정 낭자를 도관으로 보내왔죠. 그런데 도관에 계시던 관주님과 정 낭자 사이에 무슨 다툼이 있었나 봐요. 데리고 있던 몸종과 정 낭자가 합세해서,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에 번개를 불러와 벼락을 내려 관주님을 죽여 버리고, 저와 제 동생은 굶겨 죽일 작정으로 아주 먼 도관으로 보내 버렸죠. 천만다행으로 저희 자매는 도관에서 몰래 도망쳐 나왔는데, 도망치던 도중 제 동생은 궂은 날씨를 견디다 못해 병을 얻었고, 버려진 사찰에서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춘령이 울먹이며 눈물을 훔쳤다.
그랬던 거로군. 고 관인이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랬군.”
고 관인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춘령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 해도, 단지 증인만으로는 부족해.”
춘령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고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관인, 관인께서도 어찌하실 수 없는 건가요? 소인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지옥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너무 무서워서요. 그 여인이 평왕 전하까지 죽였다기에, 소인은 더욱 겁에 질려 차마 관아에 이 사실을 발고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목숨을 걸고 고 관인께 말씀드린 건데. 정말 고 관인께서도 그 여인을 어찌하실 수 없는 겁니까?”
춘령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이미 끝난 일이라 다시 언급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시 언급한다고 한들 달라질 것도 없고.”
고 관인이 대꾸했다.
“소인이 증명할 수 있습니다. 소인이 얼마든지 증인으로 나설 수 있어요.”
춘령이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열심히 말했다.
“너 혼자로 세상 사람들을 설득시키기엔 역부족이야.”
고 관인이 재차 안 된다고 말했다. 춘령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얼굴을 소매에 묻은 채 대성통곡했다.
“네가 그리도 오래 숨겨왔단 말이지. 그럼, 지난번의 일도 사실 네가 계획한 것이겠구나?”
고 관인이 갑자기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자, 화들짝 놀란 춘령은 몸을 살짝 떨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잠시 뒤, 울음소리가 차츰 잦아들더니 춘령이 고개를 들었다.
“관인,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소, 소인은 그저······.”
춘령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사죄했다.
“너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정 낭자를 상대할 수 있다고 여긴 거고?”
고 관인이 춘령의 말을 이어서 물었다. 춘령은 허리를 숙인 채 몸을 떨면서 대답하지 못하고 울음을 삼켰다.
“하지만 이번 일은 네가 나를 과대평가했다. 지금은 내가 누굴 도울 처지가 못 되기도 하고, 네가 말한 그 정 낭자 때문에 나는 경성에서 아주 쫓겨날 판이거든.”
고 관인이 두 팔을 쭉 펼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춘령이 다급하게 고 관인의 앞으로 기어가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관인, 제발 소인 좀 살려 주세요.”
춘령이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했다. 고 관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손끝으로 춘령의 작은 턱을 치켜들었다.
“좋다. 내가 경성을 떠날 때 너를 같이 데리고 가마. 같이 도망가자.”
고 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말하고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관인, 저 약아빠진 계집을 저대로 놔둬도 되겠습니까? 증인으로도 쓸모가 없어 보이는데.”
고 관인의 뒤를 바짝 따라온 수하가 안쪽을 돌아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고 관인이 피식 웃었다.
“내가 보기에는, 저년은 증인을 하겠다고 날 찾은 게 아니야. 저 얍삽한 계집년이 나와 정씨 년 사이에 한 줄을 그었으니, 잘 남겨 두면 두 번째 줄을 긋게 할 수도 있겠지. 남겨 두면 어떻게든 쓸모가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