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78
179. Love yourself (5)
***
솔라다는 골 깨지는 고통 속에 눈을 떴다.
자다 깬 것이다.
창밖이 어두웠다. 새벽은 아직 먼 것 같았다. 몇 시간이나 잔 걸까?
‘미치겠군.’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현기증이 엄습했다. 체내 수분을 몽땅 쥐어짠 듯한 탈진감.
희미한 시선 속에서 기억을 더듬었다. 한 줄기의 빛도 없었지만 웨폰 마스터는 낯선 천장 문양을 보았다.
여기가 어디더라?
잠시 후 모르는 천장은 모르고 싶은 천장이 되었다.
그래, 유배지. 인력소개소장 다크바라가 알선해 준 은신처. 주변에 민가 하나 없는 외딴 저택.
눈동자를 힘겹게 움직이자 책상 위 뒹구는 술병이 보였다. 어제 해치운 물건. 그대로 들이켜는 대신 저기에 무언가를 타 마셨다.
‘얼마나 저급한 물건이길래 이렇게 뒤끝이 더러운 거야? 젠장할.’
교도소를 출소하자마자 다크바라를 만나고 야간열차를 탔으므로 어제가 제대로 맞이하는 첫 밤이었다.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홀로 맞는 밤. 해가 저물자 솔라다는 자신의 감정을 어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마음은 심란한데 달리 할 것이 없었다.
아무것도.
수련 따위는 놓은 지 오래다. 성인이 된 뒤 책은 한 장도 읽어 본 적 없다. 연합 왕국의 다른 7개국과 비교하여 지독하게 낙후된 슈탄 왕국에는 그럴싸한 오락거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1층으로 내려가 하인들과 담소를 나누고픈 마음 역시 없었다. 그들의 교양과 지식이 문제는 아니다. 어차피 솔라다도 비슷한 수준일 테니.
문제는 그들의 성별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솔라다는 남자라면 지긋지긋했다. 수컷끼리 모여 백날 떠들어 봤자 재미있지도, 즐겁지도, 뭔가 충족되는 듯한 느낌이 들지도 않았다.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시간일 뿐이다.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웨폰 마스터는 자연스레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밤은 무료하고 길었다. 깊어지는 생각은 우울감을 동반하고, 자아성찰과 회상은 무력감을 불러일으켰다.
혼자 버텨야 할 이 시간을 지워 버릴 무언가 필요했다.
그때.
“저어, 솔라다 님?”
인기척을 내고 침실 문을 연 사람은 귤레쉬였다. 저택의 하인 중 유일하게 이름을 외운 남자. 상대의 손에 들린 것을 본 솔라다는 처음으로 그가 마음에 들었다.
“술?”
“필요하실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솔라다의 고민은 짧았다. 몇 년의 복역 기간 동안 간신히 깨끗해진 뇌를 다시 더럽힌다는 죄책감은 없었다.
대관절, 멀쩡한 정신 유지해서 뭐가 남는데?
결혼을 포기한 그날 이후 솔라다가 자그마한 행복감이라도 느끼는 순간은 취해 있을 때밖에 없었다. 취하지 않은 모든 순간이 공허하면서 불행했다.
“혹시 ‘그건’ 없나?”
귤레쉬가 주저한다. 즉답하지 않는 그 태도가 답이었다.
“돈이라면 걱정 말고.”
다크바라는 웨폰 마스터가 여기 지내며 술과 약을 끊기를 당부했다. 하인의 저 행동은 고용주 다크바라의 의지를 거역하는 것이다. 저렇게까지 하면서 뭘 바라는지는 뻔했다.
동전을 건네자 하인은 슬그머니 작은 봉투를 꺼냈다. 그것을 연 순간 아릿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솔라다는 뇌 천장을 찌르는 강렬한 자극을 느꼈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 저것을 원했다.
약 없이 보낸 몇 년의 세월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항상 그랬다. 아무리 오랫동안 약을 멀리해도 저 냄새를 맡으면 다시금 이성을 잃게 된다. 그가 약을 끊을 수 없는 이유였다.
“저 같은 놈들이 구할 수 있는 약은 이런 저급한 것밖에 없는데 괜찮으십니까?”
“상관없어.”
하인을 물린 후 그는 술병에 약을 타서 그대로 들이켰다.
그리고는 매우 행복해졌다.
약 삼십여 분 정도는 말이다.
‘크으윽!’
다시, 현재.
취해서 곯아떨어졌다가 다시 눈 뜬 이 순간, 솔라다는 매우 불행했다.
‘온몸이 찢겨 나가는 느낌이야.’
몇십 분의 쾌락을 하루 치 고통과 불행으로 맞바꾼 솔라다는 침구 안에서 몸부림쳤다. 그 같은 이능력자가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양을 복용해야 했다.
‘수도의 인간들이 구해다 주는 약은 이런 부작용 없이 깔끔했는데.’
약의 저급한 품질 때문이리라.
한편, 그는 어제는 약에 정신이 팔려 떠올리지 못한 의문에 주목했다.
‘귤레쉬는 그만한 양을 용케도 구했군? 이런 시골에서 말이야. 아, 그 녀석도 어차피 여기 출신이 아니라고 했지. 수도에서 가져온 건가?‘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왜 깼지?’
예리함을 많이 잃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웨폰 마스터였다. 이능력자의 감각이 뭔가 포착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잠결에 느낀 그것은 아련하게 다시 멀어져 갔다.
‘착각인가? 오랜만에 약을 했더니 뇌가 미쳐 날뛰나 보군.’
솔라다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곧 요란하게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그 장면을 확인하고 조용히 사라지는 유령이 있었다.
***
“쿨럭!”
용의 몸으로 돌아온 하은성은 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했다.
“그 덩치 큰 악어 귀족은 자느라 정신없어요. 술 먹고 뻗은 모양새던데요? 다른 하인들도 숙면 중이구요.”
그들은 2층의 게스트 룸에 있었다. 깊은 밤중이지만 델을 제외하고는 모두 깬 상태다. 민준은 유령의 보고를 듣고 끄덕였다. 그리고 눈길을 돌린 곳에는 온몸이 그림자에 묶인 외계인이 있었다.
“이 녀석 단독 범행이라는 거군.”
“으으, 으으읍!”
발버둥을 쳐 보지만 몸을 옥죄는 그림자 자락은 단단했다. 그는 민준에게 붙잡혀 이 방까지 끌려 온 귤레쉬였다. 그의 비늘 덮인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정의 토로라기보다는 생리적 작용이 분명했다.
그럴 때가 있다. 목젖을 잘못 건드리거나 뭔가를 게워 낼 때는 슬프지 않아도 눈물이 흐른다.
악어가 당한 꼴을 보며 하은성은 다시 한번 다짐한다. 저 채권자 앞에서 절대 개기면 안 된다고.
“으읍! 그르륵!”
귤레쉬의 모습은 기괴하다 못해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턱은 하늘로 치켜올린 채 벽에 견착되었다. 그 상태로 살짝 열린 주둥이에는 후라이팬 손잡이가 꽂혀 있었다. 손잡이는 악어 주둥이 길이에 맞게 크기를 키운 상태라고 한다. 인간 기준으로 보면 몽둥이나 마찬가지였다.
포로(?)를 저 상태로 만들어 놓은 민준은 여태 그에게 질문만 던지고 답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답하고 싶어도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조리 도구가 입을 봉인한 상태니까.
얼핏 무의미해 보이는 작업을 마친 뒤 민준은 다가간다. 그리고 입 밖에 나온 팬 부분 위에 손을 얹었다.
악어의 표층 의식을 훑은 후라이팬이 말했다.
=얼추 다 알아냈습니다! 이 녀석 평범한 암살자가 아닌데요? 그렇다고 위원회에서 보낸 놈도 아닙니다.=
“우릴 노린 게 아니야?”
=아뇨! 이 방의 일행들은 다 죽여 버리려고 했던 게 맞습니다. 여러분들이 평범한 여행객이라면 목격자가 될 테니 죽여야 하고, 스파이라도 어차피 죽여야 하니까요. 슈탄 왕실의 친인파(親人派)가 인간 쪽에 정보를 흘린 게 아닐까 의심하더군요.=
민준은 눈쌀을 찌푸렸다.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파이? 친인파? 그리고 목격자라니 무슨 말이야? 우리가 뭘 목격해?”
=암살자와 암살 타깃이 함께 있는 광경을 말입니다!=
“······?!”
민준의 시선이 귤레쉬를 향한다. 그가 후라이팬과 대화하는 사이에도 손잡이는 여전히 악어의 목구멍에 꽂힌 상태였다. 피거품이 입가에서 부글거린다.
“그르르!”
손잡이 끝이 쉴 새 없이 목젖을 찔러 대는 통에 악어의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시울을 촉촉이 적신 채, 귤레쉬는 과거를 회상한다.
***
“솔라다를 죽여 다오.”
웨폰 마스터가 출소하기 며칠 전, 세간에는 유능한 인력소개소장으로만 알려진 다크바라가 그렇게 말했을 때 귤레쉬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이것이 의뢰가 아니라 지시임을 잘 알았다. 다크바라의 자의적 판단이 아니라 윗선의 의지가 개입되었다는 사실도.
“위에서 결정하신 겁니까?”
늙은 슈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귤레쉬는 침음을 흘렸다.
“하지만 여태 왕국을 위해 그토록 기여한 웨폰 마스터를···.”
“그것도 옛날이야기야. 솔라다는 이제 일을 하려고 들지 않아. 손을 뗀 지 몇십 년이 지났지.”
“그렇다고 죽여 버리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 이상 국부(國富)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위에서 판단하셨네.”
“네?”
다크바라는 깊은 눈으로 귤레쉬를 들여다본다.
“자네, 솔라다의 현재 재산이 얼마인 줄 아나?”
“여태 많이 까먹지 않았겠습니까? 듣자 하니 감옥 밖에서는 매일 약에 취해 돌아다녔다는데, 그 정도 재산이 있으면 약도 비싼 것만 골라서 샀을··· 컥!”
말을 하다 만 것은, 다크바라가 종이에 어떤 숫자를 적어 보여 줬기 때문이다.
귤레쉬는 자신의 귀에 이어 이번에는 눈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재, 재산이 아직도 이리 많습니까?”
“전부 현금성 자산이야. 유동성 측면에서 솔라다는 걸어 다니는 기업이나 마찬가지라고.”
슈탄 왕국의 경제는 황금에 상당 부분 의존하며 그나마도 나머지 7개 종족의 농간 때문에 제값을 인정받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용병들이 벌어 오는 외화는 왕국 경제를 움직이는 양대 수입원이었다.
“처음 마약에 손을 댈 무렵 솔라다의 재산은 지금의 딱 두 배였네.”
귤레쉬는 아찔한 표정을 지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약값으로 재산 절반을 날려 먹은 겁니까?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되는···. 아!”
젊은 슈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짧은 침묵 후 다시 뱉은 문장에는 은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바가지를 씌웠겠군요. 약팔이들이.”
“인간들의 조제 기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더군. 더 강렬한 자극을 주는 마약을 끊임없이 개발해서 비싼 값에 팔아먹은 거야.”
슈탄 왕국 내 제대로 된 생산 시설은 찾기 힘들며, 마약 같은 공산품은 연합 왕국을 구성하는 다른 종족의 국가에서 말도 안 되는 비싼 값에 수입된다. 물자와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결성한 연합 왕국이라지만, 거기에서 슈탄은 항상 예외였다.
“인간들이 운영하는 제약사에서 더 좋은 약을 사고 싶으면 온갖 쓰레기 같은 프로젝트에 투자하라고 강요했다는군. 슈탄 왕국 내 마약 생산 라인을 만들겠다면서. 물론 항상 마지막 단계에서 좌초되었고 수익률은 0에 가까웠지. 그런 식으로 솔라다의 재산을 왕국 밖으로 빼돌린 거야. 그 친구가 싸움은 잘해도 그 밖의 영역으로는 좀, 뭐랄까. 어수룩하거든.”
경제와 상식에 어두운 자를 대상으로 한 투자 사기인가?
전형적인 수법이다.
“그냥 놔뒀다가는 남은 재산도 약값으로 다 인간들에게 퍼 줄 거야. 그렇다고 슈탄 왕실에서 솔라다의 자금을 동결하거나 강제로 압수할 수도 없어. 알잖나?”
“그랬다가는 다른 미혼 남성들이 깨닫게 되겠죠. 돈을 아무리 열심히 모아 봤자 왕실에서 언제든지 빼앗아 갈 수 있다고.”
“더 나아가 지금은 음모론으로 치부되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신봉하게 될지도 몰라.”
대다수의 슈탄 남성은 결혼에 성공하지 못하고 평생 혼자 살다가 늙어 죽는다. 낭비와 방탕이 부도덕의 극치로 여겨지는 사회이기에 재산은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은행 계좌에 쌓아 놓은 상태로.
그들의 유산은 친지에게 상속되나 중간 과정에서 상당 부분 증발되어 버린다. 특히 외화가 말이다.
연합 왕국의 다른 종족, 다른 국가는 모르는 슈탄 왕실 비자금의 출처가 바로 거기에 있다.
왕실은 그 진실이 널리 퍼지지 않도록 가짜 뉴스로 치부하며 탄압하고 허황된 음모론이라는 여론 조성에 애쓰는 중이었다.
“감옥살이가 벌써 몇 번째인데, 솔라다도 이번에는 약을 끊지 않겠습니까? 죽이는 건 너무합니다.”
“그간 솔라다가 별것 아닌 죄로 계속 감옥에 끌려간 이유가 뭘 것 같나? 그건 수감이 아니라 재활이었어! 왕실에서 손을 쓴 거야. 속세와 단절된 상태에서 약을 끊을 수 있도록. 그런데···.”
다크바라가 통탄의 감정을 흘렸다.
“그를 중독시킨 약은 아무래도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아. 감옥에서 금단 증상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한 후에 출소시켜도, 비슷한 계통의 냄새만 맡으면 다시 중독자로 돌아가더군.”
그는 귤레쉬에게 준비한 물건을 건넸다.
“평범한 하인들 틈에 섞여 저택에 잠입하게. 그리고 솔라다에게 이걸 먹여. 일대일 승부로는 가망이 없으니 독이라도 써야지. 만취한 것 같다고 함부로 해치우려 들지 말게. 자네가 당할 거야. 열흘 정도 연속으로 꼬박 먹이면 약효가 돌 걸세. 그때 해치워.”
“그럼···.”
“그는 시골에서 약물 부작용으로 사망한 것으로 처리될 걸세.”
약을 품에 넣던 귤레쉬가 주저하다가 말했다.
“차라리 평생 감옥에 가둬 두는 것은 어떻습니까?”
“인간들 압력 때문에 마약도 합법화된 마당에 무슨 구실로?”
“그럼, 솔라다에게 우리 결사에 합류하도록 제안하는 건요?”
“치료가 불가능한 중증의 중독자를? 그리고 이 지경까지 오기 전에 내가 제안을 안 해 봤을 것 같나?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의향을 넌지시 떠봤지. 하지만 소용없었어. 솔라다는 슈탄 왕실을 증오해. 우리 왕실이 연합 왕국의 개라고 생각하거든. 친인파가 지배한 쓰레기 소굴로 여기지. 뭐, 부분적으로는 부인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아니면 애초에 그가 약에 의존하는 이유를 해결해 주는 건 어떻습니까? 그를 결혼시키는 겁니다. 다시 청약을 넣도록 설득하는 거지요.”
귤레쉬가 드디어 대안을 찾았다는 듯 열변을 토했다.
“아무리 생긴 게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끔찍하다고는 해도, 워낙에 가진 돈이 많지 않습니까? 분명 여인들 중 한 명 정도는 그를 선택할 법도···.”
“하지만 여태 단 한 명도 없었지. 자네 말처럼 한 명 정도는 고를 법도 한데 말이야. 이유가 뭘까? 진정, 우리 왕국에서 결혼권을 얻은 모든 성숙한 여인들이 그런 부자를 외모 때문에 고르지 않았을까? 정말로?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
“어쩌면 그들 중 상당수는 솔라다의 청약 서류조차 볼 기회를 못 얻던 것은 아니었을까?”
귤레쉬는 그들 동족의 출산을 통제하는 기구의 존재를 떠올렸다.
잠시 침묵하다가 말한다.
“방도가 없군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편안하게 그를 보내 주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귤레쉬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납득시키려는 듯 다크바라는 중얼거렸다.
“상황이 그만큼 좋지 않네.”
회한이 가득한 목소리.
“베르미 공주님만 살아 계셨다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텐데.”
***
후라이팬을 통해 진상을 들은 민준은 두통을 느꼈다.
‘뭐야,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지? 이런 막장에 개판이···.’
다시금 실감한다. 그가 기억하는 슈탄 사회와는 너무도 상이했다.
본래 위원회와 접촉하기 전 이 세계에 지성체는 슈탄과 인간밖에 없었고 당시 인간의 국가는 슈탄에게 밀려 속국 취급을 받았다. 그랬던 권력 구도는 지금 완전히 뒤집혔다. 새로 이민을 온 종족들과 손잡은 인간은 종족 전쟁에서 승리하고 슈탄의 정치적 지위를 처참하게 몰락시킨 것이다.
또한, 전쟁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슈탄 남녀는 자유롭게 연애하며 결혼했다. 당연히 지금과 같은 성별에 따른 격리 조치는 없었다.
민준은 슈탄의 출산율을 통제하며 금값을 관리하는 기구의 이름을 떠올렸다.
‘연합 왕국.’
한때 슈탄 왕국이 가졌던 ‘범차원 재배치위원회와의 교섭권’을 강탈하듯 계승해 간 그 기구는 겉으로는 슈탄을 포함한 여덟 종족, 여덟 왕국의 평등한 연합체로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처참했다. 그들이 슈탄에게 강요한 것은 어찌 보면 생살여탈권을 빼앗는 것보다 더 악랄한 행위였다.
후손을 생산할 자유를 빼앗았기에.
슈탄은 침략자들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자식을 낳을 수 있다. 민준은 이보다 지독한 식민화를 목격해 본 적 없다.
상대가 지닌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경제 자원으로 취급하는 태도.
지성체의 가치를 장부상의 숫자로 계산하는 사고방식.
“······.”
그리고 민준은 곧 깨닫는다.
이것은, 자신이 기억을 되찾고 난 뒤 드래곤을 향해 견지한 태도와 일부 닮아 있다는 것을.
‘아니,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아니지.’
민준은 후라이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묻는다.
다크바라는 슈탄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자였다. 이 저택도 겉으로는 그의 소유로 되어 있었지만 실은 왕실이 관리하는 장소였다. 따라서, 그사이 이 주변이 지금처럼 황폐해진 과정에도 왕실의 손길이 닿았음이 분명했다.
그들은 무언가를 알고 있다.
“왕실 놈들, 여기 있던 것들은 다 어디로 빼돌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