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06
“연도비는 돌아온 이래 내내 저 모양이었다. 기억이 흐릿해졌다가 또렷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어. 정신이 조금 돌아오면 너를 알아볼 것이다.”
선황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지금의 그는 대천존도 선황도 아닌 그저 한 청년의 형일 뿐이었다.
한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광인을 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조성에 발을 들였지만 상대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슬픔은 어느덧 사그라졌다. 그저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더 이상 도전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이한제, 천존열 열일곱 번째 층을 통과한 너를 선족의 마흔아홉 번째 약천존으로 책봉하겠다! 본래 백발이라는 별칭이 있었던 데다가 방금 전 천사 흉수로부터 하얀 머리카락 한 올을 얻기까지 했으니 백발 약천존이라 불려도 문제없겠지!”
한제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사실은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선족의 약천존이라면 누구나 선조가 폐관수련을 하던 곳에서 깨달음을 얻을 기회를 갖게 된다. 그곳에서 엄청난 행운을 얻고 훗날 대천존이 될 기반을 단단히 다질 수 있을 터! 수준 역시 적잖이 높아질지도 모른다.
이러한 기회는 선황의 혈맥을 타고난 사람이라도 평생 세 번, 그렇지 못한 수련자는 약천존에 등극했을 때 한 번만 얻을 수 있다. 매우 얻기 어려운 기회인 셈이지.”
선황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한제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이었다.
“이한제, 너와 나 사이의 오해는 이만 풀었으면 한다. 이제 너는 선조가 폐관수련을 하던 곳으로 가 깨달음을 얻고 후에 선족의 여섯 번째 태양이 될 준비를 하도록 하라! 그렇게 선족의 대들보가 되어 선조의 위엄을 널리 떨치도록 하라!”
선황은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하더니 곧 전송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게 가족이라고는 동생인 저 녀석밖에 없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조가 폐관수련을 하던 곳으로 가라. 내 연도비 녀석에게도 그곳에 가라 이르겠다. 어쩌면 너를 만나고 녀석이 천천히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녀석을 발견했을 당시 녀석의 곁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도 이미 깨어나 선조가 폐관수련을 하던 곳에서 수련하고 있지.”
한제를 바라보는 선황의 표정은 아주 온화했다.
“감사합니다, 선황 폐하. 제가 이곳에 온 것은 그저 책봉식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책봉식도 끝이 났으니 돌아가야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선조께서 폐관수련을 하셨던 곳은 후에 가보겠습니다.”
한제는 선황을 향해 공손히 포권을 했다.
선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권하지 않았다.
한낮이 되어 책봉식이 끝나자 광장에 모였던 수련자들은 하나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한제 역시 황궁에서 조금 더 머무르라는 선황의 제안을 거절하고 전송진으로 향했다.
그는 이부로 돌아가지도 않고 해룡과 유금표만을 이끌고 동성의 어느 객잔으로 들어갔다.
“광인⋯⋯ 기억은 잃은 듯하지만 행복해 보였다. 그거면 충분해.”
창문 앞에 앉은 한제는 어느새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떠날 시간이군. 허이국을 데리고 조성을 떠나 고족 구역으로 간다!”
한제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선족 구역에서 수많은 일을 겪은 덕에 지금과 같은 지위와 수준을 얻었지만 그 어떤 것도 친하게 지냈던 벗이 기억을 잃은 모습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어쩌면 내가 선황을 오해한 것인지도…”
한제는 조용히 책봉식에서의 일들을 떠올렸다. 사실 그가 선황과 갈등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뭔가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선조가 폐관수련을 했다던 곳으로 갈 수는 없다. 내가 선황을 오해한 것이든 아니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한제는 점차 어두워지던 창밖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처마의 등불에 빛나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깃털처럼 날리다가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데 눈보라가 점차 거세지던 그때, 누군가가 한제가 묵고 있는 객잔의 방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은, 매우 온화한 소리였다.
“해자 천존.”
돌아선 한제가 방문을 살짝 열어주었다. 밖에는 예상했던 대로 해자 천존이 미소를 띤 채 서 있었다. 어깨 위로 늘어뜨린 긴 머리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어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했다.
“조성에까지 와 놓고 제산에는 와보지도 않다니⋯⋯. 지금 제산에는 낙엽은 없고 오직 눈뿐이야. 스승님 지시로 자네를 제산으로 초청하러 왔어.”
“구제 대천존의 초청이라면 당연히 응해야지.”
한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 ★ ★
달빛이 내린 거리. 갈수록 거세지는 눈보라에 인적이 줄어갔다. 한제와 해자 천존 뒤로 남은 네 개의 발자국은 빠르게 눈에 덮여 사라져갔다.
“조성에서는 특정 구역을 제외하면 금제 때문에 마음대로 순간이동을 할 수가 없어. 하지만 근처에 제산으로 통하는 전송진이 있지. 보아하니 곧 떠날 모양인데 언제 떠날 생각이지?”
해자 천존이 한제를 힐끔거리며 물었다.
“제산에서 내려오는 대로 떠나야지…”
한제는 뽀득뽀득 소리가 나도록 쌓인 눈을 밟으며 덤덤하게 답했다.
사방은 고요했다. 바람 소리마저 사라진 듯했고 긴 거리 양옆으로 늘어선 집들 어디에도 불을 밝힌 곳은 없어 거리는 더욱 음산하고 소슬해 보였다. 내리는 눈에는 심지어 살기가 어린 것 같았다.
걸음을 우뚝 멈춘 한제는 밀려드는 강력한 위기감에 서늘한 눈빛을 번득였다. 해자 천존 역시 굳은 표정으로 사방을 돌아보았다.
“봉인의 파동이야!”
“난 누구에게도 목적지를 밝힌 적이 없어!”
해자 천존이 얼른 변명했다.
먼 곳으로 향한 한제의 눈빛이 한층 싸늘하게 변했고 불어오는 눈보라 역시 더욱 거세어졌다.
눈보라는 여인의 울음처럼 처량한 소리를 내며 불었고 달은 바람에 별은 눈에 가려졌다. 덕분에 한제와 해자 천존이 걷던 거리는 살기를 품은 어둠에 잠기게 됐다.
한제와 해자 천존이 멈춰선 순간, 긴 거리의 저쪽 끄트머리로 무수히 많은 눈송이가 빠르게 하나로 뭉쳐 9999개의 눈송이로 이루어진 네모 도안을 형성했다.
이 도안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엄청난 속도로 한제와 해자 천존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 와중에도 점점 많은 눈송이를 끌어들여 더욱 커져 어느새 폭이 1천 척에 달했다.
동시에 한제와 해자 천존의 뒤쪽 거리 끄트머리에서도 휘, 휘 소리와 함께 세모 도안이 생겨났다. 이 도안 역시 하늘을 뒤덮을 듯 짙은 살기를 발산하는 한편 대량의 눈송이를 빨아들이며 돌진해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네가 뒤를 맡아! 난 앞을 맡지!”
한제는 위기감을 느끼며 외쳤다. 이 상황 자체는 해자 천존과 관련이 있겠지만 한제는 그녀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한 걸음 앞으로 나선 그는 엄청난 기세로 네모 도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해자 천존의 아름다운 얼굴에서는 분노가 느껴졌다.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미행해 한제를 해치려 했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게 누군지는 몰라도 상대가 성공한다면 이는 선족 전체에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고 그랬다가는 자신의 스승도 연루될 수밖에 없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한제가 자신을 오해할까 걱정이 됐지만 뒤를 부탁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자신을 믿고 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하지만 이 함정을 파놓은 자를 향한 살기는 더욱 짙어졌다.
몸을 휙 돌린 해자 천존은 한 줄기 빛을 그리며 세모 도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무렵, 단 세 걸음 만에 네모 도안 앞에 이른 한제는 그 도안에 휩싸이기 직전에 천우의 혼 문양으로 온몸을 뒤덮었다. 그는 처음부터 전력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한제는 주먹을 휘두르며 아흔여덟 개의 잔상을 소환했다. 그렇게 눈보라가 몰아치는 거리 위에 소환된 아흔여덟 개의 잔상은 동시에 주먹을 휘두르며 한제의 본체와 융합했다.
한제의 주먹에는 스물세 개의 신통술이 녹아들어 있었다. 스물세 개의 신통술을 아흔아홉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하다 보면 힘이 달려 일부는 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한제는 주먹을 날리는 와중 세 번 멈추었다. 처음으로 멈췄을 때는 오행진신의 위력 덕분에 스물세 개의 신통술이 마흔여섯 개로 증폭됐다. 그리고 두 번째로 멈췄을 때는 예순아홉 개로 늘어났다.
뒤이어 네모 도안과 접촉하려는 순간, 세 번째로 멈춘 한제의 주먹에 담긴 신통술은 전보다 더욱 증폭되면서 그가 허상의 본원을 동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개수인 아흔두 개에 달했다.
콰쾅!
혼개의 위력을 빌린 상황에서 발휘한 아흔두 개의 신통술이 아흔아홉 번의 주먹질에 실려 네모 도안에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했고 한제를 중심으로 반경 1천 척의 눈송이는 사방으로 밀려났다.
퍼펑!
네모 도안은 바르르 진동하더니 폭발했다. 한제의 주먹질 한 번에 그대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기이한 힘은 한제의 주먹을 타고 체내로 뚫고 들어갔다. 한제의 체내로 파고든 이 힘은 한 층의 세밀한 그물이 되어 그의 경맥과 피와 살에 기생하듯 봉인을 형성했다.
봉인 안에 담긴 기이한 힘을 한제는 도무지 간파할 수 없었다. 그저 무(無)에 속한 힘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국사 상현도!’
한제의 체내에 봉인이 형성되어 그의 움직임이 느려진 순간, 전방에서 불어닥친 바람 속에서 세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눈보라로 온몸을 감싸 생김새를 제대로 살필 수 없는 세 사람은 마치 허상처럼 모습을 드러내더니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그러자 눈보라로 세 개의 오른손 손바닥 허상이 응집되더니 한제에게로 돌진해왔다.
한제의 양옆으로도 각각 세 사람이 나타났다. 이들 역시 눈보라로 온몸을 감싸 누군지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중 왼쪽에서 나타난 세 사람은 오른손 엄지를 오른쪽에서 나타난 세 사람은 왼손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려 동시에 한제를 가리켰다.
뿐만 아니라 뒤에서도 눈보라로 모습을 감춘 세 사람이 나타나더니 결인을 그리던 왼손을 펼쳐 한제 쪽으로 뻗었다.
끝이 아니었다. 하늘 위에서도 세 사람이 모습을 감춘 채 나타났고 오른손에 쥔 은색 검을 휘두르며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앞뒤, 좌우, 그리고 위까지 총 열다섯 명이 공격해오는 상황! 게다가 하나하나의 수준이 천존에 이르렀고 한제는 봉인되기까지 한 상황이었다.
피 튀기는 전투
“하앗!”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낮은 기합을 넣었다. 그리고는 곧장 혼개의 모든 위력을 발휘했고 동시에 체내에서 도고의 힘까지 동원했다. 덕분에 그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해진 육신을 갖게 된 그가 오른발로 대지를 강하게 굴렀다.
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땅과 산이 뒤흔들렸다. 동시에 한제는 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허나 앞이 아닌 뒤로 쏘아져 나감으로써 뒤에서 나타난 세 사람이 소환한 왼손 손바닥과 등으로 부딪혔다.
콰쾅!
“우웩!”
한제의 뒤에 나타났던 세 인영은 일제히 피를 토해냈다. 한제의 체내로 밀려들었던 이들의 힘은 한제의 강력한 육신에 떠밀렸고 세 사람의 몸을 뒤덮었던 눈보라가 흩어지면서 그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모두 낯선 이들이었다.
화들짝 놀란 세 노인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허나 한제는 이미 뒤로 돌진하던 속도를 이용해 그들을 추월해 두 손으로 각각 한 사람의 머리통을 쥐더니 그대로 으스러뜨렸다.
퍼펑!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두 사람을 단숨에 처리하고 그들의 원신까지 취한 한제는 남은 한 사람과는 몸통으로 충돌해 그대로 뭉개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 세 사람이 죽었으나 남은 열두 명은 멈추지 않고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엄청난 속도로 삽시간에 한제에게로 돌진하는 그들 중 전방의 세 사람은 혀끝을 깨물어 피를 뿜어낸 뒤 혈둔술을 발휘해 속도를 더욱 증폭시켜 어느새 5척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