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27
노인이 공손하게 답했다.
“도고국에서 왔다면 도고 황성까지의 지도를 가지고 있겠군.”
한제는 두 여인에게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며 덤덤하게 말했다.
노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옥패를 하나 꺼내 한제에게 공손히 건넸다.
한제는 옥패를 대강 확인하더니 몸을 돌려 고마의 머리에서 내려갔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곧장 떠날 생각이었다. 황자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선배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황자가 다급히 외치더니 몸을 훌쩍 날려 한제 앞에 이르렀다. 그는 한제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더니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계도라 합니다. 선배님께 불손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제 잘못을 배상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래? 어떻게 배상하겠다는 거지?”
한제가 기이한 표정으로 물었다.
황자는 정신을 번쩍 차린 듯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도고 사절단을 보낸 뒤 반드시 선배님께서 흡족해하실 만한 사죄를 하겠습니다.”
그 말에 한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자는 곧장 양운에게 외쳤다.
“송세정을 데려와 도고 사절단과 함께 보내도록 하라.”
잠시 후, 흑석성 성문 안에서 청의를 입은 여인이 걸어 나왔다. 그 아름다움이 절륜하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맑은 기운을 짙게 풍겼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나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제와 그녀의 눈빛이 허공에서 만났다.
★ ★ ★
검은 대지 위로 가을바람이 불었다. 서늘한 듯하면서도 아직은 따뜻한 시기였다. 흑석성 외부를 두른 울창한 산과 숲에서는 마른 낙엽이 바람에 실려 흩날렸다.
노란색 낙엽 하나가 허공에서 맴돌다가 흑석성 밖, 한 쌍의 남녀가 마주친 시선을 갈랐다. 낙엽은 다시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고 한제는 시선을 거두었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청의의 여인은 고요의 혈맥을 타고 났지만 요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하얀 연꽃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느낌뿐이었다.
여인의 오른쪽 눈 아래에는 크지 않은 점이 하나 있었다. 그 점은 그녀의 청순함을 깎아먹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간의 요염함을 더해주었다. 덕분에 절세미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은 뭇 사내의 가슴을 뛰게 할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송세정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세밀하고 정교하게 생긴 여인이었다.
“송세정, 황자님과 도고 사절단을 뵙습니다.”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성이 송이라고요? 저 여인이 황자께서 말씀하신 그 사람입니까?”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고마 노인이 진중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성이 송이다.”
계도 황자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 생각이 맞아. 저 여인은 우리 시고에서 배출한 대천존 가문의 분파 출신이야. 대천존의 가문은 워낙 크다 보니 저 여인과 대천존의 관계는 먼 편이지만 어쨌든 저 여인의 가문은 이 흑석성에서 꽤나 명망이 있지.”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황자님. 만약 저 여인이 비로 선택받지 못한다면 곧장 다시 데리고 오겠습니다.”
고마 노인은 계도 황자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좋다. 송세정, 너는 도고 사절단을 따라가도록.”
계도 황자는 이 일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는 짧게 명을 내리고는 존경심이 담긴 눈으로 한제를 돌아보았다.
송세정이라는 여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는 듯했으나 감히 그 명을 거절하지 못하고는 아랫입술을 꼭 깨문 채 고마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한제의 곁을 스쳐 가면서 살짝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하고는 다시 고마를 향해 나아갔다. 여인의 맑은 체향이 점차 멀어져갔다.
고마의 머리 위에 올라 노인의 곁에 이른 여인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얼굴을 덮었다. 허나 고향을 향한 그녀의 눈빛과 그 안에 담긴 슬픔과 아쉬움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내가 비로 선택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나는 그리 아름답지도 않으니 분명 선택되지는 않겠지. 이모, 동매야, 좀만 기다려.’
고개를 숙인 여인의 눈에는 어느새 살짝 눈물이 맺혔다.
송세정을 맞이한 도고 사절단은 계도 황자와 한제를 향해 포권을 하더니 고마를 탄 채 한 덩어리 검은 안개가 되더니 하늘의 균열을 통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곳에서 도고 황성까지는 매우 멀었다. 거대한 고마를 타고 이동한다 해도 수개월은 걸릴 터였다.
도고 사절단이 떠난 뒤 흑석성 밖에 모여 있던 양운 등은 황자의 손짓에 공손히 물러났다.
잠시 후 성 밖이 텅 비면서 한제와 덜덜 떨고 있는 고요, 계도 황자와 그 뒤의 여인만 남게 됐다.
“아직 선배님의 함자도 듣지 못했군요.”
계도 황자는 미소를 띤 채 포권을 했다.
“이한제다.”
한제는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이 선배님이셨군요. 근처 유군(幽郡)에 행궁이 하나 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그곳에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방금 전 제 실수에 대한 배상도 하겠습니다.”
계도 황자에게서 이전의 냉랭하고 거만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한없이 공손하고 겸손한 그의 태도에 한제의 눈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번득였다.
‘황권도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구나. 고족의 황권이 대천존을 압박할 수 있는 것은 사실 고도 대천존 덕분이겠지. 언젠가 고도 대천존의 위협이 사라지면 고족의 황권은 점차 약해져 선족과 다를 바 없어질 거야!’
한제는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계도 황자는 매우 기뻐하며 한제를 먼저 고요에 태웠다. 그의 곁에 있던 여인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듯했지만 황자의 매서운 눈길에 입을 다물었다.
거대한 고요는 한제가 머리에 탄 뒤로 매우 온순해졌다. 두 눈은 여전히 붉었지만 더 이상 광기는 느껴지지 않았고 날카롭게 울부짖지도 않았다. 그저 몸을 훌쩍 날려 하늘의 균열 사이로 사라질 뿐이었다.
잠시 후, 찢기듯 생겨났던 균열은 천천히 흩어져 사라지면서 하늘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양운과 공사, 맹락은 거대한 고요가 떠나는 순간 짙은 위엄이 어린 냉랭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선배님과 관련된 이야기를 밖으로 발설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퍼져 나간다면 너희 세 사람의 구족을 멸할 것이다!”
계도 황자의 목소리였다.
★ ★ ★
시고 일맥이 점거한 열두 개의 군 중 유군은 언제나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유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이 유군 아래에는 한 덩어리의 안개가 봉인되어 있다고 했다. 그 안개는 또 다른 형태의 생명으로 고조에게 사로잡혀 이곳에 봉인됐다는 것이다.
유군에는 산들이 말발굽 형태로 빙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 있었다.
그 안쪽에 자리 잡은 행궁에서는 매우 강력한 기운이 풍겼다. 또한 수많은 하인과 호위병이 행궁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 행궁의 상공을 뒤덮은 안개가 돌연 격렬하게 꿈틀거리더니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드러난 밤하늘에는 한 줄기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고 그 사이로 몸길이가 수십만 척에 달하는 거대한 고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행궁의 하인과 호위병들은 곧장 바닥에 꿇어앉았다.
“어서 오십시오, 황자님!”
한 사람이 목소리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외침과 공손한 태도 열광적인 표정을 통해 이들이 계도 황자를 얼마나 고귀한 존재로 여기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고요는 순식간에 행궁으로 향하더니 청석이 깔린 거대한 광장 위를 몇 바퀴 맴돌았다. 자신을 위해 마련된 광장에 쾅 하고 내려선 고요는 한쪽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갖다 댔다.
한제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고요를 타고 내려왔다. 황자와 뾰로통해 보이는 여인이 그를 뒤따랐다.
“훌륭한 고요로군.”
한제는 순종적인 고요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배님의 칭찬을 듣다니, 이 녀석도 아주 영광스러울 겁니다. 아바마마께서 내려주신 놈으로 저를 태우고 돌아다니며 보호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보기 드물게 거대한 녀석은 본디 저희 시고 일맥의 금위(禁衛) 전사였으나 안타깝게도 스물일곱 개의 반점을 융합한 뒤 고조의 인정을 받는 데 실패하는 바람에 요체(妖體)로 퇴화하면서 지능을 잃었지요.”
계도 황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요를 슥 훑어보더니 돌아서 행궁을 살폈다.
황자는 그런 한제를 보며 잠시 망설이다가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선배님께서 이 고요가 마음에 드신다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뭐?”
한제는 약간 놀란 듯 되물었다. 허나 계도의 표정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아까 말한 배상인가?”
“그럴 리가요. 겨우 탈것에 불과한 고요를 가지고 어찌 제 잘못을 무마하려 들겠습니까? 선배님, 일단 궁으로 드시지요.”
계도 황자는 미소를 지으며 한제를 궁 안으로 안내했다.
퇴로
광장의 대전은 매우 화려했고 패기가 느껴졌다.
한제가 대전에 발을 들이자마자 황급히 몇 걸음 앞으로 달려 나온 계도 황자는 한제를 향해 포권을 하더니 진중한 얼굴로 급기야는 허리까지 굽혔다.
“시고 황자 계도 백발 약천존을 뵙습니다!”
이어진 계도 황자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여인이 놀란 듯 탄성을 내질렀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몇 걸음 물러난 그녀는 입까지 틀어막았다. 그만큼 오라비가 방금 내뱉은 말은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백발 약천존!
세 고족은 언제나 선족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특히나 새로운 강자의 등장에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한제가 선족에 있었을 당시 떨쳤던 유명세 역시 당연히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