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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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자는 가벼이 대꾸했다. 뒤에서 그 표정을 짐작하긴 어려우나, 목소리의 톤으로 들어 아마도 남자는 웃고 있으리라고 여자는 추측했다.
“로제펠트는 죽어 마땅한 자였어. 무고한 소년들을 고문하고 세뇌시킨 후 죽음으로 내몰고, 희생된 소년의 목숨값으로 돈을 벌던 자였지. 그런 범죄자가 죽어 나자빠지다니, 속이 다 시원하군.”
그런 남자의 말에, 여자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남자가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곱씹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아니, 일이라기보다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팁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리라.
남자는 웃는 낯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는 자동적으로 돋아 오른 소름을 감추기 위해 경직된 열중쉬어 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군인 출신이로군.”
“그렇습니다.”
이 말에는 대답을 해도 된다. 아니, 대답을 해야 한다. 여자는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눈치를 보지 않는 척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당연하지만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어느 정도 진행됐지?”
의문문. 대답한다.
“교단 외부는 물론이고 교단 내부에서도 교단과 로제펠트의 관계성을 증명하는 건 완전무결하게 불가능합니다.”
“그런가. 괜찮군. 다른 파벌과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함정이다. 남자는 그런 걸 현장의 독단으로 처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자는 그런 공작은 벌이지 않았으며, 남자의 방금 발언은 혼잣말로 판단해 대답하지 않았다.
정답이었다.
“그렇다면 TV를 통해 인류연맹에서 아무리 프로파간다를 흩뿌려도 아무런 의미도 없겠어.”
남자가 지금 보고 있는 TV를 통해 예의 프로파간다가 선전되고 있었다. 인류연맹 소속의 대변인이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최악의 범죄자 로제펠트 합트크누플이 척살되었다. 그놈은 교단과 연결 고리가 있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겁니다.”
여자는 단언했다.
“그렇지. 교단의 이미지 메이킹은 완벽하니까.”
남자는 끌끌거리며 혀를 찼다.
“외부의 적이 좀 위협적인 면이 있어야 우리도 내부 결속을 좀 할 텐데. 저래서야 안 되겠어. 차라리 만마전의 녀석들을 지원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
뭔가 중요한 내용이 나온 것 같지만, 여자는 흘려들었다. 남자 밑에서 오래 살아남는 법은 못 본 척, 못 들은 척, 눈치 못 챈 척하는 것이다. 이 삼원칙을 지켜왔기에 여자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어쨌든 이번 녀석은 좀 씹어 먹을 거리가 있어 보이는군. 어포슬을 상대로 살아남다니 대단한 녀석이야.”
이번 녀석. 로제펠트를 파견한 원인. 남자가 직접 행사한 [지배의 권능]을 풀어버린 대상.
여자가 생각하기에는 반드시 파멸시켜야 할 상대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견 따위를 제시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쩌시겠습니까, 따위의 질문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저 여자는 남자의 이어질 말에 집중했다.
“주시 대상에 포함시켜 둬.”
“주시 대상에······.”
말입니까? 하고 되묻고 싶은 충동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주시 대상에 포함하라는 건 사실상 그냥 놔두라는 소리다.
어째서? 놈은 교단의 위협 세력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있었다. 조금쯤 소란을 일으키더라도 지금 당장 처치하는 것이 정답이다. 여자는 그렇게 진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여자는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했다.
“······포함시켜 두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돼.”
남자는 여자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끌끌 웃었다.
“네 맘대로 처리하지 말고, 내 말대로 하라고.”
“알겠습니다.”
여자는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미래에 교단을 위협할 수도 있을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보다는 당장 자기 목숨과 안위가 훨씬 중요하다고 말이다.
***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옥좌에, 악마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악마라고 해도 겉보기에는 천사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반짝이는 아름다운 백금발에 수염은커녕 모공조차 눈에 띄지 않는 백자 같은 피부, 그리고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눈동자. 높은 콧대에 도톰하고 붉은 입술.
보기 좋게 부풀어 오른 가슴과는 정반대로 내장이 있긴 한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쏙 들어간 배와 허리. 쭉쭉 뻗은 긴 팔과 다리에는 잡티 하나 끼어 있지 않았고, 손가락은 물론 발가락마저도 매혹적인 곡선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매력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형상화해 놓은 것 같은 외견을 취하고 있었으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이 악마는 인간을 유혹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었기에 스스로의 외모를 이렇게 조형해 놓은 것이 불과하니.
“그것도 옛일이지.”
악마는 더 이상 스스로를 다듬을 필요가 없어졌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했다. 단순한 취미의 영역이라 부르기엔 들이는 노력이 지나치게 많지만, 이 외모를 통해 무언가를 얻는 일은 특별히 없으니 역시 취미의 영역이었다.
“하긴, 하는 일이 특별히 없으니 여흥 삼아 하는 짓이지.”
손톱을 다듬으며, 악마는 혼자 쿡쿡 웃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난 후, 악마는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다듬은 손톱을 확인했다. 갈라진 곳 하나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마치 생산된 반도체를 검수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악마는 큼큼, 목소리를 한번 가다듬고는 천상의 노랫소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들어와라.”
그러자 문이 열렸다. 악마가 앉아 있던 옥좌와 마찬가지로 반짝이는 보석과 황금으로 치장된 문이었으나, 그 문을 통해 들어온 것은 어울리지 않게 시커먼 것이었다.
“얼른 문을 닫아.”
그 시커먼 것을 본 악마는 불쾌한 듯 지시했고, 들어온 자는 그 지시에 따라 문을 닫았다. 그제야 들어온 자에게서 시커먼 것이 벗겨졌다.
회색 천으로 몸을 감싼 그자는 악마와 달리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과거에는 다소 미색이 묻어나는 외모였을지도 모르나, 스트레스와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주름지고 눈 밑은 거뭇거뭇해 보기 딱할 정도였다.
이 공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신이라는 생각에, 악마는 즐겁게 웃으며 방문객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내게 무슨 소식을 가져왔지? 타락한 천사여.”
타락한 천사. 악마에게 있어선 아슬아슬하게 욕설이 아닐 그 호칭은 눈앞의 상대에겐 그저 사실의 나열일 뿐이었다. 회색 천 밑에 숨겨진 것은 다름 아닌 뜯겨진 빛의 날개였으니까.
자신의 주인에게 멸칭으로 불렸음에도, 타락한 천사는 익숙하게 그 호칭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그저 악마의 지시를 수행할 따름이었다.
“로제펠트 합트크누플이 죽었습니다.”
“로제펠트가?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로군. 그는 성실한 계약자로 내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는데. 고인의 명복을 빌도록 하지.”
“그리고 그 건에 대해 연락이 한 건 있었습니다.”
타락한 천사는 인벤토리에서 밀봉된 편지를 꺼냈다. 스킬로 봉해진 그 편지는 정당한 수신인이 아니고선 그 누구도 읽을 수 없다. 악마는 타락한 천사의 손에 들린 편지를 염동력으로 끌어와 자신의 앞에서 펼쳤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입술을 찡그렸다. 불을 일으켜 곧장 편지를 태워 버린 악마는 뱉듯이 지시했다.
“남작급을 셋 보내.”
그런 악마의 지시에, 타락한 천사는 우물쭈물하며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디 명확한 지시를.”
“하, 그랬지. 넌 독심술을 못 썼지.”
물론 악마는 그 사실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저 심술을 부린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심술 때문에 타락한 천사의 얼굴은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타락한 천사의 그 표정을 보며 기분이 조금 나아진 악마는 종이를 한 장 꺼내 손바닥으로 슥 만졌다. 그러자 종이 위에 멋대로 문장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악마는 문장이 나열된 종이를 타락한 천사에게 던져주었다.
“그대로 이행하도록.”
“알겠습니다.”
타락한 천사는 도망치듯 방을 나섰다. 방 밖에 도사리고 있던 찐득거리는 시커먼 것이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휘감았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것들 사이로 몸을 던졌다.
***
이진혁이 명화 ‘고요하고 안정된 광기’로 들어간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흘렀다.
“선배, 어쩌면 일 년 이상 안 나올지도 몰라.”
이미 한 번 당해본 적이 있는 안젤라가 가장 먼저 그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어.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안제, 우린 마스터께 여기에서 잘 놀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어.”
어느새 안젤라와 말을 튼 케이가 그렇게 말했다.
“케이 누나 말이 맞아. 안제 누나. 로드 뜻대로 우린 여기서 잘 놀고 있어야 해.”
키르드도 한마디 보탰다. 그도 케이나 안젤라와 말을 튼 상태였다. 같이 노는 데는 그게 더 편하다는 안젤라의 제안으로 이뤄진 일이었다.
“게다가 그 말을 꺼낸 타이밍이 안 좋잖아. 룰렛 숫자가 안 좋게 나오자마자 그런 말을 꺼내다니 설득력이 없어도 너무 없어.”
키르드는 팩트를 안젤라의 명치에 쳐 박았다.
“큭!”
안젤라, 케이, 키르드. 세 사람은 지금 [인생게임] 중이었다.
[인생게임]은 안젤라가 인류연맹 통신용 디바이스의 경매 기능을 통해 충동구매 한 것으로, 구 지구 인류의 인생을 모사해 놓은 보드 게임이었다.룰렛을 돌려 입학을 하고, 룰렛을 돌려 직업을 얻고, 룰렛을 돌려 배우자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인생의 종착점에 도착하면 점수를 계산해 승패를 겨룬다.
그리고 안젤라는 방금 교통사고를 당했다. 물론 게임 안의 이야기다. 이번 게임은 꽤 아슬아슬하게 진행되고 있었기에 꽤나 치명적인 사고였다.
여담이지만 처음 이 게임을 할 때 케이는 교통사고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안젤라가 마차 같은 거에 사람이 치인 사고라고 설명하자, 마차가 뭐냐고 물었었다. 물론 게임을 시작한지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질문은 하지 않는다.
안젤라는 문득 일주일 전이 그리워졌다.
“일주일 전에는 나한테 높임말 썼으면서······.”
“말 놓으라고 한 건 안제야.”
태클은 곧장 날아왔다. 케이로부터였다.
“그건 그렇지만······.”
“설령 그만 놀고 어떤 다른 걸 해본다고 하더라도 이 게임은 마치고 하면 되잖아?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키르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젤라를 달랬다. 물론 그 내용은 안젤라의 꼼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말이다.
문득 안젤라는 서러워졌다.
사실 솜씨 능력치를 잘 활용하면 이런 게임 일방적으로 해먹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안젤라의 솜씨 능력치쯤 되면 이깟 룰렛, 열 바퀴를 돌리더라도 원하는 위치에 핀이 멈추도록 힘 조절이 가능하니까.
문제는 이 [인생게임]이라는 아이템이 [유물]급이고, 플레이어의 스킬과 능력치의 개입을 무효화하는 특수한 기능을 부여받았다는 점이었다. 이는 [공평한 게임]이라는 옵션으로 제공되고 있었다.
이런 옵션이 있는 편이 더 재미있을 거란 생각에 유물 아이템 경매에 참가했었고, 안젤라는 경매에 승리해 이 아이템을 손에 넣었다.
달리 입찰자가 없어서 만약 안젤라가 입찰하지 않았다면 유찰될 물건이었다는 점에서 승리라는 단어는 조금 안 어울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녀는 승리했다고 느꼈고 그렇기에 기뻐했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평범한 [인생게임] 쪽이 더 나았으리라.
아니, 이깟 게임 좀 져줘도 된다. 뭘 걸고 하는 내기 게임도 아니다. 패배에 아무런 페널티도 없었다. 사실은 일부러 좀 져주면서 애들과 친해질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산 게임이었다.
하지만 안젤라는 사흘 전부터 한 판도 못 이겼다. 승리가 고팠다. 한 번이라도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이 게임 산 거 나야! 내 돈으로 산 거라고!”
그녀는 결국 추해지고 말았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싸해지고,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본래 의도와 정반대로, 최악의 결말에 이르렀다.
이러려고 산 게임이 아닌데. 이러자고 하잔 게임이 아닌데. 그녀의 두 눈망울에 눈물이 차올랐다. 한번 서럽다고 생각했더니, 한없이 서러웠다.
“뭐야? 안젤라, 왜 울어?”
그때였다. 구원의 손길이 찾아든 것은.
이진혁의 목소리였다.
“선··· 배!”
뒤를 돌아보자 이진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막 ‘고요하고 안정된 광기’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안젤라는 이진혁에게 와락 안겨 들었다. 그리고······.
“으아아아앙!!”
오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