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89
“살려줘!”
어마어마한 공격에 진은 진동했고 이를 가동하고 있던 수많은 잔혼들은 비명을 내질렀다. 허나 이들은 그러면서도 바퀴를 굴려 그 파멸적이고 강력한 공격을 막아냈다.
그때, 가부좌를 틀고 있던 한제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싸늘하게 웃었다.
“내 비록 부상을 입었으나 너희들 따위는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한제는 부상을 억누르며 결인을 그린 오른손으로 진을 꾹 눌렀다.
“회전!”
한제가 오른손을 통해 진에 강력한 힘을 주입하자 콰쾅 소리와 함께 진 밖에서는 거대한 허상의 바퀴가 나타났다. 이 바퀴가 수많은 잔혼들에 의해 구르기 시작하자 세상의 규칙이 바뀌었고 죽음의 힘이 뿜어져 나왔다.
또한 이 허상의 바퀴가 회전하자 그 근처에 있던 계외 수련자들이 바르르 떨다가 무너져 내리더니 원신은 남김없이 바퀴로 흡수되어 그것을 굴리는 노예로 전락해버렸다.
남은 계외 수련자들은 경악하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는 사이 바퀴는 벌써 세 번을 구른 상태였다.
그때,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오른손을 휘둘러 미간으로부터 선인 혈맥의 핏방울을 소환했다. 어느새 그의 오른손에는 이광의 활이 쥐어져 있었다.
한제는 시위를 힘껏 당겼다. 피곤함과 지친 기색을 숨기기는 힘들었지만 살기 가득한 두 눈은 진 밖의 우주를 곧게 노려보고 있었다.
“한 발만 더 나서면 전부 죽일 것이다!”
그가 이 말을 내뱉은 순간, 진으로부터 1천 척 떨어진 곳의 허공에 파문이 이는가 싶더니 장존이 나타났다.
장존은 한참이나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다가 곧 돌아서서 사라졌다.
장존이 떠나자 한제는 이광의 활을 거두고는 다시 가부좌를 틀었다. 체내의 상처가 더욱 깊어진 탓에 목구멍을 타고 피가 왈칵 흘러나왔다.
★ ★ ★
어느덧 아홉 달이 지나갔다. 지난 아홉 달 동안 계외 수련자 누구도 진 근처로 다가오지 않았다. 서자봉의 술은 따뜻해질 대로 따뜻해졌지만 한제는 그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1년째 되던 날, 서자봉은 복잡한 심경이 담긴 표정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살짝 허리를 숙여 보인 후 떠나갔다.
그녀의 뒤를 이어 한제의 곁으로 다가온 것은 분홍 옷의 여인이었다.
★ ★ ★
분홍 옷의 여인이 한제의 곁에서 시간을 보낸 지 다섯 달이 지난 어느 날, 한제가 두 눈을 뜨더니 탁한 숨을 토해냈다.
눈가에 어려 있던 어두운 빛도 사라진 상태였으나, 여전히 피곤한 기색이었다. 엽막의 아들이 사용한 시천술에 크게 당한 결과였다. 한제는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면 두려움을 느꼈다.
“깨어났군요.”
곁에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있던 분홍 옷의 아름다운 여인이 약간의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녀는… 갔나?”
저 멀리 모은미만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을 뿐 서자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치료에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서자봉은 이미 떠났어요.”
여인이 조용히 대답했다.
“떠나기 전 제게 이 말을 전해 달라 했습니다. 청령성에 찾아갔지만 당신의 제자인 사청을 찾지는 못했다고요.”
한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제가 입을 다물자 분홍 옷의 여인도 침묵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적막이 맴돌았다. 고요한 우주 저 깊은 곳,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별들만이 반짝였다.
“이제 제가 누군지⋯⋯ 기억나십니까?”
한참 뒤, 분홍 옷의 여인이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한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홍접.”
한제는 그 여인을 바라보지도 않고 우주로 시선을 둔 채 덤덤하게 말했다.
“알고 계셨군요.”
분홍 옷의 여인이 두 눈을 감았다.
“주무태가 내게 알려줬다. 설역국에서 진을 하나 발견했다고. 그 진에는 네 머리카락이 한 올 있었지. 당시의 재난을 그 진으로 피한 모양이군.”
그렇다. 이 여인은 홍접이었다.
하지만 더없이 고고하고 서늘했던 그 옛날의 홍접과는 전혀 달랐기에 어지간해서는 그녀가 홍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을 터였다.
“우의 선계를 기억하십니까? 그때 저희는 그곳에서 서로 싸웠었지요.”
홍접은 미소를 띤 채 마치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때 저는 당신을 참 미워했습니다. 우의 선계에서 제 팔 하나를 잘라버리기까지 했으니까요.”
한제는 씁쓸하게 웃으며 멋쩍은 듯 코를 긁적였다.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 가까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홍접은 한제가 멋쩍어하는 모습에 입을 가리며 살짝 웃었다. 그녀의 눈은 초승달처럼 곱게 휘어지면서 더욱 아름다웠다.
“네가 나를 죽이려 했으니 그랬지. 나로서는 너를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제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서자봉이 술을 남겨두고 떠났어요.”
홍접이 손을 휘두르자 허공에 술병이 나타나 한제에게로 둥둥 떠갔다.
한제는 술병을 받아들고 한 모금 들이켰다.
“주작성에서 싸웠을 때는 제 곤극 채찍도 빼앗아갔지요.”
홍접이 웃으며 말했다.
“전부 기억하고 있군.”
한제는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요. 그건 그렇고 주작의 무덤에서 나를 풀어줘서 고마워요.”
이전의 일을 떠올리던 홍접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사이에 깊은 원한 같은 건 없어. 이미 모두 지난 일이지. 넌 내게 설역국에 가서 파란 장미를 찾으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난 그것을 찾아냈어.”
홍접은 한제의 일생에서 이모완과 류미를 제외하면 가장 처음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여인이었다. 당시 그녀의 고고하고 강력한 모습을 한제는 잊을 수가 없었다. 단 1백 년 만에 화신기에 오른, 천재 중의 천재가 아니었던가.
“당시 저는 당신이 이렇게까지 강력한 존재가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꿈같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에요.”
홍접이 고개를 저었다.
눈 깜짝할 사이 또다시 사흘이 지났다. 한제와 홍접은 지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보니 주작성의 약하고 보잘것없는 수련자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무척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었다.
“후에 나천성역과 연맹성역 사이의 전쟁 때⋯⋯ 당신은 저를 알아보지 못하더군요.”
홍접은 한제가 주작성에서 성장하던 모습을 지켜본 바 있다. 점점 강력해지던 그는 이제 계내와 계외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련자가 됐다.
한제에 대한 홍접의 마음에는 존경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평생 누구를 좋아한 적 없던 그녀가 긍정적인 마음을 품었던 사람을 굳이 꼽자면 그게 한제였다. 두 사람 사이에 애정 같은 것은 없었지만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분명 있었다. 홍접 자신조차도 그것이 어떤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둘 사이는 술처럼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무르익었는지도 모른다.
다시금 침묵이 찾아왔다. 한제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고 홍접은 여태 그랬듯 묵묵히 곁에 앉아 우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혼란함과 복잡함 사이로 밝은 빛이 어려 있기도 했다.
순식간에 두 번째 해의 아홉 번째 달이 지나고 있었다.
★ ★ ★
어느 날, 진 밖의 우주에 부드러운 파란색 빛 한 줄기가 어렴풋이 나타났다. 점점 퍼져 나가던 빛은 곧 우주를 뒤덮으며 진 외부를 파란색으로 물들였다.
바다와 같은 푸른 빛은 계속해서 퍼져 나가며 삼원륜의 진까지 물들였다. 슬픔이 어린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눈을 뜬 한제는 그 푸른 빛을 그 안에서 두 인영이 천천히 걸어오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남몽도존과 이천매였다.
1년 하고도 9개월 동안 고민한 끝에 이곳에 오기로 결심한 남몽도존은 딸과 함께 진 밖에 잠시 멈춰 섰다. 한제의 눈빛은 남몽도존을 넘어 그 뒤의 이천매에게 닿아 있었다.
이천매는 전보다 훨씬 더 수척해져 있었다. 안색도 매우 어두워 더 이상 전과 같은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선을 느낀 그녀 역시 한제를 바라보았는데 눈빛에는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
한제의 기억에는 이모완 외에도 깊은 인상을 남긴 여인들이 있었다. 류미는 이평 때문에 홍접은 당시의 원인과 결과 때문에 그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면 이천매는 그 아름다움과 잊을 수 없는 만남으로 인해 그의 기억에 남았다.
세 가지의 질문과 이후의 계속된 만남.
“언젠가 제가 죽으면 당신의 인생에서 빠르게 스쳐 지나간 이천매라는 여인도 있었다는 걸 기억해주세요.”
이천매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한제로서는 절대로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10년 동안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고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았고 한제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한제 또한 이천매를 위해 목숨을 걸었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계외의 남몽도존을 찾아간 바 있다. 그녀가 눈을 뜬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제 이름을 알리라 하셨습니다. 저는 남월이라 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시 이천매의 그 질문은 한 자루의 칼이 되었고 한제는 남산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