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630
631장. 조우 (2)
“윤 수석, 어떻게 됐나요?”
“경찰과 검찰, 그리고 국정원에 지시해 놨습니다. 곧 연락이 올 겁니다.”
“주 선생님이 특별히 부탁한 겁니다. 실수가 있으면 안 됩니다.”
청와대 비서실장실.
새로 임명된 비서실장 공길춘.
그는 과거 검사 시절 즐겨 입던 청색 양복을 입고 특유의 느린 말투로 지시를 내렸다.
손에 들린 청와대 수첩에는 일상적인 내용을 비롯해 업무에 관련한 메모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동그라미가 그려진 메모 하나.
선생님 말씀, 그리고 ‘장태산’이라는 이름.
“명심하고 있습니다.”
며칠 사이로 같은 때 임명된 민정수석 윤병운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대답했다.
검찰 대 선배이자 정치 감각이 뛰어난 비서실장을 존경했다.
앞으로 롤 모델로 삼아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 생각했다.
한국대 법대 선배로서 이 나라 최고 권력의 오른팔에 오른 사람이었다.
민주 정권 당시 정치권에서 물러났지만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 주순자를 통해 발탁되었다.
그 점에서 윤병운도 공통점이 많았다.
윤병운의 장모와 공길춘의 아내가 친분이 두터웠다.
주순자와도 오래전부터 교류해 왔던 사이다.
그 모두의 공통점은 찬병원을 애용하는 VIP라는 점.
여자들이 만들어 낸 남자들의 화려한 권력.
과거 정권 당시 패배의 쓴 맛을 봤던 이들이 다시 승리자가 되어 청와대 심처를 차지했다.
“국민들을 너무 풀어놨어요. 정치에 무지했던 국민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설치니 국가 경영이 엉망이 되는 겁니다. 여론의 고삐를 다시 당겨야 합니다. 명령이 떨어지면 대통령 각하를 모시는 아랫사람으로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충정을 바쳐야 합니다. 그게 이 조국이 발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공길춘은 대통령 각하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과거 시절 자신을 권력의 정점에 올려놨던 독재자의 딸이 이 나라의 주인이 됐다.
이제 다시 찾아온 영광.
과거 독재시절 조국을 위해 온 열정을 쏟으며 최선을 다해 살았다.
정권에 저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처넣었다.
평등과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빨갱이를 만들어 처넣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던 시대.
빽 없고 힘 없는 지식인 몇 명 골라 처넣으면 그 효과는 극대화됐다.
배 곯던 놈들 먹고 살 만하게 만들어 놨더니 나중에는 곳간을 털어 먹으려고 드는 격이라 생각했다.
공길춘의 생각은 확고했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들은 국가에서 요구하는 세금 잘 내고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 그만.
나랏일에는 곁눈질도 할 필요가 없는 말 잘 듣는 국가의 일꾼으로 살면 됐다.
“실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뭣도 모르고 헛소리해 대는 방송인들부터 골라내 입에 재갈을 물리겠습니다.”
윤병운이 맞장구를 쳤다.
공길춘 실장의 의견에 공감했다.
국민은 적당한 때 배고프지 않을 만큼 먹을 것만 던져주면 조용한 개돼지들이다.
굶기지만 않으면 주인에게 충성하는 가축 정도로 생각했다.
“리스트 작성하세요. 입에 재갈 물리는 걸로 끝내지 말고 제대로 채찍질을 하세요. 적당한 공포는 정치를 하는 데 부드러운 윤활유가 됩니다. 특히 언론 통제 잘하세요. 청와대 권위에 도전하는 언론사나 기자들은 절대 출입 금지 시키세요.”
“조치하겠습니다.”
공길춘의 시대를 거스르는 명령은 계속 됐다.
윤병운은 전혀 거부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은 공안 검찰 출신들로 손발이 아주 잘 맞았다.
국민을 발바닥 밑에 깔고 권력을 누리며 상전으로서 군림했던 인사들.
무소불위의 공권력을 행사했던 권위주의가 몸에 잘 배어 있었다.
정치 후진국이 되어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최고 권력에 아부하며 개인의 욕망을 채우는 데 급급해 국민의 안위 같은 것은 뒷전이었다.
무조건 타인을 짓밟고 피라미드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려 안간힘을 쓰는 종자들.
지난 정권 당시부터 이미 썩은 물이 되어 버린 정치계.
대통령을 정점에 세우고 그 주변으로 포진해 기생하기 시작한 기생충들.
현 정권에 들어 제대로 그 판이 자리를 잡아갔다.
“윤 수석, 잘해봅시다.”
여러 의미가 복합적으로 담긴 공길춘의 말.
머리에 듬뿍 바른 포마드가 조명에 유난히 번들거렸다.
“걱정 마십시오. 검찰과 사정 라인은 모두 뜻대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윤병운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만만했다.
과거 정권 당시 대통령과도 강단 좋게 토론에 임했던 그였다.
번득이는 머리 하나 믿고 오늘 이 자리까지 올랐다.
권력이 주는 단맛을 제대로 알고 있는 윤병운.
‘장태산……. 너 딱 걸렸어.’
그렇지 않아도 언제가 한 번은 찬병원 문제로 손을 보려던 참이었다.
VIP에 대한 대접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던 찬병원.
그런 알짜 병원이 장태산으로 인해 시끄러웠다.
동대학 후배인 데다 최연소 합격이라는 타이틀도 빼앗아 갔다.
자신보다 한 수 위인 천재로 회자되고 있는 상황.
주순자 쪽을 제외하고도 앞서 여러 인사들의 청탁이 있어 왔다.
미국에 처음부터 책을 잡혔던 지난 정권과 달리 이번 정권은 미국에 있어서도 입장이 달랐다.
무엇보다 단순한 현 정권의 주인.
알만 한 인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예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머리가 없는 대통령에 그 사실을 철저히 이용해 조종하는 주순자.
이런 마당에 권력의 가장 날카로운 칼인 검찰을 손에 쥔 윤병운이었다.
그 어떤 상황이 닥친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보란 듯이 멋지게 휘두르게 될 칼.
점잖게 공길춘을 향해 고개 숙인 그의 안경 너머에 감춰진 두 눈.
그의 눈빛이 사악하게 번뜩였다.
***
‘실장?’
돌아서던 장태산이 전화 한통을 받았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호기심을 보이는 아유라.
한번쯤 장태산을 만나기 위해 기회를 노렸다.
장태산이 연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학교에서 몇 번 스치기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말을 걸어보거나 다가가지 못했다.
그의 곁에는 항상 아유라가 접근하지 못할 만큼 잘난 여자들이 북적였다.
법대를 뛰어넘어 예술대까지 장태산의 인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다방면에서 만능이었다.
아무도 아유라의 마음을 몰랐고 오랫동안 속만 태웠다.
경영학과 친구인 강현수만이 넌지시 충고했다.
장태산한테 괜히 마음 주고 깊이 빠지지 말라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간간이 들려온 신화적 사건들.
학업에 몰두하며 아유라는 암암리에 장태산의 덕을 많이 봤다.
장태산이 수업 시간에 언급했던 내용들을 떠올려 가족에게 어필했다.
미국이 양적 완화를 개시해 환율이 안정될 거라는 등의 얘기.
대신 학생의 발언이 아니고 경영학과 교수님이 발언한 내용이라고 돌려 말했다.
그런 아유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아버지.
그 덕분에 오양 식품은 상당한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수출이 주력인 기업은 환율 문제에 민감했다.
오양 식품은 파생 금융 상품인 키코에 가입하지 않았다.
수백 개 기업이 수조 원대 손해를 봤던 대표적 은행의 금융사기.
천운인지 그 사기에 걸려들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이후 이동진 교수를 오양 식품 경영 고문으로 임명했다.
그 이후부터는 공식적인 조언을 받아 어려운 환경에서도 환율로 이득을 냈다.
그러면서 아유라의 입지도 곤고해졌다.
올해 석사 과정을 마치면 회사의 중요 직책에 임명될 예정이다.
그 전에 더 미루지 않고 장태산과 인연을 만들고 싶었던 아유라.
우연을 가장한 필연 만들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통화를 하며 아유라를 돌아보는 장태산.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조용한 장소로 이동하는 장태산.
방금 전과 달리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아유라는 아쉬움을 감추며 멀어지는 장태산을 바라봤다.
일에 있어 진지하고 젠틀한 멋진 남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더욱 욕심이 났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녹록지 않았다.
봐줄 만한 외모와 학벌.
거기에 오양 식품 사주 일가 구성원이라는 매력적인 조건.
그것들 중에 아무것도 장태산의 관심을 얻지 못하고 있어 아예 무용지물이었다.
“휴우.”
짧게 한숨을 내쉬는 아유라.
힘이 쭉 빠진 처진 모습.
또각또각 경영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
–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간간이 도움을 받아온 조력자의 목소리였다.
전하는 말로 조직 개편에 이상이 있는 것이 확실했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당연한 수순일 터.
국정원 차장에서 2인자인 차관급 기획조정실장 자리까지 오른 정국종 실장.
못내 아쉬웠다.
적의 목에 걸린 방울 같은 역할을 그가 도맡고 있었다.
그 덕분에 중국에서 보낸 킬러들 정보도 쉽게 얻었다.
홍콩에서는 블랙 요원 김한별 덕분에 목숨도 부지했다.
장주시 시장을 비롯해 국회의원들 비리 관련 내용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전방위적으로 도움을 주었던 그였다.
“새로운 라인이 들어오는 겁니까?”
– 대표님, 아니 회장님 덕분에 기획조정실장까지 올라갔지만 제 능력이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 새로 임명된 민정수석 윤병운 검찰 라인이 핵심을 접수했습니다.
정국종을 위해 손대균 선배에게 청탁했다.
어차피 사상이야 검증을 끝낸 상태였고 나머지는 돈 문제였다.
차장을 실장급까지 올렸다.
그 돈 값은 충분히 했다.
“검찰이 국정원까지 통제합니까?”
– 공길춘 비서실장을 비롯해 청와대 핵심 요직이 모두 검찰 출신입니다. 당연히 정보를 쥐고 있는 국정원을 그냥 놔두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아킬레스건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으니 더 말입니다. 검찰 출신 인사들이 국정원에 10여 명 파견됐습니다. 모든 정보가 그들에 의해 통제되기 시작했다고 봐야 합니다.
이래서 나라가 더 개판이 됐던 거다.
청와대 심처부터 시작해 국회의원 상당수가 검사, 그것도 과거에 이름을 날리던 악랄한 공안 검사들이 다수다.
권력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 개가 된 자들.
조근영 정부 운영 형태는 지난 생과 똑같은 패턴으로 흘러갔다.
“술자리 한 번 제대로 못 가져 아쉽습니다.”
거래를 통해 정보를 얻어왔지만 상당히 많이 도움이 됐던 정국종이었다.
– 제가 대접하고 싶지만…… 지금 상황이…….
말끝을 흐리는 정국종 실장.
뭔가 있는 게 분명했다.
“말씀하십시오.”
– 조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국정원뿐만 아니라 검찰, 경찰, 국세청까지 전방위적으로 회장님 정보를 캐기 시작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진심어린 경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조직적이었다.
머릿속에 몇 몇 인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주순자입니까?”
– 알고 계셨습니까?
맞았다, 주순자.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동룡 건으로 주순자 심기가 불편할 겁니다.”
–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주순자에 관련한 비리 정보는 없습니까?”
– 왜 없겠습니까. 국민들이 알면 경악할 만한 내용들이 제법 있습니다. 하지만 터트릴 수 없었습니다. 전임 VIP와 직접 협약을 맺은 당사자가 주순자와 오태용입니다. 그 비밀 정보가 담긴 문서들이…… 얼마 전 모두 소각됐습니다.
충분히 짐작 가능한 멘트였다.
대통령이 물러날 때 맺게 되는 신사협정.
그 현장 담당자들은 해당 정권의 실세들이 도맡았다.
서로의 목줄을 쥐고 있는 만큼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최병박은 조근영의 목을, 조근영은 최병박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칼을 들고 있는 셈이다.
타락한 자들의 맞교환.
– 이 사실을 몇몇 언론사도 알고 있지만……. 입을 다물었습니다.
한마디로 다 한통속이라는 결론.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결코 사건을 터트리거나 키우지 않았다.
이미 미래에 터졌던 대대적인 쓰레기 청소의 날은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어느 날 그렇게 고약한 부패 냄새가 하늘을 찌르며 새어나왔던 것.
“이대로 퇴직하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 딱히 저로서는 다른 방법이…….
권력 라인의 줄이 끊어지면 국정원 2인자도 할 일이 없었다.
국가 산하 기관 등에 재입사는 가능하겠지만 정국종 실장 입맛에 맞지 않을 것이다.
권력의 맛을 본 자.
누렸던 힘의 금단현상은 생각보다 독할 것이다.
아직 나도 그가 필요했다.
현장에서 열외 된다 해도 살아 있는 국정원 정보 라인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전에 제가 드렸던 약속 기억하십니까?”
– ……큰일 말씀입니까?
“대한민국을 위해 정치 한번 하셔야죠.”
꿀꺽.
정국종의 침 넘김 소리가 들렸다.
기존 계약이 끝났으니 새로운 계약을 제안했다.
그걸 기억하고 정국종 실장도 전화를 한 것이다.
– 선거 때까지는 아직 많이 남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본 선거만 선거가 아니지 않습니까.”
– 아!
나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야당 쪽은 안 되는 거 아시죠?”
– 물론입니다.
“보궐 선거 가능한 자리 한 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회장님!
정보원을 의회에 이식하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전부터 계획했던 시나리오.
“마지막까지 라인 관리 잘 하십시오. 필요한 건 넣어 놓겠습니다.”
그와 나만이 아는 특별한 계좌.
물리적 세계에서는 돈이 사람을 부리는 요물이 확실했다.
– 걱정 마십시오.
딜은 끝났다.
선(善)을 위해 적절한 타이밍에 악(惡)을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
선한 목적을 위해 난 피도 봤다.
수많은 선한 이들을 위해서라면 하나의 악 정도 키우는 건 일도 아니다.
“좋은 소식 갈 겁니다.”
– 기다리겠습니다.
당분간 직접 연락할 수는 없었다.
나를 향한 감시의 눈길이 사방에 퍼져 있었다.
그러나 국정원도 당장 나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통화가 끝났다.
“주순자……. 재롱 한번 떨어보시겠다 이건가?”
피식 실소가 터졌다.
지난 생에서는 지금 나이 때 결코 알지 못했던 주순자를 비롯해 수많은 사실들을 낱낱이 알고 있는 나.
지금은 많은 것이 달랐다.
미래와 같은 패턴으로 이 사태가 흐른다면 2017년부터 그녀는 대국민적 위인이(?) 된다.
마음 같아서는 전국민이 직면해야 했던 치욕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당장 처리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잠들어 있는 국민들의 의식을 깨우기 위해서는 주순자만 한 제물이 없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고 슬슬 치밀어 올라오는 마음속 심술 하나.
“가만히 있으면 내가 장태산이 아니라 주태산이다…….”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