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29
콰쾅!
이내 굉음과 함께 사내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고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동시에 곳곳에서 웅성이던 소리는 뚝 끊겨버렸다.
“멍하니 뭣들하고 있느냐!”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한 팔을 잃은 여문염이 궁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얼굴은 창백했으나 눈빛만큼은 싸늘하게 번득였다.
그의 뒤로 역시 창백하게 질린 염란이 따라 나왔다.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옷 곳곳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곁에 선 허동덕 역시 중상을 입고 잔뜩 허약해진 상태였다.
뒤이어 다른 종파에서 파견된 공겁기 초기 수련자들도 어두운 얼굴로 조용히 따라붙었다.
이들은 궁전 상공으로 떠올랐다. 주씨 노인도 창백한 얼굴로 뒤따랐다.
여문염은 대지를 슥 훑어보았다. 그는 주위의 동굴에까지는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궁전 근처에 모여든 이들만 살폈다.
“아직 가장 큰 위기는 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혼란을 키우려는 자가 있다면 이 여문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주 도우, 자네가 설명하게.”
여문염은 말을 마치며 가장 뒤에 선 주씨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심신이 바르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얼른 고개를 끄덕이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천우주 수련자들을 바라보았다.
‘휴우, 이런 불편하고 귀찮은 일은 다 내 몫이지. 제길.’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이내 포권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여러 도우들은 듣게. 자네들도 알다시피 난 극천 초원 지하 궁전의 관리자인 주…”
“쓸데없는 말은 삼가게!”
여문염이 미간을 홱 찌푸린 채 일갈했다.
주씨 노인은 흠칫 놀라 몸서리를 치더니 얼른 본론을 꺼냈다.
“이곳은 천우 세 번째 혈이라네. 이곳에는 마지막 수단이 남아 있어. 그 수단을 활용한다면 모두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으니 당황하지 말게. 그 수단은 도우들이 지닌 모든 힘을 내놓아 천우의 혼을 소환해 혼개(魂鎧)로 만들어야만 해. 혼개를 착용하면 천우 혼의 힘을 빌려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
주씨 노인의 설명에 1천여 명의 수련자는 또 다른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들로서는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천우주가 죽은 천우로 인해 형성된 곳이라는 소문에 의구심을 품어왔건만 천우의 존재가 사실이었다니!
게다가 그 혼을 소환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그들로서는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천우의 혼개를 입는 것은 어느 정도 위험이 따르는 바!, 하여 상의를 한 결과 우리 중 수준이 가장 높고 큰 공을 세운 여 장로가 그 역할을 맡기로 했다네.”
주씨 노인의 말에 멀리 떨어진 동굴에 있던 한제가 두 눈을 기이하게 번득였다. 그는 혼개를 착용하는 데 위험이 따른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여문염이 혼개를 착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분명 큰 이득이 따르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지 않고서야 여문염이 스스로를 희생하려 할 리 없으니까.
“혼개를 착용하는 것은 분명 위험하다. 허나 천우주가 위기에 봉착한 상황에서 이 여문염이 어찌 도우들에게 그 위험을 넘길 수 있겠는가! 혹여 비극적인 상황이 생겨 내가 죽음을 맞거든, 매해 이날, 이 여문염을 위해 술이나 한 잔 올려주게. 이 여문염은 그거면 충분하네.”
여문염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뒤에 선 염란의 눈에 혐오의 빛이 미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 역시 궁전에서 상의할 때부터 천우의 혼개가 엄청난 기회이자 행운임을 한눈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천우의 혼을 소환해 갑옷으로 만들어 착용하면 수준이 증폭한다. 일시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이 경험은 후에 진정한 수준을 높일 때에도 큰 도움이 된다.
다만 이런 기회를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천우의 혼과 일정한 연계를 가진 사람이어야 하는데 천우의 혼과 관계가 밀접할수록 그 수준은 더욱 크게 증폭한다.
허나 이런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우선 천우 칠혈의 진을 활성화한 상태여야만 하는 데다가 천우의 혼을 소환할 수 있는 횟수 자체가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우의 혼은 너무 많이 소환하면 무너져 내려 온 천우주에 끔찍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만약 그런 부작용을 무시하고 억지로 천우의 혼을 불러내려 하다가는 황족에게 징벌을 받는다. 이는 선족 구역 전역에 내려진, 어길 수 없는 명령이다. 위반할 경우 한 사람과 한 종파를 뛰어넘어 천우주 전체가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것기에 누구도 감히 이를 위반하지 않았다.
허나 지금 천우주는 그 봉인에 손을 대야 할 만큼 큰 위기를 맞았다.
당연히 염란도 이 기회를 갈망했다. 허동덕도 다른 종파에서 파견을 온 다른 세 명의 공겁기 수련자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들로서는 여문염과 그 기회를 두고 다툴 수 없었다. 현재 여문염이 부상을 입어 전보다 훨씬 약해진 상태라고는 해도 당해낸다는 보장이 없는 데다가 이번 전투에서의 공으로 따지자면 그가 가장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도 지하 궁전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목에 떨어질 칼처럼 압박을 가해왔다.
“모두 가부좌를 틀고 지닌 바 모든 힘을 발산해 천우에 집중하도록!”
여문염은 벅차오르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그로서는 오랜 세월 기다려온 기회였다. 어차피 천우 혼개를 착용하는 데 따르는 위험은 크지 않고 이번에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를 포함해 천우의 나머지 여섯 혈에서 같은 행운을 얻게 될 자들과 함께 그는 천우주에 명성이 자자해질 터였다.
1천여 명의 수련자가 하나둘 가부좌를 틀었다. 그들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여문염의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염란 등도 불만스럽긴 했지만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가부좌를 틀었다. 유일하게 서 있는 것은 여문염 뿐이었는데 그는 이제 격앙된 감정을 감추지도 못한 얼굴로 주씨 노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주씨 노인이 얼른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고 자신만 알아들을 수 있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가 수준이 낮은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책임자가 된 것도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배려를 받는 것도 모두 그의 체질이 천우의 혼과 소통하는 데 퍽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녹마주의 녹마사자와 비슷한 천우시종이었다.
한제는 동굴 안에서 상황을 지켜볼 뿐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난 동의하지 않네만
동굴 밖의 주씨 노인은 혀끝을 깨물어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이어서 그 피를 오른손으로 움켜쥐어 붉은 문양 하나를 그렸다.
“천우의 혼!”
주씨 노인은 매우 진중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문양을 내던졌다. 그러자 문양은 무궁무진한 붉은 빛을 번득였는데 그 빛은 곧 지하 궁전을 완전히 뒤덮었다.
“도우들, 모든 수준을 발휘해 힘을 저 빛에 모으게!”
주씨 노인의 우렁찬 외침에 1천여 명의 수련자는 가부좌를 튼 채 각자의 힘을 발산했다.
줄기줄기 파문이 위로 확산되는 사이, 마지막 수련자까지 가진 힘을 모두 발산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의 힘은 모두 이곳을 뒤덮은 붉은 빛에 의해 흡수됐다. 강렬한 붉은 빛은 이들의 모든 수준을 빨아들인 뒤 붉은 문양으로 되돌아왔다.
이어서 격렬한 소리와 함께 이 문양은 회색 안개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안개는 붉은 문양을 중심으로 지하 궁전 상공으로 피어올라 거대한 회오리를 형성했고 점차 빠르게 회전했다.
콰쾅! 쾅!
“크아아아!”
요란한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기이한 공간과 이어진 듯한 회오리 깊은 곳에서 짙은 원한이 어린 듯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이 포효가 지하 궁전은 격렬하게 진동시키자 1천여 명의 수련자는 창백한 얼굴로 피를 왈칵 토해냈다. 심지어 염란을 비롯한 이들 역시 그 포효에는 경악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천우의 포효였다.
유일하게 여문염만은 이제 더 이상 흥분을 숨기지 못하고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두 눈은 갈망과 탐욕으로 번득였다.
한편, 한제는 동굴 안에서 하늘에 나타난 회오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데 심신을 파고드는 천우의 포효는 그에게 낯설지 않았다.
붉은 문양이 천우의 혼을 소환하는 것이 1단계라면 수련자들이 모든 힘을 모아 천우를 봉인해둔 공간으로 이어지는 회오리를 응집하는 것이 2단계였다.
“자 이제 모두 9량(兩) 9전(錢)의 피를 내어 바치도록! 그보다 많아서도 적어서도 안 돼! 얼른 오른손 검지를 들게!”
주씨 노인은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손가락 끝에 상처가 나더니 아홉 방울의 피가 흘러나왔다.
1천여 명의 수련자 역시 오른손을 들어 올려 주씨 노인의 안내에 따라 피를 바쳤다.
이들의 피는 순간 응집해 붉은 사슬을 형성했다. 사방을 휩쓸며 회오리를 향해 달려든 사슬의 한쪽 끝은 회오리 깊은 곳으로 들어갔고 반대쪽 끝이 힘차게 당겨졌다.
“쿠오오오!”
또다시 천우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붉은 사슬은 더더욱 팽팽해졌고 천우의 포효는 점점 격렬해졌다. 그럴수록 여문염의 표정에는 더욱 큰 탐욕과 갈망의 빛이 어렸다.
‘천우 혼개가 있으면 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어! 이번 전투가 끝날 때까지 절대 혼개를 벗지 않으리라!’
여문염은 회오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여문염이 한제를 적대시한 이유는 자신의 지위에 위협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청우 진인이 한제를 대하는 모습에서 위기의식을 느낀 것이다.
한편, 붉은 사슬은 계속해서 당겨졌고 천우의 포효는 점차 또렷해졌다. 그리고 뒤이어 회오리 안에서 천우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허나 이 과정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붉은 사슬이 더 이상 천우를 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이에 여문염의 두 눈이 서늘하게 번득였다.
“주 도우!”
그는 고개를 홱 돌려 주씨 노인을 노려보더니 그 뒤의 염란 등을 훑어보았다.
주씨 노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으며 염란 등에게 포권을 했다.
“천우의 혼이 나오지 않고 있네. 부디 공겁기 수준에 이른 자네들이 원신을 방출해 힘을 보태주게!”
주씨 노인은 말을 맺음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자신의 미간을 두드렸다. 그러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원신이 튀어나오더니 작은 사람의 모습이 되어 회오리 쪽으로 돌진해 붉은 사슬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여문염은 서슬 퍼런 눈으로 다른 종파들에서 파견을 나온 공겁기 초기 수준 수련자 세 명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원신을 꺼내더니 주씨 노인의 원신 곁으로 다가가 사슬을 잡아당겼다.
“염 장로 허 장로!”
뒤이어 여문염은 염란과 허동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은 소름 끼치도록 서늘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염란은 가부좌를 튼 채 허동덕과 함께 원신을 내보냈다. 그들의 원신 역시 붉은 사슬을 움켜쥐더니 공겁기 수준의 위력을 발휘해 힘껏 당기기 시작했다.
“쿠오오오!”
거대한 회오리 안쪽에서 천우의 포효가 또 한 번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지하 궁전 전역에 울려 퍼졌을 뿐만 아니라 지면 위까지 흘러나갔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천우의 허상이 회오리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녀석에게서 발산된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사방을 뒤덮었다.
천우의 허상이 나타난 순간 발산된 밝은 빛은 천우주 수련자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들은 질식할 듯한 충격에 사로잡힌 채 천우의 허상이 급속도로 수축해 한 벌의 갑옷으로 변하더니 회오리 위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어스름한 색의 갑옷에서 발산되는 영혼의 기운은 막강했다.
갑옷이 나타난 순간, 염란 등은 원신을 거두었고 여문염은 호탕하게 웃으며 갑옷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천우 세 번째 혼의 혼개는 이 여문염의 것이다! 크하하하!”
호기롭게 외친 그가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근처 동굴에서 튀어나온 한 줄기 빛이 엄청난 기세로 갑옷을 향해 돌진했다.
“난 동의하지 않네만!”
얼음장처럼 서늘한 목소리는 거친 파도처럼 힘차게 울려 퍼졌다.
염란의 가늘게 뜬 두 눈에는 놀람과 동시에 기쁜 기색까지 드러났다. 그녀 자신도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문염보다는 한제가 혼개를 갖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면 주씨 노인은 두려움에 질린 듯했고 허동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기이한 표정이었다.
그들만이 아니라 모든 천우주 수련자가 뜻밖의 상황에 흠칫 놀랐다. 제아무리 부상을 당했다 해도 여문염의 수준은 그대로였다. 그런 여문염에게 정면으로 반박하는 자가 누구인지 의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