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73
★ ★ ★
얼마나 지났을까? 영원 같기도 하고 찰나 같기도 한 시간이 지나 두 눈을 번쩍 뜬 한제의 위로 고도가 신통술로 소환해낸 거대한 발이 콰쾅 하고 떨어져 내렸다.
허무에 있던 분신과 융합하고 구곡삼상을 모두 나타낸 지금의 한제는 이미 선강 대륙의 어떤 존재도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상태였다. 선조와 고조가 환생한다 해도 두렵지 않을 터였다. 이 시간 이후, 선강 대륙에는 선조와 고조에 이어 한제의 전설도 남게 될 것이다.
그런 한제에게 답천의 경지를 완전히 파악하지도 못한 고도의 신통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에 한제는 거대한 발이 수백 척 앞까지 다가온 순간, 그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으로 그 발을 가리켰다.
그 작은 손짓에 거대한 발은 바르르 진동하더니 갈기갈기 찢기고 광풍에 휩쓸려 사라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 광경에 고도는 허탈하게 웃었다. 전보다 한층 늙은 듯한 얼굴에서는 피로와 해탈의 빛이 엿보였다.
“난 아무래도 자네를 막을 수 없는 모양이군. 허나 그래도 3백 년 후, 태고 신경에 들어갈 때는 우리 고족 구역을 통해 들어가 줬으면 좋겠네.”
고도는 한제에게 조용히 포권을 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한제는 그런 고도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뜬 고도는 안색을 되찾더니 다시금 안개를 소환해 자신의 모습을 감추었다. 안개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다가 고족 구역으로 날아갔다.
고도가 떠난 쪽을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던 한제는 더 이상 안개가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바닷물의 장벽을 향해 돌아서더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폭풍을 관통해 이내 선족 구역의 대지를 밟았다.
★ ★ ★
한제가 떠나고 12일째 되는 날, 드넓은 분지 중앙의 바닷물 장벽을 사이에 두고 일곱 갈래의 빛이 모여들었다. 바로 선강 대륙의 대천존들이었다.
고족이나 선족 가릴 것 없이 이들은 말없이 신식으로 주위를 관찰했다. 구제 등 선족의 대천존들도 바닷물 장벽을 벗어나지 않고 신식만으로 장벽 너머 고족 구역의 상황을 살폈다.
현라는 두 눈을 감고 신식을 펼치더니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전투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었고 심지어는 세상의 규칙이 변화된 흔적 또한 뚜렷했다.
“이 흔적은 수백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겠군.”
송천이 중얼거렸다. 그 역시 충격적인 규칙의 변화를 느낀 것이다.
신비로운 극고 일맥의 대천존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라 남자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역시 놀란 눈빛이었다.
“고도 대천존과 싸운 상대가 대체 누군가?”
“혹시 한제가 아닐까?”
현라가 감았던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그로서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바닷물의 장벽 안쪽, 선족 구역의 대천존들 또한 각자의 신식을 거두고 텅 빈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가 어떠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 녀석은 아니겠지⋯⋯?”
도일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충격적인 흔적이 남을 정도의 전투를 직접 목격했다면 내 수준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을 텐데⋯⋯.”
구제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고도와 싸운 상대가 대체 누구인지, 혹시 한제는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사실 그들이 이곳에 온 것은 전투로 인한 세상의 변화에 놀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이 어마어마한 전투를 직접 목격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상황은 이미 마무리됐고 이곳에 존재하던 세상의 규칙이 무너지고 어지럽혀진 까닭에 상황을 또렷하게 파악하거나 이곳으로부터 뭔가를 얻기란 불가능했다.
찾을 수 없어
2각 정도가 지났을 때, 서로를 바라보는 일곱 대천존의 눈빛이 점점 서늘하게 변해가면서 이곳의 분위기 또한 점차 묵직해져 갔다.
“고족 도우들, 내 제안 하나 하지.”
어느 순간, 구제가 불쑥 입을 열었고 세 고족 대천존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갔다.
“우리가 싸울 필요는 없을 걸세. 일단 우리는 이 장벽 너머로 나갈 생각이 없어. 게다가 자네들이 이곳에 온 것도 분명 그 전투를 보기 위해서였겠지. 허나 이미 전투는 끝났고 예상컨대 며칠 후면 이곳은 무너져 내려 완전한 사지(死地)가 될 거야. 그리 되면 누구도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를 상세히 파악할 수 없게 되지. 우리로서는 통탄할 일일 게야.”
다른 여섯 명의 대천존은 구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데 내게는 이런 상황에 용이한 신통술이 하나 있네. 우리 일곱 명이 힘을 합친다면 잠시나마 이곳에서 벌어졌던 그 놀라운 전투를 재현할 수 있을 게야. 우리의 신통술로 그 전투를 직접 관람하는 거지! 자네들 생각은 어떠한가?”
구제가 물었다.
“난 그저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보고 싶을 뿐, 다른 뜻은 없네. 원한다면 맹세를 할 수도 있어!”
무봉이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나 역시 맹세할 수 있네!”
도일 또한 구제와 무봉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침묵을 지키던 쌍자도 결국 동의했다.
서로를 바라보며 고민하던 세 고족 대천존도 그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그 정도 수준에 이른 사람의 말이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었다. 게다가 세 사람에게는 구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해도 각자 타격을 입지 않고 살아남을 방법이 있었다.
일곱 사람은 1각 정도를 들여 준비를 마쳤다. 그러자 구제는 옥패를 하나 꺼내 여섯 대천존에게 보여주었다. 이어서 일곱 사람은 동시에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그 옥패 속에 담긴 신통술을 발휘했다.
콰쾅!
일곱 갈래의 빛이 번득이며 나타나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전장을 겹겹이 뒤덮었다. 일곱 대천존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전장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전장을 겹겹이 뒤덮은 빛 안으로 점차 두 개의 인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인영은 고도 대천존이었고 다른 인영 역시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곱 대천존은 그게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한제!”
“정말 그자였어!”
일곱 대천존은 심신이 바르르 진동했다.
허나 놀라기에는 일렀다. 그 뒤로 이어진 광경은 더욱 충격적이었으니까.
그들은 고도의 신통술을 한제의 답천일보를 이어서 한제의 손짓에 거대한 발이 무너져 내리고 고도가 묵묵히 떠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도의 모습이나 둘의 대화까지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이들은 눈앞의 광경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렇게 모든 장면이 끝났을 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순간부터 선강 대륙 최강자는 고도가 아니라 한제였다.
“그 녀석이라니⋯⋯.”
구제는 1백 년 전, 천외 흉수 72마리의 혼이 하늘을 향해 애원하던 것과 하늘에서 강림하던 눈빛을 떠올리며 가늘게 떨었다.
★ ★ ★
선족 구역 북주. 한제는 익숙한 풍경을 살피며 감개무량함을 느꼈다.
“수백 년 전, 난 이곳을 떠나 고족 구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돌아왔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던 한제는 신식을 넓게 펼쳤다. 잠시 후 선족 구역 72개 주 전체가 한제의 신식으로 뒤덮였다.
한제의 얼굴에 점차 미소가 피어났다. 이전까지만 해도 찾기 힘들었던 오랜 벗들을 찾아낸 것이다.
“주일과 청상의 수준이 높아졌군. 그 단약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까?”
한제는 계속해서 신식에 뒤덮인 선족 구역 곳곳을 훑었다.
“저건⋯⋯ 사도환⋯⋯?”
뒤이어 한제는 누군가를 본 듯 허탈하게 웃었다.
“홍삼자는 환생을 했는데도 똑같군. 하하! 아, 주은혜⋯⋯ 저 아이는 수련의 길에 오르지 않았구나. 1천 년 가까이 흘렀으니 벌써 몇 차례나 환생했겠군.”
조금 더 먼 곳으로 시선을 옮긴 한제의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십삼⋯⋯ 역시 꽤나 높은 수준에 이르렀구나. 보아하니 성장이 매우 빠른 모양이야. 대두… 동부계에서 흉측한 모습으로 유약한 내면을 숨기며 불행한 삶을 살았건만 이곳에서도⋯⋯.”
이어서 다른 누군가를 찾아낸 한제는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신공호! 일파의 종주가 되었구나! 아, 그리고 저 여인은⋯⋯ 분명 홍접이야. 저 표식… 틀림없어. 한데 청림… 수련자의 길을 택하지 않고 일반인으로 살아가고 있군. 지금까지 몇 번이나 환생을 했을까?”
다음 순간, 한제는 가늘어진 눈으로 서쪽을 자세히 살폈다.
“청수 사형⋯⋯.”
서쪽에서 청수의 기운이 느껴졌으나, 한제가 그의 몸에 남겨두었던 표식은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옅어진 상태였다. 만약 한제의 수준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더라면 찾아내지 못했을 정도였다.
“저 표식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찾아내지 못했을 거야.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어서 다행이군.”
한제는 안도하며 남은 곳들을 신식으로 훑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한제는 마음이 묵직해졌다.
“이천매는… 없어!”
신식으로 선족 구역 72개 주를 샅샅이 훑어 벗들을 거의 다 찾았지만 그녀만은 찾을 수가 없었다. 고족 구역에서도 찾지 못한 상태였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살펴보았지만 결과는 같았다. 고족 구역에서도 선족 구역에서도 끝내 이천매는 찾을 수 없었다.
“어찌 된 일이지?”
한제는 표정이 크게 일그러진 채 높은 곳으로 떠올라 전력을 다해 신식을 펼쳤다. 이제 그의 신식은 선족 구역뿐만 아니라 드넓은 분지를 넘어 고족 구역까지 전부 뒤덮었다. 그러나 이천매의 표식은 여전히 찾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