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47
한제가 되물었다.
“자네가 패한다면 세 번째 주혼은 내가 갖겠네. 대신 자네가 이긴다면 내가 1천 년 동안 자네의 명령에 복종하는 노예로 살지. 선강 맹세를 하겠네! 혈맥을 걸고 맹세하겠어!”
백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우주에는 한 층의 파문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덤덤했던 한제의 얼굴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번졌다.
신식으로 이 잔계를 한 번 훑어본 한제는 세 번째 수련성으로부터 약간의 실마리를 파악한 상태였다.
이곳에 적용된 규칙은 마치 바둑을 두듯 신식으로 대지의 병사나 장군 중 하나에 녹여낸 뒤 그 일반인의 몸으로 어마어마한 전투를 치르는 것일 터였다. 그러는 동안 수준은 완전히 제압되어 사용이 불가능했다.
‘백호 장군은 장군이고 오행성의 사내는 병사야. 백호 장군은 이 상황이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하겠지. 잔계는 혈맥을 봉쇄하지 못하지만 잔계의 힘을 집중시킨다면 두세 명쯤은 가능할 터. 수준도 봉쇄할 수 있겠지. 백호 장군 또한 선인의 혈맥이 제압됐겠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장군이 될 만한 육신의 강력함이 있는 거야. 반면 저 사내는 육신을 단련한 적이 없는 모양이군. 한낱 병사가 되어 있는 걸 보면 말이지.’
한제는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혈맥의 힘을 가진 자라면 규칙의 제한 아래에서도 어느 정도의 수준을 발휘할 수 있다. 혈맥의 힘을 가진 자의 수가 많을수록 그 힘을 제한하는 건 부담이 되겠지만 백호 장군은 내 도고의 유산에 혈맥의 힘도 있다는 건 결코 모를 거야. 그 혈맥의 힘이 이곳의 규칙에 제한된다 해도 저자들이 발휘하는 힘보다 약하지는 않을 터. 오히려 더 강할 가능성이 높다!’
생각을 정리한 한제는 과감하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공간 전체에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어디선가 억지로 주입된 한 줄기 힘이 백호가 제정한 규칙을 약화시켰다.
한제의 예상대로 이곳의 규칙은 여러 명에게 작용할수록 그 압박감이 줄어든다. 두 사람에게만 작용할 경우 혈맥의 힘을 9할 이상 압박할 수 있었다. 한데 지금 세 번째 사람이 나타나자 그 압박은 분산되면서 크게 약화되고 말았다.
그때, 오행성 사내의 눈이 밝게 번득였다. 자신에게 가해지던 규칙의 압박이 한결 약해진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동시에 신식을 녹여 넣은 병사의 온몸에서는 금빛이 발산됐다. 그에게 달려들던 적들은 강력해진 병사의 손에 그대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혈맥의 힘! 이럴 수가! 분명 저자 체내에서는 선인 혈맥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데…”
백호 장군은 표정이 급변했고 한제가 가진 혈맥의 힘으로 인해 변화를 일으킨 규칙에 심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한제는 허공에서 흩어져 사라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 세 번째 수련성에 나타났다. 이제 그와 백호, 오행성의 사내는 삼각형의 꼭짓점을 이룬 채 대치하게 됐다.
한제는 곧장 신식을 갈라내 전장으로 쏘아 보냈다. 그의 신식은 백호 장군의 적 중 평범한 병사에게 녹아들었다. 이 병사는 손에 든 긴 칼을 휘두르느라 후방 멀리서 백호 장군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백호 장군은 말의 속도를 이용해 창을 내던졌다.
쐐액!
창은 단숨에 병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러나 한제의 신식이 녹아든 순간 잠시 멈칫했고 순식간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더니 생김새 또한 흐릿해졌다가 한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하앗!”
병사는 낮은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돌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창을 튕겨냈다.
챙강!
창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나버린 채 떨어져 내렸다.
한제의 신식이 녹아든 병사는 고개를 번쩍 쳐들어 천군만마 너머 말 위의 백호 장군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평원 상공, 한제의 본체는 가부좌를 튼 채 냉소를 짓고 있었다.
이곳의 규칙은 바둑과 다르지 않았다. 저 아래 백만 병사가 바둑판이라면 세 사람의 신식이 녹아든 장군과 병사는 바둑돌인 셈이었다.
백호 장군은 어두운 얼굴로 한제를 힐끔 보더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식을 녹여 넣은 장군에 온전히 집중했다.
백갑(白甲)의 장군은 서늘한 눈으로 손을 들어 저 멀리 한제의 병사를 가리켰다. 순간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르더니 검은 갑옷을 입은 열 명의 병사로 변해 전장을 가로질러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한제는 비릿하게 웃었다. 전장에 있으려니 사방에서 들려오는 절규와 비명, 고함을 비롯한 각종 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섞인 그 소리들이 마치 웅장한 음악 같았고 그 음악은 온몸의 피를 들끓게 만들었다.
한제는 칼날에 묻은 피를 핥더니 비릿하게 웃으며 맹렬하게 돌진했다.
앞을 가로막는 적들은 한 번의 칼질을 버텨내지 못했다.
그의 손에 죽은 이들은 줄기줄기 연기가 되어 한제의 체내로 스며들었고 그러자 그의 주위로 점차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덕분에 그는 흉악한 악귀처럼 보였다.
이곳의 모든 병사는 허상이자 백호 장군의 규칙으로 만들어진 바둑판에 불과했다. 오직 그와 백호 장군, 오행성의 중년 사내를 위해 준비된 무대일 뿐이었다.
“죽어라!”
한제는 끊임없이 돌진하며 칼을 휘둘렀다. 어느새 검은 갑옷의 병사들과 마주하게 된 그는 훌쩍 몸을 날리더니 추락하는 힘을 빌려 적들의 머리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검은 갑옷의 병사는 재빨리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시야에는 어두운 하늘과 붉은 달 그리고 그 달을 등진 채 거친 기세로 떨어져 내리는 한제가 있었다.
“헛!”
놀란 병사는 얼른 방패를 들어 올려 공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한 발 늦어버렸다.
쉬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예리한 칼날이 번득였다.
“끄아악!”
끔찍한 비명에 수많은 병사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반으로 갈라진 한 병사의 체내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한제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한제의 주위를 맴도는 짙은 연기는 마치 검은색 화염 같았다.
그때, 마치 검은색 화염처럼 한제의 주위를 맴돌던 연기가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응집하더니 검은 갑옷으로 변해 한제의 몸을 감쌌다.
칼을 기다리다
백발과의 묘한 대비로 한제는 더욱 두려운 존재처럼 보였다. 손에 들려 있던 칼도 검은색으로 물들더니 마치 초승달처럼 변했고 길이도 더 길어졌다.
“칼춤 한번 춰볼까? 크하하하!”
한제는 광소를 터뜨리며 돌진했고 한층 강력해진 칼을 휘둘러 단숨에 수많은 적을 죽였다.
1각이 흘렀을 때, 백호 장군이 소환한 열 명의 흑갑(黑甲) 병사 중 살아남은 자는 없었고 한제의 갑옷은 한층 단단하게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투구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병사 가운데 우뚝 선 그에게서는 위엄이 넘쳤다.
한편, 바둑알 중 하나인 오행성 중년 사내의 병사가 번득였던 금빛은 수많은 적을 처리하면서 금빛 갑옷으로 변한 상태였다. 그러나 한제의 갑옷에 비하면 어딘가 허술해 보였다.
하늘에서 이 모든 것을 내려다보던 백호 장군은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고 얼굴 위로 푸른 핏줄마저 돋아난 상태였다.
백호장군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의 신식이 녹아든 백갑 장군은 말 위에서 장창을 쥔 채 뒤로 물러났다. 한제와의 거리를 벌리려는 듯했다.
허나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음을 잘 알고 있는 한제가 그대로 지켜볼 리 만무했다.
이 전투를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야 했기에 백갑의 장군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 한제는 곧장 뛰어올라 그대로 병사들의 머리를 디딤돌처럼 밟으며 돌진했다.
걸음걸음마다 한제의 발에 밟힌 병사들은 검은 연기가 되어 그의 체내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1천 척 정도를 이동한 한제 주위로 몰려든 검은 연기는 또다시 응집하더니 거대한 흑마(黑馬)가 됐다.
“히히힝!”
우렁차게 투레질하는 말에 올라탄 한제는 한 줄기 검은 바람이 된 듯 돌진했다. 그의 곁을 스쳐간 이들은 순식간에 숨을 거두었다.
뒤로 물러나던 백갑 장군은 화들짝 놀라 손에 쥔 창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 ★ ★
또 다른 잔계. 어두운 표정의 칠채도인이 낮게 혀를 찼다. 거의 백 개에 이르는 잔계를 방문했음에도 한제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조한 마음에 그는 얼른 손을 뻗어 공간을 찢어냈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다음 잔계로 넘어가려 했다.
그 순간,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두 눈이 기쁨으로 번득였다. 균열이 생겨난 순간 한제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로 너머의 잔계는 아니었지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게 분명했다.
“느껴진다! 녀석은 멀지 않은 곳에 있어!”
칠채도인은 더욱 서둘러 다음 잔계로 넘어가더니 또다시 균열을 만들어 몇 개의 잔계를 연거푸 관통했다. 두 눈에는 격앙된 감정이 드러났다.
그 무렵, 백갑 장군은 물러나는 것을 멈췄다. 이건 혼자서 도망친다고 피할 수 있는 전투가 아니라 양쪽 진영이 맞서는 바둑이었다. 전장에서 장군이 물러난다면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질 터. 특히 적이 강력한 기세로 달려들고 있다면 더더욱 물러날 수는 없었다.
‘물러난다는 것은 두려움을 느낀다는 뜻. 두려워할수록 이길 가능성은 줄어든다. 보나마나 저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이들을 죽이고 더 강력해질 테니까.’
그는 지금 그냥 물러나 버린다면 한제와의 싸움에서 완벽하게 패배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죽어라!”
백갑의 장군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낮게 기합을 넣으며 얼룩무늬 백마를 몰아 맹렬하게 돌진했다.
1만 척가량 떨어져 있던 검은 말과 흰 말이 빠른 속도로 서로를 향해 내달렸다. 그 말 위에 탄 사람들은 달리는 와중에도 가까이 있는 적병을 죽임으로써 더욱 많은 힘을 끌어모았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피와 잘린 몸뚱이가 날아다녔고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는 사이 상공의 백호 장군은 충격을 받은 듯 얼굴을 잔뜩 구겼다. 백갑의 장군에 녹여 넣은 그의 신식으로 인해 그 뒤로 한 마리 백호의 허상이 흐릿하게 나타나더니 한제를 향해 포효했다. 심지어 백갑 장군이 몰고 있던 백마 역시 백호로 바뀐 상태였다.
“크르릉!”
백호의 울부짖음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한제 주위로 몰려든 검은 기운은 그와 그를 태운 검은 말을 완전히 감쌌다. 백발을 휘날리는 그의 손에는 무려 10척에 달하는 칼이 번득였다. 피가 뚝뚝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도살자의 칼 같았다.
‘호랑이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늘 이 이한제는 호랑이를 잡을 것이다!’
한제의 두 눈에서는 살기와 함께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주위에 모여들었던 검은 기운은 회오리로 변하는가 싶더니 한 거인의 허상을 형성했다. 도고 엽막이 아닌 도고 이한제의 허상이었다.
그 사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1천 척으로 좁혀진 상태였고 이 순간에도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죽어라!”
둘 사이가 지척에 이르렀을 때, 백갑 장군이 고개를 번쩍 쳐들며 하늘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반면 한제는 말없이 비릿하게 웃더니 말 등을 밟고 훌쩍 뛰어오르며 검고 긴 칼을 들어 올렸다. 검게 번득이는 빛이 칼에서 뿜어져 나와 어두운 하늘에 녹아들면서 붉은 달과 교차했다.
그 순간, 하늘과 땅의 기색을 변화시키고 구름과 바람을 휘몰아치게 할 듯한 기운이 한제의 칼에 응집됐다.
그 무렵, 백갑 장군은 눈부신 백색 빛이 번득이는 창을 힘껏 내던졌다. 동시에 장군의 뒤편에 나타났던 백호의 허상이 달려들어 그 창과 융합했다. 이제 그 창은 마치 먹잇감을 향해 돌진하는 백호처럼 보였다.
콰쾅!
흑백의 빛이 맹렬히 달려들어 충돌한 순간,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지가 진동하고 하늘이 뒤흔들렸다.
“캬아아아!”
백호가 된 창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백호는 날카로운 비명을 내지르며 와해됐다. 한제의 칼 역시 금이 가더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