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20
19장. 또 다른 변화
“가방 주세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무겁잖아요. 그리고 제 손도 무안해지구요.”
“…….”
그녀가 날 봤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다.
단 한 번도 직접 이렇게 마주한 적 없던 그녀의 눈빛은 상상 이상이었다.
군계일학이라는 한자가 생각났다.
이 버스 안에서 그녀만 홀로 아름다웠다.
지방 소도시에 살면서 피부는 태양 한 번 본 적 없는 이조백자 빛깔이었다.
눈은 컸고 가지런하게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칼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키는 167센티미터 정도.
교복은 그녀를 위한 맞춤 정장 같았다.
남학생들 모두 그녀에게 관심 있지만 다가갈 수 없었다.
과거 나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죽어 보니 알겠더라.
인생 참 짧고 허망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두근! 두근! 두근!
왜…….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모르겠다.
아마 첫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남자는 첫사랑을 만나면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 몇 명의 여자 친구를 사귀어 봤지만 첫사랑 그녀를 생각하는 감정 이상은 없었다.
함께 해보지 못했기에 환상이 더 컸을 것이다.
유독 홀로 이 버스를 지배하는 그녀였기에 더 그랬다.
32번 버스의 종결녀.
이예린.
여주인공과 성만 빼고 이름이 같았다.
“고마워요.”
세상에! 그녀가 날 향해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보이는 미소.
살인 미소다.
“힘든 세상 서로 돕고 살아야죠.”
내 말에 빙긋 그녀가 웃기만 했다.
첫 단추는 성공이었다.
그녀가 항상 섰던 그 앞자리로 이동하는데 무려 십몇 년이 걸렸다.
“장태산입니다.”
“네?”
“제 이름이 장태산입니다.”
“……네.”
뜬금없지만 난 내 이름을 밝혔다.
다시 허무하게 첫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내 이름도 알리지 못한 채 죽는다면 다시 온 보람이 없었다.
부우우우웅.
버스가 출발했다.
오늘도 내 다리 위에는 다섯 개의 가방이 놓였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내 첫사랑의 가방이었다.
여자가 괜찮으면 그녀의 액세서리도 예뻐 보인다는 과거 대학교 동기 녀석의 말이 떠올랐다.
이어폰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나왔다.
“Yesterday, all my troubles seemed so far away. Now it looks as though they’re here to stay…….”
듣고 있으면 눈가에 촉촉해지는 가사.
비틀즈는 감성 천재였다.
창밖을 봤다.
어느새 누렇게 익어가는 벼들이 들판을 메우고 있었다.
잊었던 목가적 풍경은 나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몸은 청춘이지만 마음은 고달픈 시대를 살았던 청년이었다.
아직도 난 2020년 어느 날을 헤맸던 그 버릇이 남아 있었다.
***
‘장태산…….’
예린은 자신의 가방을 받아들고 창밖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는 태산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바라봤다.
태산의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예스터데이의 음률은 창밖 풍경과 잘 어울렸다.
‘변했네. 많이…….’
예린도 태산을 알고 있었다.
작년부터 같은 버스에 타기 시작한 장주고 남학생으로 키가 살짝 크고 마른 체격에 언제나 어깨를 구부리며 자신감 없는 모습을 하던 남학생.
별반 특색이 없었다.
마음은 친절해 여학생들 가방을 받아주었다.
말수는 거의 없었다.
혼자 창밖을 보며 음악을 듣는 게 전부였다.
가끔 예린을 바라보는 눈빛이 남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버스에서 태산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많이 변했다.
체격도 훌쩍 커졌고, 눈빛도 당당함이 가득했다.
분위기도 또래 고등학교 남자 아이들과 달랐다.
마치 아버지처럼 묘하게 안정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가방을 처음 받아주었고 이름도 말했다.
웃는 모습이 느끼하거나 특별히 예린을 신경 쓰지도 않아보였다.
이제 곧 수능이었다.
그리고 올 연말이면 아버지와 함께 다시 서울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묘하게 변한 장태산.
예린은 다시 한 번 자신도 모르게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
“불쌍한 새끼, 오자마자 시험이네. 크크크.”
“또라이 같은 새끼. 나 같으면 병원에 처박혀서 시험 끝나면 나오겠다.”
“아쉽네……. 이 새끼 병실에서 음료수 빼앗아 먹는 즐거움도 이제 안녕이잖아.”
“아오! 특실 간호사 누나 전번도 못 땄는데! 이 자식은 학교는 왜 오고 지랄이야!”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대선이, 종석이, 형철이, 도중이, 봉석이와 희철이가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나를 포위했다.
예전 같았으면 뒤통수를 갈길 녀석들이 뇌진탕이라는 병명 때문인지 조심했다.
아니 일진들을 작살냈던 내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이제 장주 고등학교 짱은 나였다.
친하지 않았던 녀석들조차 눈빛으로 호의를 보였다.
쓰레기를 치워 준 고마움이 담겼다.
학교 공기가 깔끔해졌다.
쓰레기들이 모조리 사라진 학교는 분위기가 달랐다.
각 반의 암적인 놈들이 숨을 죽일 것이다.
홍성현이 어떻게 갔는지 똑똑히 봤을 것이다.
자유의 향기가 학교를 감돌았다.
아! 좋다.
“별일 없었지?”
“별일 있었지.”
내 물음에 희철이가 답했다.
이를 닦지 않았는지 이 사이에 빨간 고춧가루가 보였다.
더러운 자식.
머리도 며칠째 감지 않은 듯 떡이 졌다.
“무슨 별일?”
자리에 앉으면서 희철에게 물었다.
별 기대도 없었다.
“니가 없는 학교는 천국이었다.”
“지랄~.”
“켈켈켈.”
이런 대화가 왜 웃기는지 몰라도 희철이는 자지러졌다.
욕을 처먹어야 다들 사랑받고 우정이 넘치는 줄 안다.
정신연령 삼십 대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때는 욕이 없으면 말이 안 됐다.
씨나 개로 시작하는 언어가 접두사나 접미어, 감탄사 등등으로 분화되어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미친.
“야! 닥치고 공부 좀 하자! 오늘 중간고사잖아. 이 꼴통들아!”
중간고사에 예민한 어떤 놈이 소리쳤다.
“인마. 이제부터 해봐야 늦었어. 그냥 태산이처럼 포기하고 놀아.”
과거에 나는 반에서 발가락과 손가락 개수를 합친 등수쯤에서 놀았다.
하지만 오늘부터 포기라는 말은 사양이었다.
과거의 내가 아니라는 걸 백날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실력을 보여주면 끝이다.
친구들을 무시하고 자리에 앉아 창밖을 봤다.
색색이 물들어가는 교정은 학교의 역사만큼이나 볼만했다.
학교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드르르르륵.
앞문이 힘차게 열렸다.
타다닥 소리를 내며 애들이 자리에 앉았다.
“사랑하는 내 새깽이들~. 시험공부는 다 끝냈지?”
담임 찌빠 쌤이 활짝 웃으며 들어왔다.
2학년 문과 다섯 반 중에서 꼴찌가 우리 반이었다.
홍성현의 폭력질로 학업 분위기를 많이 흐렸었다.
“…….”
쌤의 질문에 애들은 침묵으로 맞섰다.
“그래 그래. 이번에는 이 담임 얼굴에 어떤 놈이 똥칠할지 잘 지켜보마. 그리고 나중에 청첩장 꼭 보내라. 마누라 얼굴이 어떤지 3만 원 내고 꼭 확인할 테니까!”
쌤이 웃으며 한 경고가 반 아이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지역 명문이어도 이 안에서 우열은 나뉜다.
다들 대충해도 지방대는 갈 실력은 됐다.
하지만 학교 명예를 위해서는 IN 서울, 그것도 한국대, 고영대, 연지대 간판이 필요했다.
“태산이는 괜찮지?”
“넵! 선생님 덕분에 아주 팔팔합니다!”
“그래. 수고했다. 내 새끼.”
그거면 됐다.
병실에 무려 일곱 번이나 찾아와 미안하다고 말했던 빽 없고 힘없는 쌤이었다.
사립학교 선생님 자리는 그런 자리였다.
이사장 눈 밖에 나면 평생 피곤한 준 비정규직이었다.
“다들. 시험 잘 보거라. 이때가 그리울 걸 나중에 깨닫고 후회하지 말고.”
“네에에에!!”
애들은 소리쳐 답했다.
하지만 저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이는 이 교실에서 쌤과 나밖에 없었다.
사회에 나가는 순간 얼마나 냉정한 잣대로 평가를 받는지 말이다.
출신지역, 출신학교 그리고 스펙에 외모까지 모든 것이 비교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학창시절이다.
내가 죽을 때 분명히 찾아왔을 친구들은 여기 있는 녀석들 밖에 없을 것이다.
중간고사 시험이 시작됐다.
‘훗, 이거 완전 껌인데?’
1교시 수학 시험지를 받아드는 순간 난 웃었다.
과거와 다른 또 다른 하루는 계속됐다.
나는 빠르게 수학 문제를 격파해 갔다.
# 20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