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55
무려 1천 년 이상을 함께해온 기억의 유산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한제에게 아무런 필요도 없었다.
한제는 잠시 조용히 빛 덩어리로 응집된 기억의 유산을 바라보다가 탁삼에게 휙 내던졌다.
“가져가라!”
가슴팍이 뭉그러진 채 땅에 반쯤 꿇어 회복에 전념하고 있던 탁삼이 멍한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이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갈구하고 원했던 기억의 유산이었다. 한제를 쫓아 계외에까지 오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이내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이날을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한 줄기 마념에 불과한 존재로 수만 년간 봉인되어 있던 그는 기억의 유산을 훔쳐 달아나는 한제를 보았을 때 하늘을 뒤덮을 만큼의 분노와 원한을 느꼈다.
이 기억의 유산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실제로 이를 위해 봉인을 해제한 뒤로 온갖 고통과 위험이 가득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동안 이 순간을 얼마나 간절히 꿈꿔왔던가! 기억의 유산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날, 자신이 완전무결해지는 그날을.
허나 그는 꿈에도 그리던 이 기억의 유산을 한제가 저리 쉽게 내어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탁삼은 빛으로 응집된 기억의 유산을 쥔 채 한참이나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들어 복잡한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고맙다.”
그로서는 평생 처음 해보는 감사의 인사였다. 애초에 자신에게서 감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고신으로서의 오만함이었다.
“서사의 유산이 완전하게 합쳐지는 그때, 네가 온진히 깨어나게 될지 아니면 흩어져 사라지게 될지는 모르겠군.”
이때 한제는 도고의 유산 일부를 손에 넣은 상태였다. 일부에 불과했지만 그 외에는 누구도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언젠가 좀 더 수준을 높인 후라면 다시 돌아와 계승을 이어갈 수는 있을 터였다.
말을 마친 한제는 손을 들어 올려 멀리서 모든 것을 목격하고는 덜덜 떨고 있던 영동과 주진을 천황로 안에 거두었다.
이어서 고마의 시체와 고식엽, 붉은 검 등도 저물공간에 거둔 후에야 한제는 한 걸음 내딛었다.
도고의 기억 일부를 얻게 되면서 오래된 무덤의 첫 번째 층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된 그의 발아래 파문이 일었다.
한데 파문 속으로 사라지려던 순간, 그는 돌연 우뚝 멈추더니 작게 탄성을 토하며 저 멀리 허공을 바라보았다.
궁전의 북쪽 허공에서 파문이 일어났다. 갈수록 커지던 파문은 끝도 없이 늘어나다가 그물이 됐는데 엄청난 위압감을 발산하는 그물 밖으로 어떤 허상이 나타났다.
그물 뒤에 나타난 것은 타원형의 거대한 검은색 그림자였다. 또한 그림자는 수많은 촉수를 나풀거렸고 한 줄기 고신의 힘을 뿜어내면서 그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망월!’
느닷없이 나타난 망월의 머리에는 두 수련자가 서 있었다. 극현천과 무동선이었다.
두 사람은 잔뜩 경계하는 얼굴로 끊임없이 사방을 살폈다. 그들에게는 망월이 있기 때문에 오래된 무덤 안에서도 암석 조각이 따로 필요하지는 않았다.
허나 망월의 힘을 이용한다 해도 궁전의 강력한 금제를 해제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두 사람은 매우 초조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모습을 본 한제는 싸늘하게 웃더니 그물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곧장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더니 확 잡아당겼다.
콰쾅!
그물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그 너머로 극현천과 무동선의 당황한 모습이 보였다. 한데 그들이 상황을 제대로 살피기도 전에 균열 안에서 광풍이 뿜어져 나왔다.
“크윽!”
이들은 광풍에 깃든 엄청난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피를 토해냈다. 게다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눈치채기도 전에 한제의 저물공간으로 거두어졌다.
한편, 망월의 거대한 몸도 광풍의 힘에 아래로 끌어당겨지고 있었다. 순간 녀석은 두 눈이 빛을 폭사하더니 미간의 봉인마저 격렬하게 번득이기 시작했다.
한제는 한걸음에 균열을 빠져나오더니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망월의 몸은 바르르 진동하더니 거대한 균열로 빨려 들어가 한제의 저물공간으로 사라졌다.
‘라진은 아직 이 망월의 체내에 있겠지?’
한제는 라진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망월을 거둔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엉망진창이 된 궁궐 안에 홀로 남은 탁삼은 손에 놓인 기억의 유산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허나 그의 표정에서는 기쁨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을 채운 것은 망설임과 혼란뿐이었다.
그토록 원했던 것을 손에 넣었으나 과연 자신이 이 기억의 유산을 평생 찾아 헤맨 것이 옳은 일이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서사⋯⋯. 난 태어난 그 순간부터 너의 마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데 이 기억은 과연 진실인가 거짓인가? 넌 정말 묵류분신술이 실패해 죽은 것이냐? 나는 묵류분신술로 갈라져 나온 분신에 불과한 것이냐? 난 과연 탁삼인가 서사인가?’
탁삼의 눈빛은 점차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듯 그 자리에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 ★ ★
태고 성신에 나타났던 오래된 무덤의 균열이 닫힘에 따라 이를 둘러쌌던 안개는 바다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한데 오래된 무덤에는 아직 몇몇 수련자가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들답게 만만한 존재들이 아니었다. 태고 성신 각 부족에서도 걸출한 인재들이라 할 만한 자들이었다.
한제는 아홉 번째 지도에 표시된 지역의 혼란한 기류 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는 분홍 옷의 여인을 피하기 위해 궁전이 있던 곳과는 다른 곳으로 나왔다.
한제는 오래된 무덤에 남은 수련자들에 별다른 관심도 원한도 없었다. 그들을 모두 죽여야 할 이유도 없다. 게다가 자신이 이곳을 철저하게 봉쇄했으니 그들은 한동안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고 그거면 충분했다.
한제는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홉 번째 지도의 지역이 바르르 진동하더니 줄기줄기 왜곡이 일어났고 이내 거대한 균열이 벌어졌다.
균열 너머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거대한 금색 누각이 한 귀퉁이를 비집고 나왔다.
“지부⋯⋯.”
한제의 눈이 번득였다. 도고의 기억 일부를 물려받은 그는 이곳에서 어떻게 해야 엽막이 남긴 지부를 취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거대한 금색 누각에는 세 개의 창이 달려 있었고 대문은 꼭 닫혀 있었다. 하지만 그 세 개의 창을 통해 한제는 그 안에 세 개의 인영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흘러넘치는 듯한 위압감이 누각 주위로 퍼져 나왔다.
한제는 지부가 소환되어 나온 순간 소매를 휘둘러 자신의 저물공간에 집어넣고는 곧장 몸을 돌려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거의 동시에 그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다시 나타났을 때, 한제는 다섯 번째 지도에 표시된 지역에 이르러 있었다. 고식엽이 있는 봉인된 땅은 한제가 떠났을 때 그대로였다. 회오리도 여전히 회전하고 있었다.
살짝 주위를 살피던 한제가 고식엽을 하나 꺼내 앞으로 날려 보내자 입구가 열리고 고식엽을 거두어갔다.
회오리 앞에 이른 한제는 오래된 묘와 전보다 더 또렷한 감응이 생겼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조금 전 지부가 나타나면서 일으킨 파동에 이곳에 남은 수련자들이 이쪽으로 질주해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중 몇몇은 매우 강력한 신식을 자신에게 고정시켜 두고 있기도 했다.
한제는 말없이 손을 들어 문양을 하나 그려내 하늘로 올려 보냈다. 그러자 문양은 허공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두 번째 층을 여는 문양이었다.
문양이 사라진 순간 오래된 무덤 첫 번째 층을 채운 짙은 안개에서는 날카롭게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안에 수많은 전혼이 숨어 있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떠나기 전 선물을 하나 남겨주지!”
한제는 싸늘하게 웃더니 회오리에 녹아들었고 사라지기 직전에 뒤편의 허공을 움켜쥐어 이 봉인된 땅을 회오리와 함께 거두어 버렸다. 오래된 무덤에서 영구히 소멸시킨 것이었다.
그 순간, 묘음도존과 몇 사람이 그곳에 이르렀다. 하지만 눈앞은 텅 비어 있었다.
한편, 궁전 안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탁삼은 결심을 내린 듯 기억의 유산을 쥐고 있던 손을 미간에 얹었다.
★ ★ ★
계내, 뇌의 선계 아래 나천성역 가장자리. 당시 탐랑이 휘말려 사라졌던 이곳에 한 줄기 균열이 일더니 그 안에서 백의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사내의 체내에서는 하늘을 뒤흔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기세의 위압감이 풍겨 나와 나천성역 전역을 뒤덮고는 수많은 영혼의 심신을 진동시켰다.
“계외의 태고 성신이 아니라 계내의 나천성역으로 돌아왔군. 집으로 돌아온 거야.”
균열 밖에 나타난 백의의 사내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 사내가 뿜어내는 기운을 가장 먼저 느낀 노부자는 좌선을 하던 중 번득 깨어났다.
전쟁에 대비하는 나천
나천성역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북쪽 지역에는 439개의 수련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진이 있었고 그 밖에서는 수많은 수련자가 끊임없이 문양을 만들어냄으로써 진의 위력을 강화시켰다.
저 멀리서는 긴 빛이 쉭쉭 날아들었다. 수많은 수련자 무리들이 각 우두머리의 지휘에 따라 드넓은 우주로부터 이쪽으로 수련성을 끌어오는 중이었다.
수련성으로 이루어진 진 내부에는 안개의 회오리가 있었다. 안개가 짙지 않아 그 안에 가부좌를 튼 노인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도포를 입은 노인의 얼굴에서는 자연스러운 위엄이 느껴졌다. 다만 얼굴이 약간 창백했고 호흡을 하는 체내에서는 수없이 많은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것처럼 콰쾅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인은 노부자였다. 그는 세 번째 단계 중에서도 공열기 초기의 수련자로 계내에서는 수만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강자였다. 말하자면 노부자는 나천성역의 수호자였다. 당연히 지위가 매우 높았고 다른 수련자들은 한낱 미물처럼 여겼다.
그런 그는 당시 연맹성역과의 전쟁을 일으킨 주동자로 평생을 통틀어 그가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탁삼을 마주했을 때뿐이었다. 그는 탁삼이 나천성역에 나타나자 잔뜩 겁을 먹고 비술을 발휘해 다급하게 숨어들었다가 탁삼이 떠난 뒤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그는 향불이 충분하지 못했지만 특수한 방법을 이용해 탁삼에게 입은 부상을 천천히 회복시키는 중이었다.
이후로는 고요하고 평온한 나날이었다. 한데 지금, 오래된 무덤에서 나온 한제가 나천성역에 발을 디딘 순간, 노부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한제는 어마어마한 위압감으로 사방을 휩쓸어 나천성역 전역을 뒤덮었고 노부자는 곧장 어딘가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눈빛이 향한 곳은 한제가 나타난 곳이었다.
허나 그때 한 줄기 강력한 힘이 그의 신식을 휩쓸면서 심신을 어지럽혔고 그의 시야도 흐려졌다.
다시금 급변한 표정으로 노부자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저자는 누구지? 어딘가 익숙한 신식인데⋯⋯. 아직 세 번째 단계에는 이르지도 못한 자인데 어째서 이리도 불길한 것인가!’
수련성으로 이루어진 진의 회오리에 있는 사람은 노부자만이 아니었다. 그의 주위로는 네 명의 노인이 더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심신이 바르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노부자를 바라보았다.
이들은 뇌선전의 염뇌자 이오에게 중상을 입은 열운자 한제를 쫓다가 청수에게 저지당한 요가의 선조 혈신자 마지막으로 향운동이었다.
향운동은 당시 칠석술을 전수해주겠다는 말로 속여 한제를 향가의 선조가 있는 수련성으로 데려갔고 선조는 한제의 거의 모든 생기를 빨아들인 적이 있었다.
“선배님, 무슨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