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54
고민하던 한제는 이내 그쪽으로 향했다. 2각쯤 지나서야 멈춰 선 한제는 불어닥치는 서늘한 기운을 맞으며 말없이 전방을 응시했다.
저 멀리 1만 리 정도 앞, 역시 얼음으로 뒤덮인 땅 위로 원뿔 형태의 바위가 하나 있었고 그 위에는 긴 머리의 한 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여인의 미간에서는 고신의 반점 일곱 개가 회전하면서 고신의 기운을 발산했다.
여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덤덤한 눈으로 저 멀리서 다가오던 한제와 여인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동림종(東臨宗)에 온 것을 환영한다.”
여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얼음으로 봉인된 세상에 울려 퍼졌다.
한제는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우 익숙한 고신의 기운, 당시 나천성역에서 동림성의 선조를 죽였을 때 느껴본 적 있는 기운이었다.
“이곳이 동림성인가?”
한제는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발아래 일어난 파문과 함께 1만 리를 뛰어넘어 여자 고신의 1천 척 앞에 이르렀다.
여인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곳은 동림종이지 동림성이 아니다.”
“구면인 것 같군. 난 이한제라 하네. 그쪽은?”
한제는 여인을 특히 여인의 미간에서 맴도는 일곱 개의 반점을 바라보다가 한쪽에 가부좌를 틀었다.
“내 이름은 은라. 선존 휘하 동림종 신장로다.”
여인이 답했다.
“이곳이 동림성이든 동림종이든, 왜 두 번째 꽃 안에 있는 거지?”
“넌 이곳이 얼음으로 봉인된 이래 동부계 중심의 입구에서 들어온 최초의 사람이다. 네게서 내 주인님의 혼이 느껴지는구나.”
여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며 한제의 마음을 흔들었다.
“주인님이라⋯⋯.”
한제는 가만히 앉아 은라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이곳은 오화팔문 중 두 번째 꽃. 이곳의 모든 것은 주인님께서 만들어내셨지. 엽막 심신의 혈(血)인 나를 포함해서 말이야. 이곳 동림종은 주인님의 기억 속, 초기 종파의 모습을 따라 만들어졌어. 선강 대륙의 동림종과 똑같을 거야.”
한제는 말없이 여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주인님, 칠채선존은 일찍이 동림종 제자였으나 어떤 사건으로 축출되시고는 그리움을 담아 이곳을 만드셨지. 이곳의 모든 것은 주인님의 생기를 양분 삼아 만들어졌기에 그분이 돌아가시자 생기를 잃고 얼음으로 봉인됐어. 넌 이곳에 들어온 최초의 사람이야. 한데 네게는 주인님의 분혼이 깃들었으니 넌 이곳의 주인이라 할 수 있지.”
은라는 잠시 말을 끊고 한제를 바라보았다.
“부상을 입었구나. 내 체내에 남은 마지막 엽막의 심혈을 녹여 넣는다면 넌 완전해지고 부상도 치료할 수도 있을 거야.”
원신의 탈취
한제의 귓가에는 여인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세 번째 주혼과 완벽하게 융합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아직 알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인의 말대로 이곳은 끝없는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한제는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곧장 표정이 급변해 어딘가로 고개를 돌렸다. 얼음으로 봉인된 이 세상에 보일 듯 말 듯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발을 들인 모양이었다.
“넌 이곳에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이자 이곳의 주인이야. 원하기만 한다면 이곳을 금제로 뒤덮어 다른 이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도 있지. 물론 상대의 수준이 너무 높다면 결국 막을 수 없겠지만…”
이때 말을 마친 여인은 한제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쩌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얼음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얼음층은 한제와 여인이 있는 곳에서부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한제는 이 세상이 온통 얼음으로 얼어붙어 봉인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금의 틈이나 균열도 없어 마치 하나의 거대하고 반투명한 얼음 조각처럼 보이는 얼음층에서는 강한 한기가 발산됐다.
그때 저 멀리서 막 이 세상에 발을 들이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얼음층에 봉인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얼어붙지 않은 곳은 한제와 여인이 있는 공간뿐이었다.
“얼음 봉인은 오래가지 않는다. 저들 중에는 수준도 높고 주인님의 기운을 가진 자가 있어.”
말을 마친 고신 여인은 손을 들어 미간을 두드렸다. 그러자 그녀의 미간에서 회오리가 나타나 붉은 빛을 발산했고 이내 한 방울의 피로 응집해 여인의 손가락 끝에 떨어졌다.
“이 엽막 원신의 피를 흡수하면 네 부상은 곧장 회복될 거야.”
엽막의 심혈을 빼내자 허약해진 여인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 끝에 떨어져 있던 피는 긴 빛을 그리며 한제에게로 날아가 7촌 정도 떨어진 곳에 둥둥 떠 있었다.
한제는 그 핏방울에서 익숙한 엽막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엽막이 최후에 남긴 원신의 피가 분명했다.
‘저것을 흡수하면 도고의 유산은 더욱 완전해질 것이다. 하지만…’
한제는 허약해진 고신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째서 날 돕는 거지?”
“넌 주인님이니까.”
여인은 웃으며 답했지만 한제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 날 돕는 거지?”
그러자 한동안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던 여인의 눈빛에 서서히 슬픔이 차올랐다.
“난 주인님이 응집한 엽막의 피로 만들어진 존재다. 주인님을 위해 동립종을 지키는 장로로 지내왔지.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났어. 고요와 고마의 장로들은 이미 얼음 봉인 속에서 숨을 거뒀고 다른 사람들도 주인님의 생기로 자양받지 못하니 천천히 죽어가겠지. 한데 주인님의 혼을 가진 네가 나타났다. 오화팔문의 진도 뚫고 들어갈 수 있을 터. 그 문을 연다면… 나를 이곳에서 내보내줄 수 있겠나?”
말을 마친 여인의 검은 머리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한제는 그 모습이 퍽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뒤이어 그는 여인이 보낸 핏방울을 움켜쥐었다.
사실 그가 여인에게 그런 질문을 한 또 다른 이유는 그 틈에 조금이라도 부상을 치료하고 동시에 신식을 통해 피를 자세히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 결과 이 피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기에 망설임 없이 여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한제는 피를 움켜쥔 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피가 미간으로 들어간 순간, 한제의 심신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미리 갈라놓은 신식 한 줄기로 주위를 경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만약 여인이 이상한 낌새라도 보인다면 곧장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엽막 원신의 피는 미간에 녹아들자마자 곧장 체내로 퍼져 나갔고 줄기줄기 갈라져 조금의 거부 반응도 없이 융합됐다.
피에 담긴 강렬한 생기에 한제의 체내에서는 펑, 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미간과 두 눈에서는 동시에 반점들이 나타나 회전하면서 빠른 속도로 피에 담긴 힘을 흡수했다.
그 무렵, 얼음으로 봉인된 세상에 발이 묶인 현라는 멀리서 이를 지켜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곳은 녀석에게 큰 기회가 되겠군. 좋아, 내가 시간을 벌어주지.”
현라는 손을 들어 얼음층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얼음층에는 그의 기운이 한 줄기 녹아들면서 전보다 수백수천 배나 더 단단해졌다.
“네가 원하는 만큼 시간을 벌어주마.”
현라는 피식 웃으며 한쪽에 가부좌를 틀었다. 다음으로 그의 시선이 향한 것은 한제가 아니라 고신 여인이었다.
“내력이 어떻든 우리 도고 일맥에 속한 사람이다. 우리 고족 중 여인은 매우 드물지. 심지어 소질 또한 상당하군. 내 유일한 제자의 첩으로 삼기에 좋겠어.”
현라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그 사이 한제의 체내에서는 엽막의 피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심신이 진동하면서 가부좌를 튼 한제의 몸은 펑, 펑 소리와 함께 급속도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1천 척으로 불어났다.
피에 담긴 도고의 힘은 한제에게 더없이 유용했다. 덕분에 한제의 몸은 회복됐을 뿐만 아니라 전보다 한층 강력해졌고 골격 또한 훨씬 단단해졌다.
피와 살도 마찬가지였다. 한제의 체내에서 발산된 무시무시한 기운에 여자 고신조차 흠칫 놀랄 정도였다.
이제 한제 체내에 깃든 도고 엽막 원신은 완전해졌다.
한제가 호흡하자 그 뒤로 엽막의 허상이 나타났다.
전투 때 나타나는 엽막의 허상과 생김새는 비슷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전혀 달랐다.
전투 시 소환됐던 허상은 한제 체내의 완전하지 못한 유산에 포함된 도고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때문에 그 허상을 소환할 때마다 한제는 도고 유산의 기운을 조금씩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나타난 허상은 한제의 심신에서 기인한 것으로 엄밀히 말해 보통의 허상이 아니라 엽막의 원신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원신의 피가 완전히 응집되자 허상은 점점 또렷해져 이제 거의 실체처럼 보일 정도였고 강력한 기운이 발산됐다. 그의 피를 통해 탄생한 세 고족 구성원이라면 이 기운 앞에서 선조를 만난 듯한 느낌을 받을 터였다.
여자 고신은 엽막의 심혈을 내보냈으나 체내에는 엽막의 피가 깃들어 있었기에 여전히 고신이었다. 그녀는 한제로부터 발산된 위압감에 창백하게 질려 천천히 엎드렸다.
현라는 한제의 뒤로 나타난 엽막의 원신을 보고는 안타까운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엽막… 천부의 자질을 타고나 동부계 내의 세 고족을 탄생시켰지. 네가 이한제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만 그의 육신을 빼앗을 생각이라면… 그건 불가능할 텐데?”
현라는 두 눈을 감았다. 만약 한제와 무관했다면 이 상황에서 분명 엽막을 도왔겠지만 그는 이미 선택을 내린 상태였다.
당시 엽막이 뿌린 피에는 원신의 피도 몇 방울 섞여 있었다. 그 모든 원신의 피를 한데 모은다면 엽막의 원신이 나타나 그 피를 모은 이의 육신을 빼앗으려 할 터였다. 원신의 피를 모은 사람이라면 그 혈맥을 이어받았을 테니 탈취 또한 실패할 리가 없다.
그러나 한제는 달랐다. 이미 고조의 인정을 받고 혼혈을 얻은 지금의 한제는 엽막보다 더 존귀한 존재였다. 그러니 엽막이 그런 한제의 육신을 빼앗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엽막의 원신이 움찔하더니 일곱 갈래의 연기로 나뉘어 한제의 칠규를 통해 체내로 뚫고 들어갔다.
그 순간, 한제는 두 눈을 번쩍 떴다. 허나 전혀 당황한 기색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이미 예측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엽막이 자신의 육신을 빼앗지 못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세 시진이 지났을 때, 한제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의 몸은 어스름한 빛을 번득이면서 천천히 줄어들어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한제의 두 눈은 우주를 담은 듯 깊었고 체내에서 엽막의 원신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혼혈을 가진 한제에게 천천히 녹아들어 도고의 유산의 일부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보통 때였다면 수개월 이상 치료했어야 할 한제의 몸은 이미 완전히 회복되었다. 또한 도고의 유산은 절반 정도 완성된 상태였다. 남은 것은 왼쪽 눈과 오래된 무덤에 묻힌 도고의 심장, 왼팔뿐이었다.
숨을 고르던 한제는 얼음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현라가 서 있었다.
현라는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한제와 눈이 마주친 듯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제의 시선은 그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방금 전의 시선은 그저 고개를 돌리던 중에 마주친 것에 불과하다는 듯이.
한제는 몸이 완전히 회복됐을 뿐만 아니라 체내에 강력한 힘이 깃든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주먹질 한 번으로 온 세상을 파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또한 도고의 힘은 매우 편안하게 느껴졌다.
‘진정한 유산이란 이런 것인가? 모든 전승이 고통스럽기만 한 것은 아닌 모양이군’
뼈마디 하나, 근육 하나 놓치지 않고 도고의 힘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원신은 부드러운 빛을 발했다.
언제라도 본원과 융합하여 신통술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간과 두 눈에는 여전히 여덟 개의 반점뿐이었지만 이 반점들은 이전보다 훨씬 또렷하고 단단해진 상태로 더 밝게 빛났다.
또한 한제는 얼음으로 봉인된 이 세상 깊은 곳에서 누군가의 부름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당시 운해성역에서 엽막의 오른팔로부터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 좀 전까지만 해도 들리지 않았던 부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