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86
교랑의경 86화
“여긴 너무 춥잖아. 아무래도 들어가서 자는 게 낫지.”
주 부인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제가 다 대비해 놨거든요.”
시녀가 마차 안에 있는 난로와 정교랑이 덮고 있는 커다란 두봉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녀의 발도 두봉 속에 있었다. 주 부인이 계속해서 말을 이으려 하자 시녀가 또다시 쉿 하는 동작을 했다.
“바람이 차요. 우선 휘장을 내릴게요.”
시녀가 휘장을 내렸다. 주 부인은 말문이 막혀 밖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부인?”
우산을 들고 있던 여종이 나지막이 불렀다. 들어갈까요? 아니면 여기서 함께 있을까요? 여종이 눈빛으로 묻자 주 부인이 눈을 부라렸다. 눈치도 없는 아둔한 것. 외숙모 노릇을 이따위로 한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텐데! 하지만 기다리자니……. 주 부인은 발을 동동 굴렀다.
“가서 손난로와 발 쬐는 화로를 가져오너라.”
주 부인이 나지막이 명했다.
다행히 시녀의 말은 사실이어서, 여종이 손난로와 화로를 가져오기도 전에 정교랑은 잠에서 깼다. 시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주 부인이 얼른 휘장을 들어 올렸다.
“교교.”
주 부인은 눈물까지 흘렸다.
“여기가, 어디죠?”
정교랑이 시녀가 건네는 뜨거운 물을 받으며 물었다.
“집에 왔어. 착하지, 마차는 추우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마차는, 안 추워요.”
정교랑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하지만 난 춥다고. 주 부인은 발을 굴렀다. 얘는 정말 바보야, 뭐야. 말을 알아듣고 의사를 전달하는 게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단 말이지. 지금 추운지 안 추운지 따지잔 말이 아니잖아.
“그래, 교교. 이제 집에 도착했으니 안으로 들어가자. 눈이 많이 내리잖니.”
주 부인은 어서 가마를 가져오라며 여종들을 재촉했다. 손난로와 화로를 가지러 갔던 여종이 돌아오고 가마도 대령했다. 주 부인이 애걸복걸한 끝에 정교랑이 마침내 마차에서 내렸다.
울거나 떼를 쓰지 않았을 뿐더러 두모 속 표정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오려고 했다는 듯이, 중간에 억지로 끌려온 게 아니라는 듯이. 이런저런 말을 한가득 준비했던 주 부인은 도리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교교,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해.”
주 부인은 자신의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난로며 화로를 전부 가마에 실은 후, 여종들에게 둘러싸여 안으로 들어갔다.
“교교, 진씨 저택의 거처와 똑같이 꾸몄으니 낯설지 않을 거야. 마음에 드니?”
주 부인이 정교랑의 손을 잡고 층계를 오르며 물었다.
“여긴 내 거처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야. 무슨 일이든 편히 말해.”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여종 둘이 왔다.
“부인, 노야께서 오시래요.”
주 부인은 웃으며 정교랑의 손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집에선 마음 편히 가져. 어려워하지 말고. 난 네 외숙한테 가 봐야겠다. 이따 같이 보러 올게.”
말을 마친 주 부인이 여종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정교랑과 시녀는 처음부터 줄곧 말이 없었다. 회랑 아래에 꿇어앉아 있던 여종 둘이 얼른 문을 열었다. 실내의 따뜻한 온기는 회랑에서도 느껴졌다.
“아씨, 들어가세요.”
여종들이 공손히 말했다. 정교랑이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여섯째 공자님, 이게 무슨 일이세요?”
정교랑과 시녀가 몸을 돌렸다. 시녀가 먼저 헙 하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주육낭이 마당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주육낭은 웃통을 벗은 채 싸리나무를 등에 지고 눈 속에 섰다. 주육낭이 몸을 돌리고 서자 탄탄한 등과 싸리나무가 정교랑의 눈에 들어왔다.
“육낭이 세 가지 죄를 지었기에 사죄하러 왔습니다.”
육낭은 포권의 예를 취한 후,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낭자의 병세를 살피지 않고 시녀를 빼앗은 죄가 하나요, 낭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억지로 붙잡아 둔 죄가 둘이요, 낭자가 강제로 이 사죄를 듣게 하는 죄가 셋입니다.”
눈밭에 선 소년의 헐벗은 상반신 위로 어느덧 눈송이가 쌓이고 있었다. 몸 위로 내린 눈이 녹는 속도는 점점 더뎌졌다. 주변에 있던 여종들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덜덜 떨면서 감히 말리지도 못했다.
정교랑은 부끄러운 눈빛이나 피하려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은 채로 소년의 벌거벗은 등을 훑었다.
“나한테 이걸 보여 주려고, 어머니가, 자리를 피하도록 했군요.”
정교랑이 천천히 말하자 주육낭이 몸을 돌아섰다. 역시 바보는 아니었군. 일부러 모친이 자리를 비우게 한 걸 알아채다니.
“난…….”
주육낭은 이를 악물고 돌아서더니 싸리나무 채 하나를 뽑아 몸을 힘껏 후려치며 회랑 아래에 선 여인을 쳐다봤다. 사실 정교랑을 본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미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뜻밖에도 자주 봤던 얼굴처럼 낯이 익었다.
회랑 아래에 두봉을 걸치고 선 여인은 어느덧 두모를 벗은 후였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주육낭을 빤히 쳐다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주육낭의 벗은 가슴을 쳐다봤다.
추워서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주육낭의 가슴 근육은 붉게 달아올랐다. 여인이 저런 눈빛으로 사내를 훑어보는 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주육낭이었다. 보통은 옆에 있는 시녀처럼 손으로 눈을 가리지 않던가. 정교랑은 주육낭의 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아무래도…….”
정교랑은 두봉 속에서 손을 내밀어 손가락으로 주육낭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벗으니까, 못생겼어요.”
주육낭은 자신이 이런 짓을 벌였을 때 처할 상황에 대해 갖가지로 추측했었다. 그 추측 속에서 여인은 울거나 화를 내거나 냉소를 짓거나 비웃는 말을 내뱉었다. 아니면 진 공자처럼 음흉한 마음을 숨기고 웃으면서 겉으로는 화해하는 척, 자책의 말을 늘어놓을 수도 있고.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난 꿈쩍도 안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터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 여인은 울거나 떼를 쓰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초조해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 그 섬섬옥수로 자신을 가리켰다. 넌, 못생겼어! 못생겼다고!
어디가 못생겼다는 거야! 네 눈이 이상한 거지! 아니지, 아니지. 멋있는지 보여 주려던 게 아니잖아!
여인이 계속해서 뚫어져라 쳐다보자, 부끄러운 듯 옆에서 눈을 가리고 있던 시녀도 손을 벌려 손가락 틈으로 훔쳐봤다. 순간 굳은 결심이 와르르 무너진 주육낭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정교랑의 거처가 시끄러워졌다.
“이게 무슨 짓이니, 육낭. 이 추운 날씨에.”
주 부인은 눈물을 보이며 여종들에게 얼른 옷을 입히라고 명했다.
“어머니, 상관 마세요.”
주육낭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이를 악물더니 싸리나무 채를 뽑아 또다시 몸을 후려쳤다. 주 부인과 아랫것들은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우리 아들.”
주 부인이 달려가 주육낭을 끌어안고 빨갛게 부어오른 매 자국을 보며 통곡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주육낭은 늠름한 소년의 몸이었지만 여인 몇 명이 달려들어 실랑이를 벌이는 바람에 결국 싸리나무를 내려놓고 두봉을 걸치게 됐다.
“육낭, 저 애는 네 누이동생이야. 형제자매 간에 말로 못 풀 일이 어디 있어.”
“네가 이런 짓을 벌이면 네 누이만 난처해져.”
“너 때문에 네 누이가 놀랐겠다.”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보이던 주 부인은 정교랑이 시종일관 조용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른 여인이었다면 놀라서 눈물을 보이거나 불안에 떨었을 텐데. 주 부인은 고개를 들고 교교를 부르며 회랑 아래로 눈길을 돌렸다.
회랑 아래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갔지? 주 부인이 멈칫하자 여종 하나가 손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열린 문 사이로 그 안에 앉은 정교랑이 보였다. 정교랑은 시녀의 말을 들으며 실내를 둘러보고 있었는데, 몹시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교교.”
주 부인이 주육낭을 끌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주육낭을 꿇어앉혔다. 상의를 입지 않은 터라 꿇어앉으면서 두봉이 벗겨져 벌거벗은 상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병풍에서 시선을 거둔 정교랑이 다시 손을 뻗어 주육낭을 가리켰다.
“벗고 있네요.”
정교랑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주 부인마저 민망해하며 서둘러 아들을 가려 주느라 말이 꼬이고 말았다.
“너도 참, 이게 무슨 짓이냐. 형장을 짊어지고 사죄하러 오다니. 네 누이가 이런 걸 알기나 하겠어?”
주 부인이 목소리를 깔고 나무라자 주육낭의 얼굴이 붉어졌다.
“진지하게 사과하러 온 거니까, 바보 시늉하지 마!”
주육낭이 몸을 곧추세우며 소리쳤다.
“옷 벗는 게, 사과예요?”
정교랑은 멍한 표정으로 더없이 진지하게 물었다.
“시치미 떼지 말라고!”
주육낭이 벌게진 얼굴로 벌떡 일어서자 주 부인이 얼른 잡아 앉혔다.
“육낭,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얘가 이런 걸 알겠니. 사내 녀석이 이 꼴을 해서 여인의 처소로 달려오니 얼마나 놀랐겠어? 얘가 너 같은 사내인 줄 알아?”
주육낭은 굳은 얼굴로 고집을 부리며 말없이 정교랑을 쳐다봤다. 얘가 너 같은 사내인 줄 알아? 정교랑 역시 주육낭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진 공자가 허벅지를 내리치며 박장대소하는 바람에 탁자에 있던 술잔이 흔들렸다. 방 안에 있는 주육낭은 여전히 상반신을 탈의한 상태였다. 몸종 하나가 등에 난 매 자국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뜻밖이네. 형장을 짊어지고 가 사죄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다니.”
진 공자가 웃었다. 꿇어앉은 주육낭은 연고 때문에 화끈거려서인지 얼굴과 몸에 잔뜩 힘을 주고 긴장한 채였다.
“이 눈보라 속에서 호기롭게 죄를 청하러 갔는데, 어린 낭자한테 희롱당하는 소년 공자가 됐다는 건 더더욱 뜻밖이고.”
진 공자는 잔을 들어 술을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어린 낭자 때문에 소년 공자가 창피를 당해 돌아오다니.”
주육낭 옆에 있던 몸종은 저도 모르게 풉 웃음을 터뜨렸다가 얼른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주육낭은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내저으며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바보 시늉을 하더라고.”
주육낭이 냉소를 지었다.
“그게 뭐 어때서? 자네가 무모하게 막무가내인 시늉을 하니까 저쪽도 바보 시늉을 하는 수밖에.”
“바보 시늉을 하든 말든, 어쨌거나 우리 집으로 발을 들였어.”
진 공자는 주육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놓아두었던 지팡이를 들어 주육낭을 힘껏 내리쳤다. 힘을 주어 때리긴 했지만 주육낭을 다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화들짝 놀란 주육낭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상자, 자네 미쳤나! 날 왜 때려!”
“야만스러워서 때린다.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진 공자 역시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고는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고 지팡이를 다시 움켜쥐었다. 탄탄한 근육을 가진 주육낭이었지만 이유도 없이 맞는 건 물론 원치 않았다.
“왔으면 술이나 마실 것이지, 왜 술주정을 하고 난리야!”
주육낭이 일어서며 몸을 피했다. 그런데도 진 공자는 지팡이를 내려놓지 않고 쫓아가 패려고 들었다.
“이 야만스러운 자 같으니라고, 사람을 업신여겨도 분수가 있지. 내가 괴로워서 그런다! 줘 패지 않고는 분이 안 풀릴 거 같아서!”
소리치던 진 공자는 사환을 부르더니 주육낭을 쫓아가 패도록 자신을 부축하라고 고집을 부렸다. 몸종과 사환은 이 소동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였다. 언제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로 말소리조차 크게 내는 법이 없던 진 공자인데, 갑자기 술주정을 하며 주육낭을 때리니 말이다.
“내가 누굴 업신여겨!”
주육낭 역시 영문을 몰라 소리쳤다. 정말 술이 과해서 이러나? 아니면 집에서 열 받는 일이라도 있었나? 딴 사람 때문에 화가 난 건가?
“자네 말이야, 자네가 날 업신여겼다고.”
진 공자가 소리쳤다. 진 공자는 술기운이 올라와서인지 붉어진 두 눈으로 지팡이를 내던졌다. 물론 주육낭이 지팡이에 맞은 건 아니었다. 주육낭은 한 발 옆으로 비켜서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는, 정 낭자를 업신여겼어. 그건 날 업신여긴 것이기도 하지.”
진 공자가 비틀거리며 소리쳤다. 뭐라고? 주육낭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그 애가 자네랑 무슨 상관인데!”
주육낭이 투덜거렸다. 혹시 저번에 농담으로 한 말에 정말 마음이 동했나? 진 공자가 고개를 들어 주육낭을 쳐다보며 비웃었다.
“그 여인? 그 여인이 곧 나고 내가 곧 그 여인이야. 동병상련의 처지지.”
진 공자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 여인을 보러 가야겠어.”
몸종과 사환은 깜짝 놀랐다. 그건 좀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