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73
교랑의경 673화
진안 군왕의 마음속에 자리했던 기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울지 마요, 울지 마. 차라리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게 낫겠어요. 차라리 정색하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게 낫지, 이렇게 상심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아요.
대체 얼마나 슬프기에, 도통 감정을 드러낼 줄 모르던 이가 이토록 눈물을 쏟는 건지.
“정방.”
진안 군왕은 잠긴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꽉 끌어안고, 손으로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슬퍼하지 마요.”
정방, 슬퍼하지 마요.
진안 군왕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몰랐다. 잠결에 손을 뻗어 보던 그는 베개 주변이 비어 있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어젯밤 일이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퍼뜩 일어나 앉은 진안 군왕이 고개를 숙였다. 가슴께의 내의가 쭈글쭈글 구겨진 모습이 보였다. 아직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꿈이 아니었어!
진안 군왕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전하.”
밖에 있던 경 공공이 인기척을 느끼고 안으로 들어왔다. 경 공공은 휘장을 들어 올린 채 침상에 앉아 있는 진안 군왕을 보고, 얼른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쭈글쭈글한 내의는 입고 있다고 하기 뭐한 상태였다. 입고 있다기보다는 걸치고 있다고 하는 게 옳았다. 진안 군왕은 가슴을 반쯤 드러내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손을 들고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부인은?”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부인은?
경 공공은 입을 삐죽이며, 진안 군왕의 퀭한 눈가를 쳐다보았다.
“부인은 활쏘기를 하러 가셨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갔구나. 많이 좋아졌다는 뜻이야.
진안 군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나도 단련해야겠다. 이 태의한테 가서 물어봐라. 내가 말을 타고 활을 쏴도 되는지.”
“그건 급하지 않습니다.”
경 공공이 얼른 뒤를 따르며 투덜대듯 말했다.
“절제가 중요하지요. 전하의 건강은 이제 막 좋아지신 참이니, 젊음만 믿으시면 안 됩니다.”
“뭘 절제해? 뭘 그리 중얼거리는 게야?”
미간을 찌푸리며 묻던 진안 군왕은 경 공공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어제 경성에 무슨 움직임이 있었느냐?”
태자비 인선이 확정되면서 경성과 조당은 다시 한번 후끈 달아오른 터였다. 경 공공은 욕실로 따라 들어가면서, 진지한 얼굴로 대답을 올렸다.
정교랑이 돌아왔을 무렵, 진안 군왕은 벌써 마당을 한 바퀴 돈 상태였다. 새벽 햇살이 비추는 여인은 여전히 머리를 높이 올려 묶고 치마에 덧저고리를 입은 상태였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은 훨씬 생기 있어 보였고, 표정 역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덤덤해 보였다. 진안 군왕을 쓱 훑어보고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이었다.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 어젯밤 자신의 품을 파고들며 흐느껴 울던 모습은 환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밥상부터 차려. 난 씻고 올게.”
정교랑이 반근에게 말했다.
달라졌어.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어젠 이런 말 안 했잖아.
“밥상을 차려라.”
진안 군왕의 명에 마당에 있던 시녀들이 네, 하고 대답했다. 진안 군왕의 착각인지 시녀들의 동작이 전보다 경쾌해 보였다.
식사 준비를 마치고 정교랑이 막 자리에 앉자마자, 소심이 급히 들어왔다.
“부인, 조 집사가 그러는데, 정평이 안 보인대요.”
안 보인다고?
진안 군왕은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조 집사와 정평은 어젯밤 군왕부에서 묵었는데,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안 보여?
소심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도망친 거지?”
정교랑이 물었다.
네, 사실 조 집사는 ‘그 망할 놈이 또 도망쳤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체면이 깎이는 일이잖아요.
“조 집사가 벌써 찾으러 갔어요.”
소심이 즉답을 피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 대답하자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찾는 게 그리 쉽진 않을 텐데.”
정교랑이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반근과 소심이 얼른 따라나서려는데,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가서 찾아볼게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며 말하자, 진안 군왕이 쌀떡 한 접시를 들고 일어섰다.
“엊저녁에도 끼니를 걸렀잖아요. 이거라도 좀 먹고 가요. 왕부 사람들을 전부 보내 찾도록 할게요.”
진안 군왕이 쌀떡 하나를 집어 건네며 말했다. 대청에 있던 시녀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정교랑은 입을 벌려 쌀떡을 받고는,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리고 먹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안 돼요. 그 사람이 숨으려 들면, 찾을 수 있는 이는 얼마 없어요.”
정교랑이 안으로 들어가자, 반근과 소심이 얼른 따라 들어가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진안 군왕도 접시를 들고 따라 들어갔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정교랑은 입에 든 쌀떡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반근이 겉옷을 입혀 주도록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진안 군왕이 쌀떡을 또 하나 건넸다.
소심은 꿇어앉아 옷자락을 정돈하고, 반근은 몸을 살짝 구부린 채 허리띠를 묶어 주었다.
“차도 한 모금 마셔요.”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문을 나서는 정교랑을 보며, 진안 군왕이 시녀의 손에서 차를 낚아채 건네며 말했다. 정교랑이 차를 받아 단숨에 비우고, 진안 군왕에게 찻잔을 돌려주었다.
진안 군왕은 찻잔을 받으며 다른 한 손으로 쌀떡을 또 하나 건넸고, 정교랑은 쌀떡을 먹으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청에 서서 이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경 공공은 어안이 벙벙하여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서문 밖, 조 집사가 말을 타고 허둥지둥 쫓아왔다. 조 집사는 너울을 쓰고 얼굴을 가린 채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옆으로 말을 탄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일찍 도망쳤으니 성문을 열기 전이었을 겁니다. 도망친 걸 알아채자마자 동서남북 성문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전부 못 봤답니다. 아직 성안에 숨어 있을 겁니다.”
조 집사가 말했다.
“아닐세. 이미 성을 나갔어.”
정교랑이 말했다. 그러고는 성 밖을 바라보더니,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을 몰아 달려갔다. 조 집사 등이 부랴부랴 쫓아갔다.
여인이 이끄는 무리가 달려가는 모습은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보이십니까? 저쪽입니다.”
얼마 달리기도 전에, 조 집사가 앞쪽 큰길을 털레털레 걷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걷고 있던 사람이 뒤를 힐끔 돌아보더니,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두 다리가 네 다리보다 빠를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금세 따라잡히고 말았지만.
“이 망할 자식이, 도망치긴 어딜 도망쳐!”
조 집사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정평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도망칠 거면 오는 길에 도망칠 것이지, 이제 와서 도망을 쳐? 여기가 어딘지 몰라? 네가 이러면 우리 아씨의 체면이 뭐가 돼!”
“도망친 거 아닙니다. 도망친 거 아니라고. 경성에 오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잖소.”
정평이 몸을 웅크리며 소리쳤다.
“이런 망할 놈을 봤나, 마음대로 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조 집사가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는 동안 정교랑은 말에서 내려 길가에 서 있었다. 조 집사는 정평을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정교랑 앞으로 끌고 왔다.
“왕비 전하.”
정평은 조 집사한테 붙잡혔던 옷을 정리하며, 태연한 얼굴로 예를 표했다.
“떠나시려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정평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눈을 반짝였다.
“내가 이 길로 가는 건 어찌 알았습니까?”
정평은 정교랑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돌연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아씨는 어떻게 왕부를 나서자마자 곧장 이리로 오신 거지? 다른 길로 가던 나까지 불러들여 돌아오게 하시고.
조 집사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우리 아씨는 당연히 아시지.”
정교랑이 손을 뻗으며 정평 앞에 보여 주었다. 곁에 있던 이들도 호기심을 못 참고 시선을 돌렸다.
정교랑의 손에 든 건 점을 치는 동전 세 개였다.
이거 덕분이라고?
조 집사는 멈칫했지만, 정평은 웃으며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낭자는 역시 나와 같은 부류군요.”
그 말에 여인의 두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어렸다. 정평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다행히 이번엔 정교랑이 이성을 잃고 대성통곡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땅 위로 떨어진 눈물 두 방울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 내게 왜 떠나려 하냐고 물을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정평이 또 웃으며 말했다.
왜?
조 집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정평도 이상하니 아씨도 이상해지시고, 두 사람이 만나면 더 이상해질 수밖에. 못 알아듣는 말은 한마디도 없는데, 합치면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정교랑이 흥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대인도 보셨죠? 그럼 혹시······.”
정평이 손을 들며 정교랑의 말을 끊었다.
“낭자.”
정평은 엄숙한 표정으로 정교랑 손에 들린 동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묻기 전엔 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알 텐데요?”
점괘와 관상을 보고 길흉을 예측하는 일은, 당사자가 아닐 경우 묻지도 않고 말해 주지도 않는 게 원칙이었다.
“더구나 돈도 안 줬고요.”
정평이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정교랑은 눈물이 그렁한 채 웃음을 지었다.
“네.”
예를 표하고 난 정교랑은 다시 고개를 들어 정평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떠나시는 거죠? 경성에 오신 게, 그 사람 때문 아니셨나요?”
내년엔 지금의 황제인 중종이 붕어하고, 새 황제가 즉위한다. 정평 또한 새 황제의 점괘를 봐 주면서 차차 명성을 얻기 시작할 터였다.
역사 속에서 정평이 점을 봐 주었던 평왕은 지금 이미 죽었어. 그런데도 정평은 경성으로 왔고, 또······.
왜 떠나는 거지? 경성에 남아야 하지 않나? 점괘를 보고 명성을 얻어야······.
“그 사람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내가 왜 그 사람 때문에 옵니까? 난 충분히 가졌고 부족한 게 없는데, 왜 그 사람을 찾아오죠?”
정교랑이 정평을 바라보았다.
“나의 재물을 더해 주는 자는 내 정신을 손상시키고, 내 명성을 더해 주는 자는 내 몸을 죽이죠(益我貨者損我神, 生我名者殺我身).”
정교랑의 말에 정평이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쳤다.
“훌륭합니다, 훌륭해요. 훌륭하군요.”
정평은 훌륭하다는 말을 연거푸 세 번이나 말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낭자는 역시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군요.”
정교랑은 웃음을 짓고,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훔쳤다.
이건 선조 대인께서 신분을 밝힌 평왕에게 하신 말씀이야. 그러고는 평왕이 내리는 벼슬을 거절하셨지. 오늘 이런 자리에서 내 입을 통해 말하게 될 줄은 몰랐네.
“더구나 낭자도 있잖습니까. 나까지 꼭 있을 필요는 없지요”
정평이 정교랑을 보고 씩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자, 정교랑이 멈칫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정평이 예를 표했다. 정교랑은 얼른 몸을 틀어 예를 피한 후, 황급히 답례를 올린 다음 앞으로 다가섰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강주로 돌아가세요?”
정교랑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네, 강주로 돌아가야지요. 아, 참. 듣자니 태평관이 낭자 거라던데, 좀 빌려 써도 되겠습니까?”
정평의 물음에 정교랑이 얼른 그러라고 대답했다. 정평이 웃으며 다시 예를 올렸다. 물론 정교랑은 이번에도 몸을 틀며 예를 받지 않고 피했다.
정평은 허리를 펴고 꼿꼿하게 서서,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경외감이 줄어든 대신 아쉬움이 늘어난 표정이었다. 가족과 헤어지기 싫어 매달리는 어린아이 같다고 해야 할까.
정평이 걸음을 멈추고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노자 연구에 진전이 좀 있는데, 낭자도 한번 들어 보겠습니까?”
정교랑은 정평을 보고는 다시금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며 흐르는 눈물을 숨겼다. 정교랑은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허리를 깊이 숙이며 예를 표했다.
“가르침을 주세요, 대인.”
정교랑이 목멘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