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90
2년 6개월
“많이 야위었군.”
한제는 말없이 이천매를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 한 마디에 이천매는 몸을 가늘게 떨더니 눈물을 흘렸다. 일찍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녀였기에…
남몽도존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딸과 함께 다가왔다. 그들이 1백 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르자 진은 웅웅 소리를 내며 가동될 조짐을 보였다.
한제의 시선은 이천매에게서 남몽도존으로 옮겨진 순간 번득였지만 곧 그 빛은 흩어져 사라졌다. 이내 그는 손을 들어 휘둘렀고 이에 진이 가동을 멈추면서 남몽도존 앞에 타원형 빛이 나타났다. 한제가 있는 곳까지 이어진 통로였다.
망설임 없이 이천매와 함께 빛 안으로 들어선 남몽도존은 순식간에 한제 앞에 이르렀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그는 이내 부드러운 눈으로 한제 뒤쪽의 천황로를 보았다.
“내 자네가 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지. 내가 직접 빚은 남사주(藍絲酒)라는 술이 있는데 마셔볼 텐가?”
한제는 남몽도존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술을 받아들어 옆에 내려놓았다.
“내 평생 사람을 잘못 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네. 하지만 이제 인정해야겠군. 내 여태 자네를 과소평가해 왔음을⋯⋯. 장존이 정중로월로 만든 환각의 진에서 난 공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네. 자네를 위해서, 그리고 내 딸을 위해서⋯⋯. 그때까지만 해도 난 자네가 뛰어난 사람이긴 해도 계내와의 연을 끊지 않는 이상 이 남몽도존의 사위로 삼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거든.”
남몽도존은 자기 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비우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가 자네의 능력만으로 그 정도 수준에 이를 줄은 몰랐네. 다섯 번째 비를 내게 넘기게. 그럼 자네를 내 사위로 삼고 오늘 이후로 나는 남사족을 이끌고 계내에 가담하겠네. 내 뼈라도 깔아 자네의 앞길을 평탄하게 닦아주지.”
남몽도존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지난 2년여 동안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을 털어놓았다.
곁에 선 이천매는 바르르 떨더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버지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태고오존의 일인인 아버지가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 절대 어머니만을 위해서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전의 일은 모두 과거에 묻도록 하세. 여기서 자네의 답을 기다리지.”
남몽도존이 덤덤하게 말했다.
한제는 홍접에게서 받은 술병을 들이켠 후 두 눈을 감았다.
남몽도존 역시 조급하게 굴지 않고 옆에 앉아 계외의 우주를 바라보며 한제의 답을 기다렸다. 이천매도 묵묵히 한쪽에 가부좌를 틀었는데 그 자리가 교묘해 마치 자신의 아버지를 경계하듯 비교적 한제와 가까웠다.
그런 딸의 행동을 눈치챈 남몽도존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으나 이천매는 그런 아버지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두 번째 해는 아주 평화롭고 평온하게 지났다.
그해의 마지막 날, 홍접은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빠른 1년이었다.
“가는 것인가?”
한제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1년이 지났으니 이만 가야지요. 모은미가 기다립니다.”
홍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길 바라지.”
한제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도도함이나 오만함을 찾아볼 수 없는 홍접을 바라보았다.
홍접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한제를 한참 바라보더니 막 몸을 돌려 떠나려다 멈칫했다. 그리고는 뭔가 망설이는 듯한 눈빛으로 한제를 돌아보았다.
“스승님께서는 오래 전 이씨 성을 가진 대학자를 한 명 만났다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저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상태였는데 그때 만났던 대학자가 스승님께 제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진을 하나 알려주었다고 했지요. 또한 홍접이라는 이름 역시 그 대학자가 지어준 것이라고⋯⋯.”
그 말에 한제의 두 눈에서 기이한 빛이 번득였다. 온몸의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간 한제의 표정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충격이 드러났다.
“뭐라고?”
이후 한제는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엄청난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비 오는 날, 어느 정자에서 홍접의 스승과 만났던 것은 분명 그의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었고 그 꿈은 모두 자기 자신조차 속이고 꾸며낸 허상이었다.
허나 홍접의 말에 그가 알고 있던 사실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럴 수가! 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이란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본원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건만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정말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깨달은 것인가?
이내 홍접은 몇 걸음 나아가다가 또다시 멈춰 섰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또 한 번 한제를 향해 돌아서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의 사형, 청수라는 자 말입니다. 혹, 그 사람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뭘 묻고 싶은 거지?”
충격에 빠져 있던 한제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홍접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에게⋯⋯ 가족이 있습니까?”
홍접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한참 뒤 결심한 듯 물었다.
한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홍접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나천성역에서 홍접 앞에 선 채 공격을 막아주던 청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형께서는 힘든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어렸을 적 자신을 제외한 모든 부족원이 죽은 것을 보고 선계에 들어왔으나 아내와 사별했지.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마도 그 딸은 몇 차례의 윤회를 겪으며 당시의 기억을 다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시더군. 그 딸이야말로 그분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겠지.”
조용히 읊조리는 듯한 한제의 말에 홍접은 몸을 바르르 떨며 두 눈을 감았다.
한참 뒤에야 다시 뜬 그녀의 눈에는 혼란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 딸의 왼쪽 어깨에 붉은 낙인이 새겨져 있다고 했지. 윤회를 몇 번이고 거듭한다 해도 그 낙인만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한제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홍접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난 홍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감사합니다.”
자신에게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감사 인사를 남긴 그녀는 한 줄기 빛이 되어 나천성역으로 향했다.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는 그녀는 당장 나천으로 돌아가 청수를 만날 생각이었다.
홍접은 그렇게 떠났다.
그리고 이날, 모은미가 한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얌전히 자리를 잡고 앉더니 이천매를 향해 인사를 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두 눈을 감았다.
운해성역에서 만난 적이 있기에 이천매 역시 모은미를 알고 있었다.
한제는 남몽도존의 제안을 두고 여전히 고민 중이었다.
그렇게 세 번째 해도 여섯 번째 달에 접어들었을 때, 마침내 두 눈을 뜬 한제가 남몽도존을 바라보았다.
“제게는 아내가 있습니다.”
한제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이에 이천매는 얼른 고개를 숙여 어두워진 얼굴을 숨겼다.
“두 번째 아내를 들일 수도 있지 않으냐?”
남몽도존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생각을 좀 더 해봐도 좋아. 급하지 않으니까. 딸까지 데리고 온 이상 다시 떠날 생각은 없다. 자네 혼자서는 칠채와 전가 노인에게 대적할 수 없어. 안 그런가?”
남몽도존의 시선이 한제에게로 향했다.
“마음만 먹었다면 난 몇 년 전 현겁에 도전했을 게야. 그리고 아홉 번째 현겁을 잘 넘겼다면 공겁기의 경지에 이르렀겠지. 허나 내게는 확신이 없었다. 칠채도인과 전가 노인이 강력한 수련자라 해도 그들을 제외한 세 번째 존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돕는다면 우리에게는 승산이 있어!”
이천매도 모은미도 남몽도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한제의 눈빛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알고 계셨군요.”
한제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내가 계내에서 태어난 생명 중 전가 노인 다음으로 그러니까 두 번째로 그 사실을 안 사람일 게다.”
남몽도존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그 일에 대해 알게 된 후 너무도 혼란스러웠던 나는 애초에 그것을 믿고 싶지도 않았다. 허나 내게 그 이야기를 해준 내 아내… 네 뒤에 있는 천황로 속 다섯 번째 선비⋯⋯. 내 어찌 그녀의 이야기를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남몽도존이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선존의 여덟 비가 계외에 강림했을 때, 다섯 번째 비는 육신을 잃고 혼만 남아 있었지. 그 혼에 완벽하게 어울렸던 내 아내는 다섯 번째 비에게 육신을 탈취 당했네. 허나 그녀는 내 아내의 혼을 훼손하지는 않았어. 대신 그 혼을 연결고리로 이용해 나에게 갖가지 일을 처리하게 했지. 환각의 진에서 자네를 공격한 것도 그녀가 내 아내의 혼을 이용해 나를 압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네. 내게는 분명 다섯 번째 비의 혼을 죽일 능력이 있지만 그럴 수는 없어⋯⋯.”
한제는 괴로움이 어린 남몽도존의 목소리를 말없이 들었다.
“2년 전, 장존은 날 찾아와 내 아내의 몸에 깃든 다섯 번째 비의 혼을 빼내도록 도와주겠다더군. 그 약속으로 이 남몽도존이 앞뒤 가리지 않고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 여긴 게지. 허나 그들은 틀렸어! 난 아내를 사랑하네. 그러니 나보다 이 상황을 더 잘 아는 사람도 없지. 내 아내의 혼은 이미 다섯 번째 선비의 혼과 하나로 합쳐졌어. 그 둘은 이미 분리할 수 없는 상황… 한쪽이 죽으면 나머지 한쪽도 함께 죽게 되는 상황인 게야.”
남몽도존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졌다.
“허나 그렇다고 직접 그녀를 공격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그저… 기적만을 바라며 이 사실을 숨긴 채 끙끙 앓아왔네. 그러니 그녀를 봉인한 자네의 행동은, 말하자면 나를 그 부담으로부터 해방시킨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지.”
남몽도존은 복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이미 떠났고 슬픔만 남아 있어. 그런 상황에서 자네를 공격할 때마다 나에 대한 딸의 원망만 키워온 셈이지. 그러니 난 더 이상 자네를 공격할 수 없네. 게다가 이 전쟁은 더 이상 진행할 이유도 없어. 목숨 걸고 싸워봐야 모두 같은 동부 내의 수련자 아닌가!”
남몽도존은 벌떡 일어나 소매를 휘두르며 밝은 빛이 번득이는 눈으로 진 밖의 태고 성신을 바라보았다.
한제 역시 서늘한 빛이 번득이는 눈으로 진 밖의 우주를 내다보았다.
그곳에서는 세 갈래의 빛이 짙은 살기와 원한을 품은 채 달려드는 중이었다. 그 안에는 묘음도존과 구천마존, 그리고 대황상인이 있었다.
한제에 의해 오래된 무덤에 갇힌 이들은 장존의 도움으로 풀려난 지금 깊은 한을 품고 한제를 찾아온 것이다.
2년 하고도 여섯 달이 지난 어느 날, 한제가 4대 장군과 약속한 기일까지는 아직 반년이 더 남은 때였다.
“난 자네가 여전히 나를 경계한다는 것을 알고 있네. 내 딸 역시 제 아비인 나를 믿지 않고 있지. 그러니 오늘 내 스스로 증명해 보이겠네. 아버지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하겠어!”
한제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남몽도존의 두 눈은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가득 담은 채 딸인 이천매에게로 향했다.
소매를 휘두른 그는 곧장 계외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더니 한 줄기 푸른빛이 되어 눈 깜짝할 사이 저 먼 곳에 이르렀다.
“묘음, 구천, 대황! 썩 물러나라!”
계외 태고 성신에 모습을 드러낸 남몽도존의 낮은 호통은 폭풍처럼 사방으로 몰아쳤다. 이에 묘음도존을 비롯한 세 사람은 일제히 우뚝 멈추었다.
“남몽! 이게 뭐하는 짓인가!”
“대체 왜 우리를 막는 것이야!”
“이유는 알 필요 없네. 셋 셀 동안 물러나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게야!”
남몽도존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삼원륜의 진을 등진 채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