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75
“위기의 순간이면 난 태고의 성물을 이용해서라도 비밀을 지키려 했다. 하지만 사성종 모든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협박해오는 상황에서 더 이상 그 비밀을 유지할 수 없었고 결국 나는 그 수련성의 위치를 말해 버렸다.”
잠시 말을 끊었던 노운은 침통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성종 성물의 위력을 두려워한 데다가 이 일에 너무 많은 것들이 연계되어 있었기에 곤허경은 결국 내 말의 진위를 판별하지 못했어. 그렇게 전쟁은 끝이 났고 나는 사성종을 이끌고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지. 목숨이 위태로운 중상을 입었으나 후계자를 찾아내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 없었다. 온갖 신통술로 목숨을 건지고 세 번째 천쇠로 인한 끔찍한 고통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수만 년을 버틴 끝에 드디어 자유로워졌구나. 고맙다.”
노운의 뒷모습은 점점 멀어져 갔지만 그의 목소리는 한제의 심신에 계속해서 울려 퍼지며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았다.
“한제야, 내 말을 기억해라. 이는 우리 사성종의 가장 깊은 비밀이다. 초대 성황께서 어찌 이를 그리 중시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께서 그리하셨다면 이유가 있을 터. 너 역시 마음에 잘 새겨두었다가 후계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한제는 노운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성종의 근원인 수련성은 하나의 문이라 보면 된다. 그 문은 네 명의 초대 성황에 의해 넷으로 갈라져 각기 다른 수련성에 하나씩 숨겨졌다. 후에 원고 시대 선역이 사라지고 4대 선역이 분할되어 계로 나뉘었을 때, 각 수련성은 서로 다른 선계 성역에 포함되었지. 내가 곤허경에 알린 것은 그중 하나뿐이다. 바로 네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주작성이지. 나머지 세 곳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그러니 이 세 개의 성도(星圖)를 잘 기억해두어라.”
노운의 목소리에 따라 한제의 머릿속에는 세 개의 오래된 성도가 떠올랐다.
사실 한제가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사성종의 비밀도 놀라웠지만 자신의 고향인 주작성이 당시 곤허경과 수련자 연맹 그리고 사성종 사이에서 벌어진 엄청난 전쟁의 근원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대 성황의 분신 중 하나가 주작성에 상주하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군. 묵지의 스승이 묵지를 주작성에 보낸 것도 그래서일 거야. 어디에서 단서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류미 그녀도 주작성에 왔었지. 심지어 부문족도!’
한제는 지난 3년 동안 노운과 함께하면서 황용이 선대 성황의 분신 중 하나였음을 알게 됐다.
모든 사실을 전한 노운은 잠시 멈춰 서더니 저 멀리서 한제를 바라보았다. 뒤이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도저히 사성종을 부흥시킬 수 없을 것 같다면 정말로 이 하늘이 우리 사성종을 소멸시키려 한다면⋯⋯ 그렇다면 굳이 힘겹게 버텨낼 필요는 없다.”
그 말을 끝으로 노운은 그대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한제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워낙 충격적인 비밀을 한꺼번에 잔뜩 들은 터라 진정하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 ★ ★
나천성역이 점유한 연맹성역의 서쪽 구역 우주. 저 멀리서 뇌선전의 거대한 궁전으로 빛 한 줄기가 날아들었다.
그 안에 원신이 하나 들어 있었는데 거의 투명해진 데다가 여러 갈래의 붉은 선으로 뒤덮여 있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 괴이한 몰골로도 원신은 웃고 있었지만 두 눈에는 극도의 두려움과 고통이 배어 있었다.
“염뇌자! 살려주시오!”
뇌선전 대전 가까이에 이르자마자 원신은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대전 밖으로 수많은 인영이 튀어나왔고 그 선두에는 염뇌자가 있었다.
곧장 열운자의 원신 곁에 이른 염뇌자의 표정은 무척 신중했다. 그는 결인을 그린 손으로 열운자의 원신을 쥐고는 곳곳을 빠르게 두드렸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짙은 원력이 원신의 체내로 흘러들었다. 그러자 그 원신에 나타났던 붉은 선들은 조금씩 수축하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부러진 검
원력을 주입받아 약간의 의식을 되찾은 열운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시음종으로부터 습격을⋯⋯.”
한데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원력에 제압되어 있던 체내의 붉은 선이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얼굴은 웃음과 고통이 뒤섞였고 두 눈은 멍해졌다.
허나 모든 이들이 그의 말을 똑똑히 들은 후였다.
“시음종!”
염뇌자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열운자의 미간을 거세게 두드렸다. 순간 열운자의 원신은 바르르 떨더니 다시 의식을 찾았다.
“열운자 똑바로 말해봐라! 시음종이 어찌 너를 기습했지?”
염뇌자가 낮게 호령하듯 말했다.
“주작성황은 이한제였습니다. 그자가 준 옥패를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시음종으로부터 습격을 받아 욕선욕사의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온몸에 퍼져 나간 독 때문에 생각을 이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의 수준은 당시의 사도환보다 높았지만 쇄열기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지금은 육신도 잃은 상태였다. 천부적인 자질 또한 사도환만큼 뛰어나지 못했기에 퍼져 나가는 독을 억제할 다른 방법이 반드시 필요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도 열운자는 허공에 균열을 내더니 그 안에서 옥패 하나를 꺼내 염뇌자에게 건네고는 그대로 혼절해버렸다.
한데 옥패를 손에 쥔 염뇌자의 안색이 급격히 바뀌었다.
“이것은⋯⋯?”
번개에 맞은 듯한 충격에 그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신식을 펼쳐 다시 한 번 옥패를 살폈다. 곁에서는 몇 명의 노인이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
염뇌자는 이내 옥패를 곁에 있는 한 노인에게 건넸다. 그 노인은 신중하게 옥패를 살폈고 방금 전의 염뇌자보다 더 경악한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이어서 그 옥패를 확인한 모든 노인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이게 사실인지는 아직⋯⋯.”
그중 한 노인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인물이 밖으로 나온다면 우리는 연맹성역을 포기하고 나천성역으로 돌아가 대비하는 수밖에 없어. 허나 만약 이자가 나천성역에까지 들이닥친다면⋯⋯?”
말을 잇던 노인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의 눈은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사실일 리 없지! 세상에 이런 존재가 있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 옥패의 내용과 그림대로라면 우리 같은 쇄열기 수련자들도 그자의 손짓 한 번이면 나가떨어질 테지. 그걸 믿으란 말인가!”
그때 염뇌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다들 망월(望月)을 기억하고 있겠지?”
그 말에 노인들은 모두 흠칫 놀라며 저마다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 일에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어쨌든⋯⋯.”
말을 잇던 염뇌자는 순간 멈칫했고 표정이 갑자기 극도로 공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의 기이한 행동에 주위의 다른 노인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얼른 그를 따라했다.
잠시 후, 염뇌자는 서쪽을 향해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신중한 눈으로 주위에 있는 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맹성역과의 모든 전투를 중지하고 규열기 이상의 수련자들은 전부 소집한다. 내가 사성종에서 돌아와 명을 내릴 때까지 대기하도록!”
시음종이 있는 연맹성역 남쪽 구역. 그 중앙에 쇠사슬로 감긴 관 옆에서 이옥지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고 있었다. 전방에는 유백색 빛을 발하는 옥패 하나가 둥실 떠 있었다.
이옥지가 사성종에서의 일들을 빠짐없이 고한 뒤 옥패를 꺼내자 옥패는 중앙에 놓인 관으로 돌진했다.
관에서는 비쩍 마른 팔 하나가 쭉 뻗어 나와 옥패를 거머쥐었다. 그 팔은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검은 부분은 근육이고 붉은 부분은 살이었다. 무척 오랜 세월을 지나보낸 듯 거칠고 서늘한 기운을 발산하는 팔이 나타난 순간, 음산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이옥지는 견디지 힘든 듯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면서도 극도로 공손한 모습이었다.
관에서는 뒤이어 거대한 신식이 뿜어져 나와 옥패를 뒤덮었다. 포악한 신식은 당장이라도 관 밖으로 튀어나와 우주를 찢어발기고 모든 생령을 파괴할 것만 같았다. 심지어 신식 범위 안에서는 누구라도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신식을 통해 흘러넘칠 듯 강력한 신념이 전해져왔다. 이옥지는 거친 파도에 휩쓸리는 조각배처럼 몸을 가눌 수도 없었다.
“제자 이옥지, 삼왕(三王)을 뵙습니다!”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바닥에 꿇어앉았다. 옥패의 내용이 충격적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봐야 아홉 왕들 중 다섯 번째 왕인 오왕(五王) 정도를 소환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을 뿐, 삼왕을 깨울 것이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 저 삼왕과 관련한 전설이 떠올라 그녀는 더욱 긴장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연맹성역 남쪽 구역 모든 수련성의 시음종 제자들은 분분히 하던 일을 멈추고 바닥에 꿇어앉아 경배했다.
“이 옥패를 가지고 온 것만으로도 큰 공훈이라 할 수 있겠구나! 시갱(尸坑)에 들어가 6층에 있는 시체 꼭두각시 하나를 고를 기회를 주마!”
그 말을 들은 이옥지는 감격에 겨워 몸을 바르르 떨었다. 시갱 6층에는 진귀한 시체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떠올라 숨까지 벅찰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이 옥패에서 말하는 시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음산한 목소리가 묻자 감히 대답을 피할 수 없었던 이옥지는 잠시 고민하다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제자의 식견이 넓지 않아 그저 추측할 뿐입니다만 그 시체는 태고 시기 고신의 것이 아니온지⋯⋯?”
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산한 목소리의 주인은 무척 흥분한 것 같았다. 웃음소리가 이어짐에 따라 사방을 뒤덮은 그의 신식에도 파동이 일었다.
“그래, 이 육신은 분명 고신의 것이다. 그것도 8성급 왕족 고신의 육신이지.”
그의 목소리에는 어느새 탐욕이 배어 있었다. 온 세상을 뒤흔들고 성역 전체의 원력을 변하게 하기에 충분한 기세였다.
“왕족⋯⋯ 고신⋯⋯!”
이옥지는 흠칫 놀랐지만 감히 어떤 질문도 할 수가 없었다.
“시음종의 모든 제자를 소집해 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시갱을 열어 아홉 번째 층에 있는 여덟 구의 시체를 꺼내라. 이번에 우리 시음종의 아홉 왕 중 여덟 명이 나설 것이다. 또한 모든 시음종 장로들을 소집해라. 이 왕족 고신의 육신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콰르릉 하고 천둥 같은 목소리가 연맹성역 남부를 울렸고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은 시음종 사람들은 바들바들 떨면서도 고개를 들어 공손히 대답했다. 이에 연맹성역 남쪽 구역에서는 음폭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허나 저는 그 옥패의 내용이 진실인지⋯⋯.”
이옥지는 이 옥패가 시음종을 충격에 몰아넣으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시음종이 가진 모든 힘을 다 동원해야 할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만약 옥패의 내용이 거짓이라면 모든 후폭풍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터였다. 어쨌든 이 옥패를 가지고 온 것은 바로 자신이니까.
“주작성황이 준 것이라면 사실일 가능성이 7할 이상이다. 무시할 사안이 아니야. 사성종이 거짓 소식을 퍼뜨려 우리만이 아니라 나천성역과 수련자 연맹이라는 큰 세 개의 세력을 농단하려 들 이유가 없을 것이다. 허나 내 직접 사성종에 다녀와야 할 필요는 있겠지!”
두 개의 옥패가 연맹성역의 두 거대 세력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세상을 충격에 빠뜨릴 어떤 흐름이 점점 무르익고 있는 듯했다.
또한, 출운국으로 돌아온 묵지가 연맹 내의 가장 강한 세 군데 세력에 각기 옥패를 전달했을 때, 이들 역시 수련자들에게 나천성역과의 전투를 곧장 중지하고 전장에서 벗어날 것을 명했다.
시음종 사람들도 더 이상 각 세력과의 시체 거래를 멈추고 속속 떠나기 시작했다. 이 기이한 변화를 연맹성역 수련자들은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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