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28
특히 한제에 대해서는 선족의 다섯 대천존보다더 더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섯 대천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것을 파악한 반면 그들 아래 최강자인 백발 약천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한제조차 드물게도 놀란 듯 눈이 커졌다. 계도 황자를 향한 그의 두 눈은 천천히 서늘해졌다.
“선배님을 떠보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흑석성은 선족 구역과 고족 구역을 가르는 바다와 인접한 곳이고 선배님은 천존에 버금가는 강력한 고요를 두려움에 떨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본명까지 밝히셨지요. 또한 저는 선족 강자들의 초상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선배님의 초상화도 갖게 됐지요. 세 고족의 황실 사람들만 볼 수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선배님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할 것입니다.”
계도 황자는 한제의 서늘한 눈빛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차분히 설명했다. 몸을 굽힌 상태에서 초상화가 든 옥패를 꺼내 한제에게 공손히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제는 여전히 냉랭한 얼굴로 그 옥패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옥패에는 선족 내 다섯 대천존과 모든 약천존이 초상이 담겨 있었다. 천존의 초상 역시 적지 않았다. 허나 오직 자신과 다섯 대천존의 초상화에서만 금빛이 번득였을 뿐, 나머지 초상화는 평범했다.
‘아주 정교한 초상화다. 누구라도 이 초상화를 봤다면 날 단박에 알아봤을 게야. 그러니 계도 황자 이자는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의심했겠군. 허나 의심을 아주 잘 숨겼어. 나 또한 그런 의심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계도 황자 아주 영리한 자로군.’
옥패를 쥔 한제는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창백한 얼굴의 계도를 바라보았다.
‘의심을 확인해 보기 위해 일부러 고요에게 날 공격하게 했겠지. 그 의심이 확신으로 변했을 때, 내 실력에 놀라는 척하면서 공손하게 굴었을 거고. 어쨌든 굳이 이곳까지 날 데려와 내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을 보면 적의가 있지는 않을 터. 한데 선족 약천존인 내가 고족의 황자인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이유가 뭐지? 혹시⋯⋯?’
덤덤한 얼굴의 한제는 계도 황자에게 잠시 머물렀던 시선을 거뒀다.
“이미 내 신분을 알고 있는 모양이군.”
계도 황자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의 행동이 거의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굳건했다. 특히 그로서는 지금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기회일 수도 있다고 여겼다.
“도고 현라 대천존의 유일한 제자 이한제. 이는 비밀이지만 저는 황실 사람이라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현라 대천존은 선족 구역에서 돌아오신 뒤 곧장 폐관수련에 돌입했고 저희 시고 일맥은 송천 대천존의 도움 아래 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추측해냈지요. 다만 아바마마와 송천 대천존께서는 선족의 백발 약천존 이한제와 현라 대천존의 제자가 같은 사람임을 확신하지는 못하셨습니다. 저 역시 흑석성에서 선배님을 뵙고서야 알게 됐지요.”
한제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위압감에 계도는 땀을 뻘뻘 흘렸다. 심지어는 아버지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보다도 강력해 송천 대천존에 비견할 만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여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지만 이곳에서 그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계도뿐이었다.
한제는 여인을 힐끗 보았다. 계도와 무척 닮은 여인이었다.
“이 아이는 제 동생입니다. 저와 어머니가 같지요.”
계도가 말했다.
“내 정체를 알고 있었고 내가 현라 대천존의 제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도고 사절단에게 도고 황궁으로 향하는 지도를 요구했을 때 내가 그곳으로 가려 한다는 것을 짐작했을 터. 그런데도 이러는 이유가 뭐지?”
한제가 물었다.
“선배님, 도고 일맥은 좋은 곳이 아닙니다. 선배님이 현라 대천존을 스승으로 모신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도고 일맥의 고황은 속이 아주 좁지요. 그곳에 가신다면 분명 그자가 압박을 해올 것입니다.”
계도 황자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한제는 눈을 번득이며 차게 코웃음을 쳤다. 뒤이어 대전을 나가기 위해 몸을 홱 돌렸다.
“선배님!”
계도 황자는 이를 악물더니 철퍼덕 소리가 날 정도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자로 태어나 부모님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은 적 없었던 그였다.
만약 선족 선황의 황자가 한 행동이라면 그리 충격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토록 황권이 강한 고족 황실의 황자인 그가 무릎을 꿇다니, 누구라도 이 사실을 안다면 큰 충격을 금치 못할 터였다.
그의 여동생 역시 화들짝 놀라며 머뭇거리다가 오라비를 따랐다.
“선배님, 부디 저를 선배님의 양아들로 삼아주십시오. 그럼 제가 시고 일맥의 황제가 되는 날 선배님께서는 시고의 국부가 되시는 겁니다! 부디 저를 도와주십시오! 아바마마께는 아들이 총 일곱이고 저는 그중 다섯째입니다. 저를 도와주신다면 선배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계도 황자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과 기대감이 가득 어려 있었다.
한제는 순간 멈칫하며 계도 황자를 돌아보았다.
“강력한 황권을 자랑하는 고족의 황자가 내게 무릎을 꿇다니⋯⋯. 말해라, 도고 사절단에 너를 붙인 것은 누구냐? 네게 흑석성에서 이한제를 만나게 될 거라 알려준 사람, 이한제를 만난다면 무릎을 꿇어서라도 나를 붙잡으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한제는 이 모든 상황이 우연일 리도 이유가 없을 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황자가 이렇게 쉽게 무릎을 꿇을 리가 없다. 그의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황자가 철석같이 믿고 신뢰하는 누군가가.
한제의 말에 계도 황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매우 똑똑하고 영리한 그였지만 지금 한제에게 모든 것이 까발려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구, 국사입니다. 제 외삼촌, 그러니까 어마마마의 남동생이지요. 10년 전 폐관수련을 마치고 나와서는 생명을 대가로 저를 위한 점괘를 하나 봐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도고 사절단이 다시 올 때 반드시 그들과 대동하라고 말씀하셨지요. 그 여정에서 제 운명을 바꿀 기회를 얻게 될 거라고⋯⋯.”
계도 황자는 실토하듯 말을 이어갔다.
“그 기회를 잡는다면 제 운명은 크게 바뀌어 탄탄대로를 걷게 되나, 그러지 못한다면 1백 년도 채 살지 못할 거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기회인지 구체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 그런 점괘가 나왔노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외삼촌은⋯⋯ 그 말을 끝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한제의 엄숙한 눈빛에 계도 황자는 감히 거짓말을 할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황자의 말을 들은 한제의 표정은 싸늘했다. 그는 국사라는 칭호 자체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선족 구역에서 점술에 뛰어난 국사에게 호되게 당한 바가 있지 않은가.
허나 고족의 국사는 선족의 국사와는 달리 점을 치고도 미래를 또렷하게 보지는 못한 모양이다. 높은 수준으로 황자의 마음을 꿰뚫어본 한제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선배님께서 제 양아버지가 되어 저를 도와주신다면 모든 것이 완벽해집니다! 아바마마께서는 이미 연로하셨으니 곧 후계자를 정하실 겁니다. 물론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언젠가 도고 일맥을 떠나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하시는 날이 오거든, 그때 오셔서 제가 남은 효를 다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계도 황자가 빠른 속도로 말했다.
“양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아들의 효심이라 생각하고 부디 받아주십시오.”
뒤이어 계도 황자는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러자 빛을 번득이던 오른손에서 뭔가가 하나 나타났다. 옥으로 만들어진 갑이었다.
계도 황자는 그것을 한제에게 공손히 바쳤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그것을 받아들고 신식으로 살폈다. 갑 안에는 옥패 하나와 손가락 굵기의 원통이 하나 들어 있었다.
“옥패는 조패(祖牌)라고 불리는 것으로 저희 시고 일맥의 귀한 보물입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 아바마마께서 하사하신, 역대 시고 일맥의 황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 안에는 고조가 남긴 손짓의 힘이 봉인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지요. 허나 그것의 가장 큰 효력은 깨달음입니다. 그것으로 고조의 손짓에 든 힘 속이 변화를 깨닫는다면 신묘한 작용을 발휘할 수 있다더군요.”
계도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안타까운 듯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허나 역대 시고 일맥 황자와 고황 중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황자가 갖는 가장 귀한 신물(信物)이지요. 양아버지께 드리겠습니다! 옆의 원통에 든 액체는 여태까지도 기원을 알아내지 못했으나 고조가 남긴 것으로 매우 순수한 나무 본원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양아버지께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계도 황자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한제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의 저는 고황이 아니라 황자일 뿐이지만 후에 고황이 된다면 시고 일맥이 오랜 시간 모아왔던 보물들을 처분할 수 있게 되겠지요. 그때가 오면 더 많은 것들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면 양아버지의 은혜에 반드시 보답할 것입니다!”
계도 황자의 단호한 말투와 목소리에서는 굳은 결심이 느껴졌다.
옥으로 된 갑을 쥔 채 한제는 고민에 빠졌다. 그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대전은 고요해졌다.
계도 황자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한제의 도움을 얻기 위해 예를 다했고 무릎을 꿇었으며, 상대를 양아버지로 모신 데다가 선물마저 바쳤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 셈이다.
그는 10년 전 폐관수련을 마치고 기력이 잔뜩 쇠한 모습으로 나온 외삼촌이 죽기 직전 자신의 팔을 잡고 해준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말은 지난 10년 동안 그의 마음속에 각인이 된 상태였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 사람이 너를 돕는다면 너는 후에 시고의 황제가 될 것이다. 심지어는 세 고족을 모두 통치하는, 진정한 의미의 고황이 될지도 몰라! 이 점괘는 절대 틀리지 않아. 내 생명을 대가로 엿본 미래다! 만약 그가 너를 돕지 않는다면 넌⋯⋯ 그 후로 1백 년도 채 살지 못할 것이다.”
계도의 머릿속에 외삼촌의 슬픔에 찬 눈빛과 점차 감기던 눈, 그리고 끝내 힘없이 떨어지던 손이 떠올랐다.
“도와주십시오!”
계도는 이윽고 바닥에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쿵! 쿵!
거대한 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지며 적막을 깼다. 계도의 여동생은 이제 완전히 핏기가 가신 상태였다. 오라비의 행동을 통해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도가 머리를 찧는 소리가 이어지던 가운데 한제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너를 찾을 수 있는 옥패를 하나 다오!”
그 순간, 계도는 우뚝 멈추더니 기쁨으로 몸을 떨었다. 잔뜩 흥분한 그는 얼른 품에서 옥패를 꺼내 한제에게 건넸다.
“만약 내가 정말로 도고를 떠나는 날이 오면 그때는 나를 양아버지라 불러도 좋다!”
한제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그의 미래를 오로지 도고 일맥에만 의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퇴로를 열어놓으려는 것이다.
향을 피우다
말을 마친 한제는 그제야 옥으로 만든 갑과 계도가 건넨 옥패를 챙기고는 상대를 한 번 살핀 후 대전 밖으로 향했다. 이내 그의 모습은 안개 속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무렵, 계도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매우 격앙되었고 두 주먹은 불끈 쥔 상태였다.
“내가 알고 있는 고황에게 양아버지는 절대 적응하시지 못할 게다. 겨우 도고의 황제로서는 그런 강자를 손에 쥘 수 없어. 양아버지께서는 반드시 돌아와 날 도와주실 거야. 반드시!”
“이렇게까지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을까?”
그의 여동생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계도 황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가치가 있느냐고? 하하하! 당연하지! 양아버지께서는 정을 중히 여기신다. 그런 수준과 신분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현라 대천존을 찾아온 것만 보더라도 분명해. 그분은 진심으로 현라 대천존을 존경하고 있어. 그런 분을 양아버지로 모시는 게 가치가 없을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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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족 구역 도고 일맥이 차지하고 있는 지역은 선강 대륙의 남서쪽이었다. 그들이 점거하고 있는 열두 개 군의 크기는 각각 선족 구역의 주 하나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약간 더 컸다.
그토록 어마어마한 땅을 축지성촌을 발휘하지 않고 비행만으로 가로지르려면 몇 년은 걸릴 터였다. 허나 고족에게는 특수한 거대 고신과 고요, 고마가 있어 이들을 탈 것으로 이용한다면 시간을 적잖이 절약할 수 있었다. 시고 일맥 구역에서 돌아간 도고 사절단이 수개월 만에 도고 황성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었다.
도고 황성은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도시로 짙은 위압감을 풍겼다. 또한 사방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돌조각이 떠 있었다. 크기가 각기 다른 그 돌조각들은 황성을 중심으로 서서히 돌고 있었다.
도고 사절단이 도고 황성으로 돌아간 지 한 달이 지났을 무렵, 한제 역시 옥패에 기록된 지도를 따라 시고 일맥 구역으로부터 광활한 대지를 가로질러 이곳에 이르렀다.
그는 허공에 떠 있는 도고 황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이 도시는 선족 조성처럼 장엄하지는 않았지만 엄청난 장관이었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도시 중앙에 세워진 거대한 조각상이었다. 조각상의 사내는 심지어 경멸이 어린 듯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한제는 매우 먼 거리임에도 그 기운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고조⋯⋯.”
한제는 작게 중얼거렸다.
황성 바깥쪽을 맴돌고 있는 돌조각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삼엄한 금제 보호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누구든 신분을 증명하는 옥패가 없으면 절대로 그 안에 진입할 수 없었다.
이곳이 바로 가장 강력한 도고 황권을 자랑하는 곳이자 도고 황제가 있는 곳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도시의 동쪽 구역에는 화려한 대전으로 이루어진 황궁이 있었다. 경계가 그 어느 곳보다 삼엄하고 금제도 빽빽한 황궁은 옅은 보라색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그 것만으로도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때, 황궁 바깥의 보라색 기운이 은근히 응집되면서 흐릿한 인영을 드러냈다. 이 거대한 인영의 생김새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관을 쓰고 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고 매우 순수한 고족의 기운을 풍겼다.
‘선족 조성만큼 거대하지도 않고 황궁 역시 선황의 궁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지만 경계만큼은 훨씬 더 삼엄하군.’
실제로 궁 안팎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경비병이 있었고 심지어 궁전 안 시종들 역시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