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92
교랑의경 92화
아씨는 외모가 출중했다. 말한 적은 없지만 가세도 대단할 것이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의술까지 지녔다. 자신들 같은 천것에게는 하늘처럼 높은 분이니, 교류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누이가 됐다? 말한들 믿을 사람이 있을까? 본인들도 믿어지지 않는데.
“무수, 말했잖아. 오라버니가 갖고 싶을 뿐이라고. 괜한 추측 마. 누이가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거기까지 말한 범강림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우리가 뭘 해 줄 수 있겠나.”
범강림이 거친 두 손을 벌리며 말을 이었다.
“이 목숨? 어차피 누이가 구해 준 거니까, 줘도 그만이야.”
범강림이 서무수를 쳐다보며 덧붙였다.
“자네 목숨은 우리 게 아니라고.”
서무수도 웃음을 터뜨렸다.
“네, 내가 괜한 생각을 했나 보오. 책 몇 권 읽었다는 자부심으로 이치에 안 맞는 일을 보면 괜히 넘겨짚으려 들어 긁어 부스럼일 때가 많습니다. 내가 향칠을 의심하지만 않았어도 그런 오해는 안 했을 거 아닙니까.”
서무수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뒤에서 형제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방이 엄청 많네. 한 사람당 하나씩 써도 되겠어요.”
“잘됐다, 이젠 넷째가 코 고는 소리 안 들어도 되잖아.”
“거 무슨 소리요, 코 골아서 잠 못 자게 하는 게 누군데!”
“난 이 방 쓸게요.”
“여긴 내가 쓸 거야. 넌 다른 방 찾아봐.”
범강림과 서무수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이제, 누이가 생기고 집도 생겼다.
* * *
저녁해가 서산으로 넘어갔을 무렵, 주육낭과 진 공자는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옆을 보니 접시가 여러 개 쌓여 있고 노구솥 안에는 탕이 끓고 있었다.
“재미있긴 하네.”
주육낭의 말에 진 공자가 웃었다.
“풍치 있으면서 소탈하기도 하고.”
“근데 이름을 잘못 지었어. ‘과로신선(過路神仙: 길 가는 신선)’이라고? 무슨 이름이 이래, 우습잖아.”
옆에서 시중을 들던 사환이 웃었다.
“공자님, 이게 길 가던 신선이 주고 간 비방으로 만든 음식이라서 그래요. 관리인 어르신이 미처 음식 이름을 못 물어서 이런 이름을 붙였죠.”
주육낭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기꾼들이 허풍은.”
주육낭이 몸을 일으키자 진 공자도 사환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바깥쪽 대청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화로 주변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있었고, 실내는 음식 냄새와 노구솥에서 나는 수증기로 자욱했다. 문밖에서는 마차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자리가 없어요, 자리가 없다고요.”
입구에 있던 점원은 밀려드는 사람을 막으며 계속 소리쳤다.
“내일 일찍 오세요, 내일요.”
문 앞에 걸린 깃발은 새것으로 바뀌었고, ‘신선거(神仙居)’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먹는 방법이 좀 신선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름까지 바꾸다니. 아버지 대에서 물려준 이름까지 버리면서.”
주육낭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채찍을 받은 후 몸을 훌쩍 날려 말에 올랐다.
“사람 욕심이란 게 원래 끝이 없잖나.”
진 공자는 깃발을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몰며 앞서가는 주육낭을 향해 소리쳤다.
“육낭, 이리 맛있는 음식이면 자네 누이도 좋아할 거야. 내가 여기서 자네 누이한테 식사 대접을 하면 틀림없이 좋아하겠지?”
주육낭이 고개를 돌려 진 공자를 유심히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그 애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니지?”
등을 내걸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온 주육낭은 곧장 정교랑의 거처로 향했다.
“공자님.”
문밖에 선 여종이 불안해하며 예를 올렸다. 정 아씨가 들어온 후, 집안 식구들은 한시도 마음 편할 때가 없었다. 들어오던 첫날부터 추운 겨울날 부인을 반나절이나 밖에 세워 두더니, 육공자가 형장을 지고 죄를 묻는 소동을 벌이게 했다. 간신히 날이 저물자 이번에는 사환이 없어졌다며 자그마치 사흘이나 법석을 떨었으니…….
아이고, 언제나 집안이 좀 잠잠해질지. 육공자가 오다니 이번엔 또 무슨 소동이 벌어질지 모르겠네.
다행히 주육낭은 문 안으로 발을 들이는 대신 마당 문 앞에 서서 안을 쳐다보기만 했다. 방 안에는 등불이 따스하게 켜져 있었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비쳤다. 바둑을 두며 담소를 나누는 듯했다.
“거기 갈 필요 없어. 자네 누이는 자네 집으로 돌아갔을 거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난 알고 싶거든. 그래서 아는 거야. 자네는 알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모르는 거고. 자네가 생각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육낭, 자네 누이를 멀리하면 더 소원해지기만 해. 소통할 생각을 해야 자네를 쳐다보고 자네의 말을 들으려 하겠지. 안 그럼 답이 없어. 다시는 횡포 부리지 마.”
진 공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주육낭은 주먹을 꽉 쥐고는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종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당직 교대를 하고, 나머지 사람들도 흩어졌다.
얼마 안 가 또 다른 형체가 마당 문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형체는 누구에게 들킬세라 이리저리 몸을 숨겼다.
아씨, 이거 드시겠어요? 맛이 없으세요? 아씨, 이렇게 쓰는 거 맞아요?
반근은 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쳐다봤다. 어디선가 본 광경이고 언젠가 들어 본 대화 같았다. 다시 아씨를 보게 됐다. 이제 아씨 곁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지만. 반근은 손수건을 꽉 쥐며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켰다. 시야가 흐릿해진 반근은 차가운 벽을 손으로 짚으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거 누구요?”
문 안에 있던 여종이 눈치를 채고 소리를 빽 질렀다. 반근은 황급히 뒤돌아 후다닥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여종이 등을 들고 나와 문밖을 살폈지만 겨울바람 소리만 쉭쉭 들릴 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이 온 것도 모자라, 이젠 부정한 것들까지 달려드는 건가? 여종은 오싹함에 몸서리를 치며 생각을 떨치려는 듯 퉤퉤 침을 뱉고 문단속을 했다.
날이 환히 밝았다. 주 부인이 대청에 앉아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정교랑이 방에서 나왔다.
“교교, 조봉대부(朝奉大夫) 댁의 부인께서 친히 찾아오셨더구나. 어서 가서 그 댁 어린 낭자가 무슨 병인지 좀 봐.”
주 부인의 말에 정교랑은 주 부인을 힐끔 쳐다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예도 올리지 않고 문후도 여쭙지 않는군. 관두자, 그런 법도를 알기나 하는지 모르지. 주 부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니 널 모셔 가려는 게지.”
주 부인이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안 가요.”
정교랑은 시녀가 건네는 물을 받으며 대꾸했다.
“왜 안 간다는 건데?”
주 부인은 초조했다.
“내가, 왜 가야 하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넌 병을 치료할 줄 알잖아. 너는 신의고.”
“난, 신의가 아니에요. 어떤 병은, 고칠 줄 알지만, 어떤 병은, 못 고쳐요.”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천천히 물을 마셨다.
이게 무슨 말이야!
“교교.”
주 부인은 바짝 다가앉으며 손을 뻗어 정교랑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뒤끝 있게 굴지 말고.”
정교랑은 물잔을 내려놓고 주 부인을 보며 말했다.
“틀렸어요. 뒤끝이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죠.”
주 부인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정교랑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인, 저희 아씨는 오늘 진 노태야 댁에 약을 지으러 가셔야 해요. 번거로우시겠지만 마차 좀 준비해 주세요.”
시녀가 정교랑의 손을 부축하며 말했다.
나더러 마차를 준비하라고? 주 부인은 기가 막혀 시녀를 쳐다봤다. 내가 누군데! 너희는 누구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마차를 준비하지 않으면? 진 노태야 댁에 왕진을 가지 말란 소린데? 내가 진 노태야 댁에 왕진 가는 걸 막는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찌 됐소?”
답답한 마음에 실내를 이리저리 서성이던 주 노야는 주 부인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얼른 다가서며 물었다.
“오씨 댁 부인이 아직 기다리고 있소. 서둘러 짐을 챙겨 따라가라 하시오.”
주 부인은 안색이 어두웠다.
“서두르긴요, 가서 빌기라도 하란 말이에요?”
“무슨 말이오?”
주 노야가 멈칫하며 인상을 썼다.
“안 가겠대요.”
주 부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 가?”
주 노야는 잘못 들었나 하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왜 안 가겠단 거요?”
“안 가겠다는데 그걸 내가 어찌 알아요.”
주 부인이 억울하단 표정으로 덧붙였다.
“묶어서 강제로 데려가기라도 하게요?”
감옥에 처넣는 것도 아니고 병을 치료하는 일이니 강제로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망할 계집.”
사태 파악을 한 주 노야는 분노로 이를 갈았다.
“방금 오 부인한테는 진 노태야 댁에 왕진 갔다고 말씀드렸어요. 오늘은 돌려보냈다 치고, 내일은 어쩌죠? 오 부인은 돌려보냈지만 다른 부인들이 또 찾아오면요?”
주 부인이 자리에 앉았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그래, 다른 일도 아니고 병을 고치는 일이다. 욕하고 윽박지르고 협박해서 데려간다 한들, 고칠 수 있는 병이어도 고칠 줄 모른다고 잡아떼면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 애를 이 집에 데려온 게 엄청난 경사인 줄 알았는데, 이게 뭐예요? 우린 이제 완전히 진씨 가문 눈 밖에 났어요. 진 노태야의 병이 호전되면서 그 애 명성이 더 높아졌으니 찾아오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겠죠. 우릴 찾아오는 것이니 우리 주씨 가문의 일인데, 그 망할 계집이 번번이 안 간다고 해 봐요. 다들 우리한테 분풀이할 거라고요!”
주 부인이 머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럼 어쩌겠소. 내쫓기라도 해?”
주 노야가 언짢은 말투로 대꾸했다.
“내쫓으면 우리 주씨 가문이 뭐가 돼요?”
뭐가 되냐고? 여기저기서 욕을 먹겠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주 노야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으로선 그 계집을 때릴 수도 혼낼 수도 없소. 어르고 달래서 비위를 맞춰야 그나마 쓸모 있게 굴겠지.”
“그 바보가 아주 상전이 됐네요.”
주 부인이 팔걸이 책상에 기대앉아 한숨을 토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주 노야 내외의 당초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대체 어디서 잘못된 거야?
중문 밖으로 나온 시녀는 준비된 마차를 보고 쿡 웃음을 터뜨렸다.
“공자님, 또 우리 아씨의 마부가 되어 주시려고요?”
주육낭은 고개를 돌려 시녀를 힐끔 보고는 옆에 있는 정교랑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곧이어 고개를 돌린 주육낭은 손에 든 채찍을 흔들며 잠자코 있었다. 정교랑 역시 별다른 말 없이 시녀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랐다.
정교랑이 왔다는 소식에 진씨 가문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소식을 듣고 문밖으로 마중을 나오던 진씨 가문 공자들은 마차에 앉은 주육낭을 보며 냉소했다.
“주 공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겠나?”
“됐어, 여기 주 공자는 마차를 지켜야지. 한눈팔다 사람 잃어버리면 어떡해.”
주육낭은 조소와 비아냥거림을 가볍게 무시하고 마차를 몰아 자리를 떴다. 정교랑은 문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진씨 가문 여인들이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특히 가장 먼저 뛰어나온 건 단랑이었다.
“언니.”
쪼르르 달려온 단랑이 정교랑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할아버지랑 나랑 언니 보고 싶어 했어요.”
“날 안 보는 게 제일 좋아.”
정교랑이 말했다. 이때 여종들에게 둘러싸여 나온 진 부인이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마침 모시러 가려던 참이었어요.”
진 부인은 정교랑과 나란히 걷고, 나머지 낭자들은 몇 걸음 뒤에서 걸었다. 낭자들은 정교랑의 옷이며 머리 양식을 꼼꼼히 뜯어보며 속삭였다.
“왜 안 보는 게 좋다는 거야? 돈 벌면 좋잖아?”
옆에 있던 낭자가 눈을 흘겼다.
“정 낭자는 의원이잖아. 의원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겠어?”
낭자들은 그 의미를 퍼뜩 깨닫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정 낭자도 참, 몇 마디 더 해 주면 어디가 덧나나.”
“우리가 말이 너무 많았던 거지. 열 마디를 떠들어도 진짜 핵심은 한 마디 정도잖아.”
먼저 말했던 낭자가 대꾸했다.
“그야 상대가 못 알아들을까 봐 그렇지. 그럼 오해를 사잖아.”
누군가가 반박하고 나섰다.
“오해하면 뭐?”
먼저 말했던 낭자가 쏘아붙이자 상대는 말문이 막혔다. 하긴, 오해하면 어쩔 텐가. 병이 중한데 치료할 생각이면 와서 빌지 않고 배겨?
“정 낭자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그 말도 이해하겠지. 정 낭자를 이해 못 하는 사람은 정 낭자가 신경 쓸 바 아니고.”
진씨 가문의 낭자는 진 부인과 함께 진 노태야의 거처로 간 여인을 보며 감탄 어린 말을 내뱉었다.
“저리 자유롭게 살다니, 무슨 바람이 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