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92
193. Prisoner of Love (12)
***
유리아 공주는 아릿한 향기와 함께 의식을 되찾았다. 누군가 그녀의 코 밑에 댔던 축축한 천을 걷어 냈다. 각성제의 부작용으로 뒤통수를 묵직한 통증이 두드렸지만, 곧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아픔이 몰려온 탓에 잊혔다. 해변을 덮는 파도처럼 일정한 리듬에 맞추어 수십 개의 망치로 하반신을 으깨는 듯한 극통이었다.
“······!”
비명을 지르려던 유리아의 입이 다시 닫히고 눈동자에 경악이 서렸다. 가물거리는 시야가 또렷해지며 예상치 못한 얼굴이 보였다.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다.
“카사나?!”
어렸을 때 이계로 요양을 떠난 왕가의 둘째. 그 후로 수십 년간 만나 본 적 없는 동생이 그곳에 있었다.
유리아는 부르르 몸을 떤다.
“카사나, 네가 보인다는 건. ···그렇군. 난, 죽은 거구나.”
음성에는 자포자기한 감정과 좌절이 스며든다.
“너도 외계에서 건강을 되찾지 못하고 죽어 버렸구나. 아아, 불쌍한 어머니. 이렇게 딸 셋을 모두 잃다니··· 아니지, 혹시 어머니도 여기 있을까? 신이 허락한다면 우리 모녀를 사후세계에서라도 다시···.”
“이 헛똑똑이가 지금 뭐라는 거야?”
그녀의 말을 끊어 낸 카사나의 어투에는 감추지 못한 경멸이 묻어 있었다. 유리아는 순간 말을 잃었다가 다시 몰려드는 통증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언니를 보며, 카사나 공주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어렸을 때 자신이 유리아에게 직접 붙여 준 헛똑똑이라는 별명이 얼마나 적절했는지 되새기며.
“언니 안 죽었어. 하지만 이대로면 진짜 죽을지도 모르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집중해.”
“안 죽었다고?! 하지만 네가 어떻게···.”
“난 진작 우리 나라에 되돌아와 있었어.”
“뭐라고?!”
그렇게 외치던 유리아는 다시금 아픔에 몸을 굳혔다. 그것이 흘러간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여긴 어디지?”
“우리 왕실을 비밀리에 섬기는 결사들 근거지야.”
“······!”
그 뒤로 질문의 홍수가 쏟아졌지만 동생은 묵묵부답이었다. 때 이른 산란을 시작한 언니의 정신이 이 이상 분산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역적 죄인이지만 자신의 혈육이며, 왕이 이미 살리라고 명령한 상태다.
겨우 산란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야 카사나는 축 늘어진 유리아에게 그간 일을 설명했다.
“난 애초에 한곳에 머물며 요양하려고 떠난 게 아니야. 우리 종족이 자유를 되찾을 수 있게··· 손잡을 세력을 찾는 게 내 임무였어. 외노자로 이계에 위장 파견된 슈탄 남자들과 합류해서 움직였지. 비용은 왕실 비자금과 비밀 결사의 지원으로 충당했고.”
유리아는 후(後)산란통마저 잠시 잊고, 입을 쩍 벌린 채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결국 우리를 돕겠다고 제안하는 이민 브로커를 만났지.”
그는 몇 가지 부탁을 들어주면 지구로 집단 이민을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고, 그것에 응하는 중요한 임무는 막내인 베르미가 맡았다.
브로커가 카바이트, 위원회 고위층을 구성한 종족임이 마음에 걸렸지만, 반대로 고대 종족이니만큼 로비력을 믿을 수 있었다.
결국 베르미는 겉으로는 지구 연금술 업체를 인수합병한다는 명목으로, 하지만 수면 밑으로는 브로커가 부탁한 비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떠난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유리아가 외쳤다.
“···대체 왜!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왜 나만 빼놓고 진행한 거야!”
그러자 카사나의 코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유리아는 동생의 얼굴에 맺힌,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보았다. 산란 중인 여인에겐 미처 내뱉지 못했던 칼날 같은 말이 카사나의 혀 위에서 춤을 췄다.
“아파서 정신이 흐려진 거야, 아니면 불리한 건 그냥 까먹어 버리는 거야? 우리가 한 일을 언니가 어떻게 해? 터미널 근처에도 못 가는 사람이. 설사 밀항을 시도해도 도약선에 타는 순간 걸렸을걸?”
“······.”
또한, 이 계획에서 왕의 장녀가 철저하게 배척당한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 목표는 겔랑코 차원을 떠나는 거야. 여성은 황금알 낳는 가축 취급당하고 남성은 고향을 떠나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외계인 노동자로 사는 비참한 신세를 탈출하는 거라고. 그런데 언니는 이 사달을 만든 인간 편에 붙으려고 했잖아!”
부인할 수 없었다.
유리아가 슈탄 왕실의 대표적인 친인파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언니를 인간 왕국에 유학 보낸 일을 지금까지 후회해. 종족이 얼마나 비참하게 사는지 뻔히 알면서 머릿속에 그런 썩어빠진 사상이나 채우고 돌아오다니! 그리고 어머니가 아무리 설득하려고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 그래서 결국··· 이 비밀을 언니와 공유하는 걸 포기한 거야!”
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유리아를 비난했다.
“애초에 우리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일에 다른 종족이 간섭하는 이 상황이 정상이라고 생각해? 결혼할 권리를 놓고 자매와 경쟁하려고 들기 전에, 이런 제도를 부수고 전복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어? 그럴 힘이 없다면 도망이라도 쳐야 할 것 아니야!”
유리아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쿠데타를 일으키면 언니가 왕이 되고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언니 같은 강력한 이능력자를 인간들이 방치한다고?”
“······뭐?”
“이미 남자들 사이에서는 조짐이 보이고 있어. 뛰어난 이능력자일수록 제출한 혼인 청약 서류가 중간에 사라지는 일이 빈번해. 신체 능력이 월등한 우리의 자손이 강력한 이능력까지 물려받는 게 싫은 거지. 그 농간이 지금은 남성 이능력자를 타깃으로 하고 있지만, 여자들이라고 언제까지나 안전할 것 같아?!”
유리아는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구축한 세상, 보고 인지하며 가치를 판단한 세계가 모조리 무너져 내리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뒤틀렸던 몸이 자리를 잡는 통증과 섞여 정신적 충격이 몰아친다. 그 폭풍은 유리아를 통째로 으스러뜨릴 것 같았다.
그때였다.
두두두두!
“이게 무슨 소리지?”
다시 정신이 혼미해진 유리아와는 달리 카사나는 수상한 소음을 알아차렸다. 이 깊은 숲속에서 들릴 리 없는 종류의 소리였다. 벽을 뚫고 전해지는 묵직한 진동.
“설마?!”
카사나의 얼굴이 굳었다.
***
두두두두!
“이런!”
무전기에서 들려온 사건 보고 때문에 어수선했던 슈탄인들은 곧 대화를 멈추고 밤하늘 저편을 바라보았다. 자연스레 델을 비롯한 ‘외계인’ 일행들 시선 역시 그곳으로 돌아갔다.
“젠장!”
회전익 항공기 편대가 지평선을 넘어 다가오고 있었다. 기종으로 봐서 슈탄의 것은 아니었다.
팟!
쉴 새 없이 공기를 때리는 프로펠러 날개 아래로, 환한 빛줄기가 어둠을 가르고 쏟아졌다. 서치라이트는 숲 한가운데 대치한 슈탄과 외계인들을 비추었다.
지상을 관찰한 누군가 기내에서 말했다.
“판별 완료. 슈탄 왕입니다!”
유리아 공주를 픽업하러 갔다가 실패하고 여기까지 흔적을 쫓아온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탑승한 헬기 비슷한 기체는 마나와 관련 없는 구시대적 연료로 기동하고 있었다. 공주를 태우고 성소까지 날기 위해 준비했던 이동수단이다.
이곳까지 따라올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델이 얼어붙은 마나의 흔적을 쫓아온 것처럼, 이들도 비슷한 능력자를 동원한 것이다. 델보다 느리긴 했지만 방향은 틀리지 않았고, 공주의 궤적을 뒤쫓다 보면 이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조종석에 앉은 인간이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일이 이렇게 잘 풀리다니!”
애초에 유리아 공주를 회유한 근본적인 목적은 슈탄 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그녀에게 약속했다. 왕의 소재를 파악하면 상처 없이 무사히 제압한 다음 무혈 쿠데타를 지원하여 유리아를 왕위에 등극시키겠다고.
인간들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녀는 믿고 싶은 대로 믿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다른 장소에서 슈탄 왕을 찾아낸 지금, 인간들의 계획은 바뀌지 않았다. 무전기를 통해 편대 전체에 지시한다. 단호한 목소리.
“발포!”
비록 지상에는 정체 모를 일행들이 섞여 있고, 개중엔 인간 같은 종족도 존재했지만.
대의를 위해 작은 희생은 불가피했다.
피슈슝!
항공기는 지상을 향해 포탄을 쏟아낸다. 마나 응결 능력자가 없기에 마법사들 역시 거리낌 없이 주문을 쏟아부을 수 있었다.
타오르는 선이 밤을 자른다. 열기 속에 어둠이 일렁이더니 일순간 숲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기내의 인간들은 뒤이어 대기를 뒤흔들 커다란 충격에 대비했다.
“······?!”
기분 나쁜 고요함.
“뭐야?!”
기대했던 폭발, 지축을 흔드는 여파는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지휘관의 눈이 커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드래곤이었다. 미디어를 통해 접했던 것보다 몸집이 작지만 생김새는 분명 용이 맞다. 드래곤이 뭔가 한 것인가?
그런데 정작 용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하늘을 볼 뿐이었다. 그들은 용이 입 안에 머금었던 불꽃을 다시 꿀꺽 삼키는 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방금 전 깜짝 놀라 몸에서 떼어 낸 폴리모프 마도구를 쥔 채, 하은성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한편, 죽음을 각오했던 슈탄들도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는 낌새인 건 마찬가지.
지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한 사람은 둘밖에 없었다. 그중 하나인 사제가 감탄했다.
“공주님, 당신이!”
델은 단호한 표정으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눈동자에는 분노가 일렁였다.
방금 그녀가 펼친 힘은 포탄을 허공에서 멈추고 마법을 사그라들게 했다. 몸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이 정도는 가뿐했다.
“감히!”
델은 어렸을 때부터 항상 엔델리온의 중요한 덕목이 부족함을 지적받았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족하다는 것이지 그 당연한 보호 기제가 전무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안위를 소중하게 여기며 생명의 위협 앞에 엄청난 공포를 느끼는 촉수 생물. 그중 한 명인 델은 방금 일어난 일에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공주는, 그 분노를 행동으로 표현해 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화악!
그녀의 등에서 한 줄기의 촉수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왔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강렬하고도 유려한 움직임을 제대로 쫓아가지도 못했다. 델은 밤하늘에 실타래처럼 펼친 그것을 크게 휘둘렀다.
탄력 넘치는 반동이 공기를 찢는다.
쉬이익!
오직 한 획.
겨우, 한 번의 휘두름이었다.
그녀의 등에 연결된 긴 촉수가 밤하늘을 횡으로 벤 순간, 목격자들은 그 선을 따라 공간이 뒤틀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매끈하고 유연한 청회색 기둥은 속도감을 희롱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
항공기 기내의 인간들이 기대했던 폭발음이 그제서야 들려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소음의 근원지는 그들 예상대로 지상이 아니었다.
콰쾅! 쾅!
콰콰쾅!
산발적으로 번뜩이는 섬광과 함께, 밤하늘에서 항공기가 차례로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불똥과 함께 파편이 곳곳에 궤적을 남기며 추락한다.
한편, 촉수를 휘두른 그 순간 델은 이미 몸을 슈탄 왕에게 돌린 상태였다. 그녀는 하늘에 번지는 광열에 관심을 잃은 채 묻는다. 폭음을 뚫고도 전해지는 또렷한 목소리.
“방금 그 무전, 무슨 내용이었죠?”
촉수를 집어넣지 않은 채 그리 묻는 엔델리온의 공주에게.
“······.”
감히 거역할 생각도 품지 못한 채 슈탄 왕은 사실대로 고한다. 이번에도 델의 반응은 빨랐다.
“윰투스.”
“···네, 넷!”
“그가 생각해 둔 다음 목적지는요?”
델이 정신을 잃은 사이 민준은 윰투스에게 이미 다음 행선지를 알려 주었다. 답을 들은 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그 차원으로 도약해야 해요. 말했지만 우리 위치는 발각된 지 오래고, 카인이 지금 ‘그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상··· 후속 부대가 도착하는 건 시간문제이니까.”
카인. 엉겁결에 민준의 예전 이름을 말했지만, 윰투스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화신은 어떻게 합니까?”
델이 한층 어두워진 안색으로 답했다.
“데리러 가야죠. 지금 당장.”
***
잠시 후, 인간들 왕국 상공에 공주와 사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그들이 여기 도달하기 전. 퇴각하던 고대 종족의 차원 도약선 겸 항공 모함은 이곳 왕국까지 따라온 회오리가 집어삼켰다. 한창 도약을 준비하던 선박은 속절없이 그것에 깔렸고, 토드는 으스러지는 배 파편과 섞여 폭풍에 휘말렸다. 그렇게 한참을 빙글빙글 돌다가 영혼과 몸이 함께 갈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차원에 더 이상 개체로서의 토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 상황이 무전으로 전해질 때만 해도 검은 회오리 형태를 띠었던 그림자 괴물은 이제 소용돌이 작용을 멈췄다. 민준이 영육을 으깨 새로운 괴물을 제조하는 작업을 중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 괴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젠장! 공격! 공격해!”
“신이시여, 어찌 저희에게 이런 재앙을···!”
“소용없습니다! 어떤 주문도 역부족··· 으아아악!”
그 괴물 앞에 나선 자들은 인간이었다.
그림자 괴물은 인간 수도의 터미널을 으깨 버리며 등장했다. 그리고 도약 터미널이라는 건 어떤 국가에서도 중요한 기간 시설이자 최고 등급의 전략 지역으로 분류되기 마련이다.
그런 곳을 정체불명의 괴물이 단숨에 밀어 버리자, 인간들의 군대는 프로토콜에 따라 대응 타격 및 수도 방위 작전에 돌입했다. 괴물을 향해 매서운 반격을 쏟아부은 것이다.
그리고 괴물의 반응은···.
캬아아아아!
일찍이 회오리 폭풍 형태를 무너뜨린 어둠은 이제는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치솟는 어둠은 진흙처럼 무겁게 도시를 깔아뭉개고, 뜨거운 수증기처럼 사방에 비산하며 잡아먹는다. 인간들이 동원한 전차와 전투기를 증발시키고 그들이 퍼붓는 포탄과 마법을 흡수했다.
수도의 대지에 균열이 생기고, 거기에서 검은색 용암이 솟구치며 산처럼 부푸는 듯한 광경이었다.
끓는 그림자 중심에 우뚝 선 괴물은 눈코입으로 피안개를 토하며,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향해 증오를 뿜어냈다.
그걸 본 델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괴물은 자신을 공격한 자들에게 복수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적의에, 적의를 돌려주고 있다.
‘이런··· 무의미한 복수를!’
델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도 의식 못 한 채 그의 옛 이름을 외친다.
=카인, 그만해! 우린 지금 바로 다음 차원으로 도약해야 해!=
그녀는 그림자 괴물을 뚫고 안의 민준에게 목소리를 전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중간에 무언가 계속 시도를 막고 튕겨 냈다. 마치 저 어둠을 경계로 세계가 둘로 나뉘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이 바빠진다. 대체 민준은 어떤 상태인 거지? 혼란에 빠진 채, 계속 그림자 내부와 교신을 시도했다.
그사이.
“···아저씨.”
“네?”
드래곤 몸으로 돌아간 하은성은 사제를 보았다. 윰투스는 이제 익숙하다는 듯 숙련된 손길로 이마의 지혈 패드를 갈아 끼우고 있었다. 과다 출혈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헝겊은 핏물 때문에 묵직했다.
하은성은 눈동자를 돌렸다. 그리고 인간들의 수도를 잠식한 거대 괴물을, 그녀가 사방으로 퍼뜨리는 어둠을 보았다.
그것은 조금 전 슈탄의 성소에서 본 장면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였다. 바라보기만 해도 몸이 움츠러든다. 용의 본능은 저 괴물에게서 빨리 멀어질 것을 종용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동시에, 저 괴물을 지배하는 이에게 복종할 것을 권했다.
용은 압도된 목소리로 묻는다.
“요원님은··· 정말 ‘신’이에요?”
사제가 민준을 신적 존재로 섬기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종교적 광기로 여기고 깊이 고민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저 아래 펼쳐진 광경을 본 지금, 하은성은 진지하게 질문했다.
대체 예민준은 누구인가?
“하하하.”
따스하게 웃으며, 윰투스는 답한다.
“물론이죠. 신이시지요. 지금 보이지 않습니까? 신이 필멸자를 몸소 벌하고 계십니다.”
하은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요?”
“당연히 그들이 행한 ‘악(惡)’ 때문이지요.”
악?
“신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선물했습니다. 스스로 선택하여 선(善)에 가까워지거나 반대로 멀어질 수 있는 권리를요. 아래의 저들은 선에서 멀어지기 위해, 악을 행하기 위해 그 권리를 사용한 것 같군요.”
하은성은 민준에게 비슷한 관념을 들은 걸 기억해 낸다. 자유 의지가 어쩌구 하는 머리 아픈 담화.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럼··· 신이 자유 의지인지 뭔지 그딴 걸 안 주면 됐잖아요. 왜 사람이 나쁜 짓을 하게 둬요? 그럴 건덕지를 애초에 왜 줬는데요?”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니까요.”
하은성은 한숨을 쉬고 싶었다.
“그 밑도 끝도 없는 사랑 이야기는···.”
“사랑을 빼고 신을 논할 수는 없지요. 우리를 사랑하기에, 신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었습니다. 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않을 자유를.”
하은성은 정말 마지막으로 다시 묻기로 했다.
“왜요?”
“신이 베푸는 사랑을 자유롭게 거부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면, 그저 우리를 사랑하는 의도에 납득하고 사랑하는 행위에는 순응해야만 한다면··· 그런 사랑은 실질적으로 강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만!”
마지막 말은 하은성의 것이 아니었다. 델은 두 사람의 대화를 중단시킨 뒤 말했다.
“안 되겠어. 그에게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아. 지금 바로 도약해야겠어요.”
“네?! 지금 이대로요?”
그리 되묻는 드래곤에게 공주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 이대로는 당연히 안 되지.”
그 말을 마친 공주의 몸이 빛으로 휩싸인다.
“······!”
다음 순간.
쓰나미처럼 도시에 휘몰아치는 어둠을 피해 대피하던 인간들은, 오늘 그들이 겪게 될 지옥이 아직 제대로 절정에 이르지도 않았음을 예감하게 되었다.
그들이 밤하늘에서 목격한 것은, 그런 절망스러운 확신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