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66
이평은 의자에 앉아 조각칼로 나무를 깎고 있었다. 생의 끄트머리에 이른 그의 한 자락 기억이 조각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를 조각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의 조각보다 더 늙은 모습이었다.
이 무렵, 이평은 항상 어린 시절의 꿈을 꾸었다. 사발 가득 들어 있던 약은 지독히도 썼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어쩐지 달게 느껴졌다. 입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껴지는 단맛이었다.
청희는 여전히 곁에 앉아 이평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다정한 눈빛이었지만 그 안에는 슬픔도 깃들어 있었다.
휘휘 불어오는 찬바람이 집 안까지 스며들어 삶의 끝자락에 이른 이평에게까지 흘러들었다.
“내가 죽고 나면 이 조각들은 다 태워줘.”
이평이 조용히 말했다. 그는 손에 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조각을 바라보았다.
방 한쪽에는 거대한 나무 선반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1백 개가 넘는 조각들이 놓여 있었다. 모두 한제의 모습이 담긴 조각들이었다.
그중 몇몇 조각 옆에는 한 아이의 조각도 붙어 있었는데 기쁨이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는 퍽 행복해 보였다.
“아버지, 저는 이미 아버지를… 용서했습니다.”
이평은 손에 쥔 조각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 ★ ★
눈보라가 치는 깊은 밤, 어두운 하늘에서 한 줄기 전광이 나타났다. 하늘을 가르며 나타난 이 전광은 거침없이 염운성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에서 내리던 눈도 우뚝 멈춰버렸고 거칠게 휘몰아치던 찬바람도 흩어져버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염운성의 모든 수련자는 천둥의 위엄을 품고 있는 엄청난 기운을 느꼈고 동시에 귓가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폐관수련을 하고 있던 손석은 두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훌쩍 날려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내 어딘가를 응시하던 그의 표정이 급변했다.
“엄청난 선력에 천둥의 위력까지!”
찬 숨을 들이마시던 손석의 눈동자가 바짝 졸아들었다.
그의 뒤로 손가의 영변기 후기 수련자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총 여덟 명이었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손계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조 어르신, 결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온 자는 아닌 듯합니다!”
염가와 조가의 상황도 비슷했다. 다만 오래 전 수많은 고수들이 이미 멀리 떠나버린 그들의 세력은 손가에 미치지 못했다.
기수성 안의 이가 저택 안, 한제는 손에 들고 있던 술주전자를 내려놓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의 눈에는 어떤 빛도 어려 있지 않았다. 보통의 노인처럼 그저 탁할 뿐이었다.
하늘을 살피던 그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또 한 모금 술을 들이켰다.
하늘에서는 온몸에서 전광을 번득이는 거대한 마수가 네 발을 구르며 콧김을 씩씩 뿜어내고 있었다. 신비롭고 용맹해 보이는 그 마수의 등에는 뇌선전의 사자인 뇌도자가 타고 있었다.
그는 냉랭한 눈빛으로 아래쪽을 훑어보더니 거리낌 없이 신식을 펼쳤다. 그의 신식은 삽시간에 염운성 전체를 뒤덮었다. 기수성 또한 그 안에 포함되었으나, 그의 신식은 한제를 그냥 훑고 지나가 버렸다.
그의 신식은 염운성의 모든 수련자들을 훑었고 이에 수련자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수련자들뿐만 아니라 염운성의 모든 마물들 또한 하늘의 위엄을 마주한 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일반인들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한기와 약간의 긴장감을 느끼다가 하나둘 혼절하여 인사불성이 되었다.
이 순간, 염운성은 전례 없는 적막에 휩싸였다.
잠시 후, 뇌도자는 신식을 거두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염운성 전역을 훑었지만 찾으려는 자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신식을 거두자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찬바람도 다시 불어왔다.
“너무 오래전이라 이미 떠난 모양이군. 운 좋은 녀석.”
뇌도자는 혀를 차고는 염운성을 떠나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 돌연 그의 눈빛이 굳어지더니 번개처럼 신식을 날려 염운성의 어느 산촌에 고정시켰다.
한편, 창백하게 질린 청희는 몸까지 떨려왔다. 체내의 영력도 당장 무너져 내릴 듯해 한참의 시간을 들여서야 겨우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평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청희, 왜 그래?”
대답을 하려던 청희의 표정이 순간 급변하더니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거대한 신식 한 줄기가 눈과 바람을 뚫고 곧장 이곳에 임했기 때문이다.
너무도 강한 신식에 대지가 우르릉 진동했고 지면에 두껍게 쌓인 눈도 떨리기 시작했다. 또한 이평의 집 부근에서는 방금 막 기세를 회복했던 눈과 바람마저 또다시 멈췄다. 마치 이 산촌에서 이평의 집만 다른 세상으로 떨어져 나온 듯했다.
청희의 원신은 곧장 몸부림을 치며 영력을 발산했고 그녀는 가까스로 이평 앞에 섰다. 뇌회한 그녀의 두 눈에는 불굴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재미있군! 내 신식에도 정신을 차리고 있다니!”
냉랭한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순간, 문이 활짝 열리더니 한 중년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청희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녀는 상대의 몸에 흐르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은 마치 하늘의 위엄처럼 그녀가 대항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상대 앞에 선 자신이 개미와 같은 미물처럼 느껴졌다.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것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상대의 몸에 흐르는 전광이었다.
마치 뇌선(雷仙)처럼 번득이는 전광을 두른 채 사내는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집 안 곳곳에서는 파지직 하는 소리가 났다. 또한 전광이 집의 벽을 타고 흐르며 전광으로 이루어진 감옥처럼 집을 포위한 상태였다.
한편, 상공에 엎드린 뇌수의 눈빛은 따분하고 심드렁해 보였다. 이는 녀석이 뇌의 선계의 선수(仙獸), 뇌수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순수한 뇌수는 아니었고 뇌의 선계에 있던 뇌수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고고함만큼은 뼛속 깊이 박혀 있었다.
이평은 손에 쥐고 있던 조각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청희의 앞을 막고 섰다.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 중년 남자를 바라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누구냐?”
지금의 이평은 일반인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담긴 덤덤함은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청희의 앞을 막고 선 그는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선 사내였다.
이는 한제 덕분이었다. 19년 동안의 평범한 삶과 8년 동안의 유람, 30년이 넘는 지존으로서의 삶은 그로 하여금 세상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길러주었다. 눈앞에 있는 수련자 역시 그에게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청희는 묵묵히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이평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 그의 등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낙인처럼 그녀의 마음에 찍혔다. 청희의 눈에 담긴 다정한 빛은 더욱 깊어졌고 결국 수준을 모두 흩어버렸다. 그리고 그녀 역시 덤덤한 눈으로 집 안에 들어온 중년 남자를 주시했다.
중년 남자는 기이한 눈으로 이평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곳에 신식을 고정시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가 신식으로 염운성 전체를 뒤덮었을 때 일반인들은 모두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으나, 눈앞에 있는 이자만은 그러지 않았다. 게다가 모습을 보아하니 아예 자신의 신식을 느끼지도 못한 듯했다. 그러니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군.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
뇌도자가 집 안에 들어선 그 순간, 멀리 떨어진 기수성에서 덤덤하게 술을 마시던 한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술주전자는 산산조각이 나 터져나갔다. 동시에 고개를 든 한제의 눈에서는 지난 70여 년 동안 한 번도 드러나지 않았던 밝은 빛이 번득였다.
뇌도자의 시선이 이평에게 닿았다.
“한 사람이 아니었군?”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평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 순간, 그의 그림자가 뒤틀리더니 선위 꼭두각시가 튀어나오더니 주먹을 휘둘렀다.
콰르릉!
선위 꼭두각시의 주먹은 엄청난 소리와 함께 뇌도자에게로 돌진했다.
뇌도자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이평의 그림자를 본 순간 그 안에 꼭두각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기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번득이는 전광이 선위 꼭두각시의 주먹을 막아섰다. 허나 그 전광과 충돌한 선위 꼭두각시의 주먹은 예리한 송곳처럼 곧장 그것을 뚫고 나가 그대로 뇌도자의 손에 꽂혔다.
파멸적인 힘이 선위 꼭두각시의 주먹을 따라 미친 듯이 뇌도자의 체내로 흘러들었다. 그의 몸에서는 폭풍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쾅! 펑!
뇌도자는 휘청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저릿한 느낌이 드는 두 손에서 전광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는 기이한 눈으로 선위 꼭두각시를 보더니 크게 웃었다.
“크하하! 훌륭한 꼭두각시로다!”
선위 꼭두각시는 두 걸음 뒤로 물러난 채 냉랭한 눈으로 뇌도자를 노려보았다. 그의 온몸에서는 춤추는 은빛 뱀 같은 전광이 흘렀다.
그 순간, 뇌도자가 앞으로 크게 한 걸음 내딛었다. 사방의 벽을 타고 흐르던 전광이 미친 듯이 번득이면서 뇌도자의 발에 응집되었고 그가 내딛은 곳은 움푹 파였다.
퍼펑!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이평의 집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전광의 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파문 가장 가까운 곳에는 이평이 있었다.
선위 꼭두각시는 눈을 번득이더니 몸을 날리며 다시 한 번 주먹을 날렸다. 허나 전광의 파문이 너무나 넓게 퍼진 까닭에 그의 힘만으로는 다 막을 수가 없었다.
청희는 이평의 손을 잡고 다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편, 이평은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태산이 눈앞에서 무너져 내린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가 이토록 침착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가 반드시 오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평이 전광의 파문에 휩쓸리려던 바로 그때, 노쇠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순간, 사방으로 미친 듯이 퍼져나가던 전광의 파문은 우뚝 멈춰버렸다.
노쇠한 목소리가 외친 것은 단 한 글자 ‘정(定)’이었다.
“이건…”
뇌도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이 닿은 허공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타나더니 그 안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노인은 곧장 이평에게로 다가오더니 허공에 멈춰 있는 전광의 파문을 두드렸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파문에서는 균열이 일었고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뇌도자는 찬 숨을 들이마시고는 방금 나타난 노인, 한제를 노려보았다. 허나 갑자기 나타난 상대의 수준을 간파할 수가 없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육안으로는 상대가 보였지만 신식으로는 그 존재조차 느낄 수가 없었으니 그로서는 놀랄 일이었다.
수준
“아버지.”
이평은 멍하니 한제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한 마디에는 수십 년간 그가 했던 생각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혼탁했던 한제의 두 눈은 지금 날카로운 빛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의 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빛이었다.
“뇌선전의 사자로군!”
한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어느새 한제 곁에 선 선위 꼭두각시는 냉랭한 눈으로 뇌도자를 바라보았다.
“넌 누구냐?”
뇌도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