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2
12. 직장상사를 살해하는 세 가지 방법 (9)
민준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정팔아.”
시동을 걸며 오크가 다급하게 말한다.
“지금 당장 저기로 출발···!”
“아니야.”
서울 시내 교통을 뚫고 10km 거리를 이동하면 상황은 종료된 뒤일 거다.
“지금부터 잘 들어라.”
정팔이 긴장감 속에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민준은 가타부타 설명 없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한 손에 돌칼을 쥐더니.
푹!
그것으로 본인 손등 위를 찍어버렸다!
“형님!”
흑마법 발동을 위한 준비라는 것은 알았지만 느닷없이 이 자리에서 저러니 정팔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전에 봤던 것과 달리 작은 자상 수준의 자해가 아니었다.
두부라도 자르는 것처럼 아무 저항 없이 칼날은 민준의 왼손을 관통하며 박혔다.
“후우.”
민준이 드물게도 얕은 한숨을 쉰다. 그리고는.
콰직! 두드득!
관통한 칼 손잡이를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돌렸다. 그 장면을 보며 정팔은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는 사이 칼을 뽑지도 않은 상태임에도 상처 틈에서 피안개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민준의 옷깃을 적시며 천천히 몸을 덮었다.
“형님! 지금 손이···.”
그제서야 그가 의도한 현상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돌칼이 사라졌다. 이어서 그 자리를 중심으로 커다란 구멍이 생긴다. 공기에 녹아들듯 주변 풍경이 그의 몸 속에 스몄다.
“어··· 어?!”
손에 생긴 구멍을 통해 조수석 서랍이 훤히 보였다. 투명한 유리벽에 맺힌 민준이라는 얼룩을 누군가 조금씩 지워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워프 마법이야.”
“······아!”
그것이 흑마법 계열 이동 마법이라는 것을 정팔은 이해했다.
피안개가 야금야금 먹어 치운 부분이 삭제되듯 사라진다. 왼팔 어깨까지 먼 곳으로 전송한 상태로 민준은 말했다.
“날 따라올 필요는 없어. 내가 완전히 전송되면 넌 바로 효성실업으로 가.”
그의 말투는 평소보다 빨랐지만 고저가 미미했다. 대화라기보다는 단순한 정보전달처럼 담담하게, 하지만 효율적으로 할일을 지시한다.
정팔은 이것이 그가 극도로 화가 났을 때의 특징임을 알았다.
“그리고 김연주 전무 신변을 확보해. 절차상의 문제는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증거는 도청으로 손에 넣었으며, 영장 신청도 하지 않은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준은 뒷처리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경찰서로 데려가지는 마. 골치아파 질 거야. 내가 연락을 넣을 때까지 적당한 곳에 가둬 놓고 있어.”
눈을 찌푸리며 말한다.
“일이 잘 안 풀리면 그 여자를 인질로 써야 할 수도 있으니까.”
이미 몸 대부분이 모두 전송된 상태로, 민준은 목 위만 조수석 위에 붕 떠있었다. 그의 전부가 떠나기 전에 정팔이 다급하게 묻는다.
“아니··· 인질이라니요? 김연주로 누구를 협박하는 겁니까?”
민준이 뭐 그런 걸 묻냐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누구긴? 드래곤이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민준은 완전히 사라졌다.
***
“어서··· 오세요!”
상록수 서점이 오랜만에 맞은 고객은 젊은 인간 여자였다.
투블록으로 짧게 친 머리는 눈에 띄게도 파랗게 염색했고, 팔뚝에는 각종 문신이 가득하며 피어싱은 얼굴에만 열 개가 넘었다.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고블린을 여자는 무시하며 지나쳤다. 그대로 책방 안에 들어서자, 그곳에는 평소와 다름없는 자세로 앉아 책장을 넘기는 늙은 엘프가 있었다. 그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교차하는 시선.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손님이었다.
“야, 엘프.”
여자가 건방지게 말을 던진다. 레이크필드는 엘프 특유의 기민한 감각으로 알아차렸다. ‘용이군.’
저런 의태에는 인간이나 오크 같은 종족이나 넘어 간다. 인간의 껍데기는 엘프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상대는 노인의 대꾸를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본론을 이어서 투척했다.
“잠깐 정령 좀 꺼내봐.”
레이크필드는 상대의 정체에 대한 수식어를 하나 더 보탠다. ‘어린 용이군.’
나이를 먹은 용은 굳이 정령사를 찾아오지 않아도 될 만큼 다양한 대체재를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용이 여기서 정령 타령을 한다는 것은 미숙함을 드러내는 꼴이었다. 그는 드래곤의 눈길을 피하지 않은 채 말했다. 담담한 말투.
“정령사에게 정령은 뗄 수 없는 분신이자 생명을 나눠 가지는 영혼의 동반자요. 신뢰하지 않는 자 앞에서 절대 정령을 소환하지 않는 것을 모르시오?”
드래곤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알아. 정령질하는 새끼들은 하나같이 앵무새처럼 그 소리를 씨부리더라고. 가장 최근에 조진 놈은 손가락 네 개 부러뜨리니까 그제서야 소환하던데. 우리 노인네는 몇 개 꺾어야 입을 털까?”
여자는 툭, 노인 앞에 파일을 하나 던진다.
그 안에는 레이크필드가 일전에 수색한 적 있는 인간 남자의 사진이 있었다.
“뻐기지 말고 쉽게 가자. 아주 간단해. 이 새끼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면 돼. 최대한 빨리. 알았어?”
긴 세월을 겪은 엘프는 사진 속 남자를 알아봤다는 사실을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무덤덤하게 눈길을 돌리며 드래곤에게 말했다.
“내 말을 이해 못 하셨소?”
드래곤은 결국 참지 못하고 노성을 지른다.
“아무튼, 엘프라는 것들은!”
구르르르!
대기가 진동한다. 레이크필드는 순간 공기가 물처럼 무거워진 것을 느꼈다. 익사할 것 같은 압박감이 몸을 조인다.
드래곤 피어.
툭!
가게 앞에서 청소를 하던 동철이 손에 쥔 빗자루를 놓쳤다. 그는 부들거리며 몸을 돌렸다.
“아아···!”
책방에서 폭력적인 기세가 뿜어 나온다.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이 속삭였다. 도망가야 돼! 숨어야 돼! 지금 당장! 어서!
그의 선조들은 땅굴을 파고 생활했으며, 지하의 폭력적인 이웃인 드래곤을 극도로 두려워하도록 진화했다. 그리고 지금 동철의 핏속에 잠들어 있던 공포를 피어가 깨워냈다. 목구멍에 칼날을 쑤셔 박은 듯한 위기감. 당장 달아나고 싶어서 온 근육이 꿈틀거렸다. 오금이 저렸다.
하지만.
‘안돼··· 사장님!’
여자의 몸이 반쯤 가린, 늙은 엘프의 얼굴이 보인다. 아주 잠깐 시선이 마주쳤을 때 레이크필드가 눈으로 신호했다. ‘도망가라.’
하지만 고블린은 의식적으로 버텼다. 본능에 맞서며 기억을 되새긴다.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 민준이 조용히 불러서 했던 말.
‘동철아, 간혹 사장님을 귀찮게 하는 손님이 올 수 있다. 어지간한 놈들은 내가 다 정리해서 없긴 할 텐데··· 그래도 병신총량보존의법칙 때문에 잡아도 잡아도 꾸역꾸역 기어나오거든. 응? 아, 방금 그 긴 단어는 잊어버려. 아무튼, 그래서 말이다. 네게 부탁 하나 하자.’
지능이 여느 종족보다 낮은 고블린은 외우는 능력도 떨어진다. 하지만 그것이 암기 능력의 전무를 뜻하지는 않았다. 남들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지만, 애쓰면 외울 수 있다.
고블린은 주문을 읊듯이 중얼거린다.
“노란색 불 반짝··· 가장 큰 책, 검은 책··· 아래로 내린다···밥 먹는 손 레버···똑바로 쭉 가기··· 계단 나오면 아래로.”
그것 만이 살 길이라는 듯 초조하게 버티고 서서 외웠다.
“일단, 여기부터 시작해 볼까?”
여자가 엘프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 챈 순간.
그 행동이 ‘발동’의 조건이 되었다.
파앗!
“······아니?!”
책방 안을 가득 채우는 황금빛 광채!
잔잔한 파동을 뿌리는 근원지는 가게 입구에 있었다. 드래곤만큼이나 놀란 레이크필드가 그곳을 보았다.
‘저건!’
얼마 전 민준이 줬던 선인장 화분이었다. 그가 몇 달에 한 번 떠넘기듯 가져오는 화분 중 하나. 거기에서 빛이 퍼져 나오고 있다. 구축 중인 마법은···.
‘축객(逐客)의 결계?!’
레이크필드는 마법사가 아니지만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저런 종류의 결계는 아티팩트에 깃든 상태에서 유효기간이 몇 달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럼, 지금까지 계속···!’
용이 당혹감 속에서 외친다.
“이게 뭐야!”
무중력 상태에 돌입한 것처럼, 인간으로 변한 드래곤의 몸이 갑자기 허공에 둥실 떠오른다. 저항하며 몸부림을 치지만 그녀의 대응보다 결계의 발동이 더 빨랐다.
“이런 미친!”
쉬잉!
거친 폭풍이 몰아친다. 보이지 않는 손이 불청객을 내쫓듯 드래곤을 밀어냈다. 그대로 문까지 쳐 내더니 결국은 가게 밖으로 떠밀고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그 순간. 후다닥! 책방 안으로 뛰어드는 고블린이 있었다. 드래곤이 분노하며 손을 뻗지만 2층짜리 건물은 이미 황금색 보호막이 돔처럼 둘러싼 뒤였다. 그것은 어떤 침입자도 배격하겠다는 듯 두껍게 건물을 보호하고 있었다.
“노란색 불 반짝··· 가장 큰 책, 검은 책··· 아래로 내린다···밥 먹는 손 레버···똑바로 쭉 가기··· 계단 나오면 아래로!”
눈물 콧물 범벅으로, 쉴 새 없이 외운 내용을 중얼거리며 고블린은 레이크필드에게 달려 간다. 작은 책방에 종업원까지 고용한 이유가 사장의 걸음걸이에서 드러났다. 혼자서 걷지 못하는 노쇠한 엘프는 직원의 부축을 받아 책방 안쪽으로 이동했다.
쾅! 쾅쾅쾅!
두 손에 이글거리는 오러를 집중시킨 채 용은 결계를 부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거기 서지 못해?!”
구르릉!
다시 한번 발산되는 피어.
뒤에서 들리는 끔찍한 포효에 고블린이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가.
“······!”
이를 악물고, 다시 공포를 이겨내며 걸었다. 책장 앞에 선 동철은 지체없이, 검은 표지의 책 모서리를 잡았다. ‘엘프어-한국어 대사전.’ 진열된 서적 중 가장 두꺼우면서도 레이크필드가 여간해서는 펼칠 일이 없는 책이었다.
스릉!
책을 당기자 책장 전체가 숨겨진 문으로 변하며 통로가 드러났다. 그 안으로 들어선 고블린이 오른쪽 레버를 돌리자, 입구는 다시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두사람은 책방에서 탈출했다.
***
“저··· 개새끼들이이이이!”
결계 밖에 남겨진 용은 씹어 먹을 듯한 눈빛으로 안을 노려보았다.
“뭐야, 지금 저게?”
“마법사인가?”
“경찰에 신고할까?”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평범했던 건물이 황금색 장막으로 격리된 상황. 누가 봐도 마법이었다. 위험을 직감한 이들은 일찌감치 도망쳤지만, 본능이 마비된 어리석은 자들은 모여서 영상과 사진 따위를 찍었다.
드래곤은 고민한다. 저 결계를 해체하려면 용의 본체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런 대낮에 목격자까지 있는 상황에서 그랬다가는 엘더 드래곤의 집중 포화를 받을 것이다. 용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는 드래고닉 코드에 위배된다.
‘잠깐만··· 어차피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
목격자를 다 죽여버리는 패를 진지하게 만지작거리는 순간.
그런 그녀의 고민을 해결해줄 이가 등장했다.
쉬이익!
“어, 저건 또 뭐야! 또 이상한 거 나온다!”
“이거··· 피비린내 아니야?”
공중에서 피안개가 뭉클거리며 퍼진다.
잠시 후,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드래곤과 남자의 눈이 마주친다. 어린 용, 에델리네스는 상대의 정체를 짐작했다. 그녀는 짜증이 잔뜩 남은 얼굴로 말한다.
“네가 여기 주인이냐?”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이름도 얼굴도 몰랐지만, 이 상가의 주인은 이민국 계약 요원이라고 했다. 그 사실은 에델리네스의 머릿속에서 이렇게 치환되었다. ‘젠킨슨, 그 꼰대가 목줄 채워서 부려 먹는 잔재주꾼 인간.’
“타이밍 좋네. 마침 잘 왔어. 너, 저 결계 풀고 그 늙은 엘프 좀 잡아와라.”
“······.”
너무도 당당한 말투.
약간의 돈을 대가로 드래곤의 ‘종’으로 사역되는 인간이니, 다른 드래곤의 명령을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근거 없는 가치관이 빚어낸 언어였다.
또한, 당연히 상대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경외시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가능한 행동.
드래곤은 위대한 종족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뭐야, 너 내 말 안들려?”
요원이면 드래곤 피어 정도는 단번에 눈치를 챌 법도 한데 반응이 느렸다.
에델리네스는 다시금 분노가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어째 마주치는 새끼들 마다 하나같이!’
구르릉!
피어의 강도를 높여서 인간을 아예 압도해버리려고 마음먹은 순간.
민준은 용은 보지도 않고 상가 안쪽을 확인하고 있었다. 불투명한 황금 결계 안, 가게는 텅 비어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무사히 대피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민준은 처음으로 입을 열었고, 에델리네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민준은 분노를 꾹꾹 담아 넣은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이 개망나니 같은 년이 진짜 미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