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93
194. Prisoner of Love (13)
***
인간의 왕은 질문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전하! 지금 당장 대피하셔야 합니다, 전하!”
신하가 피 끓는 목소리로 피난을 통촉했다. 하지만 겔랑코 차원의 인간 위에 군림하는 자는 창밖을 멍하니 보며 굳었다. 움직일 줄 모르는 그의 시선 끝에, 천 년 가까운 세월을 버틴 고도(古都)가 처참하게 붕괴되고 있었다.
그는 다시 자문한다.
내가 왜··· 우리가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전하!”
신하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하지만 왕의 몸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얼어붙은 머리로 생각한다.
‘대체 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발단은 위원회의 통보였다. 긴급 도약 준비 요청. 복잡하고도 불리한 조약 때문에 왕국은 이런 요청에 무조건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도 몰랐다. 위원회는 그들이 원할 때 입항하여 원할 때 자유롭게 떠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 도착하자마자 모습을 감췄던 그들의 배는, 역사상 최악의 재앙을 데리고 터미널로 돌아왔다.
우직!
콰르르!
콰쾅! 콰쾅!
수도 한가운데 나타난 어둠은 묵직하게, 멈추지 않고 범위를 넓혔다. 가옥과 상업 건물 따위가 그것에 깔려 차례로 파괴되었다. 그 가공할 검은 물질은 모든 반격 시도를 흡수하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확산되었다.
왕의 입술이 떨렸다.
“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것은 자연재해에 가까웠다. 위원회가 수도 한가운데에 어비스로 통하는 문을 연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지만 일축당했다. 이곳 인간들 상식으로는 예단할 수 없는 재앙. 그 정체가 지금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와서 인지한다고 뭔가 달라질 것도 없기에.
“신이시여.”
지진, 해일, 폭풍 같은 자연 현상에 휩쓸려 목숨을 잃는 이들은 한 해에도 셀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잃지 않았고 왕도 그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저것은, 저런 것은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머릿속에 절망스러운 질문이 떠오른다.
‘인간은 이렇게 몰락하는가?’
위원회의 ‘간섭’을 받아들이고, 이민자들과 손을 잡고, 그전까지 세계 권세를 휘어잡던 슈탄을 몰락시킨 이후. 겔랑코 차원의 인간은 전례 없는 번영을 누려 왔다.
그 영광도 여기까지인가?
그림자 괴물 때문에 이미 엄청난 군사력이 소모되었으며, 수도가 붕괴된 경제적 피해는 숫자로 환산하기 두려울 정도였다. 피해를 완벽하게 복구하는 건 이번 세대에는 불가능할 터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종족의 지위는 슈탄과 비슷한 수준까지 떨어질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분리되고 차별되는 열등한 종족.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화앗!
그때였다. 왕이 바라보던 수도, 순식간에 폐허로 탈바꿈하던 도시의 하늘에 심상치 않은 빛이 서렸다. 다음 순간 왕과 신하의 눈이 동시에 무언가를 포착했다.
털썩!
왕을 재촉하던 신하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딱딱, 그의 턱이 쉴 새 없이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곁에 선 왕 역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같은 방향을 보았다.
구오오오오!
그들 시야 절반을 덮었던 검은 덩어리 위로, 나머지 절반을 다 가리기에 충분한 존재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저 익숙한 도시 풍경이, 저 하늘이 견뎌 내기엔 지나치게 무거워 보였다. 그런 착각을 부르는 거체였다. 본래 여기 존재하면 안 되는 것. 인간들은 지독한 폐쇄감을 느꼈다.
섬에 비견되는 동체에 달린 스물여섯 개 기둥이 꿈틀거리며 뻗는다. 그 움직임은 멀리서 보기에는 느릿했지만, 사실 어떤 새보다도 더 빨리 날아오고 있음을 몇몇은 짐작했다.
밤하늘에서 내려온 그것은, 대다수의 목격자들이 처음 접하는 거대한 촉수 생물이었다.
왕은 저 종족을 알았다.
‘엔델리온!’
절대 고향 차원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던, 인간들에겐 전설이나 마찬가지로 취급되는 고대 종족이··· 왜 이곳에?
왕은 세상이 자신을 비웃는 비현실감을 느꼈다. 세계가 내비친 악의는, 모든 확률과 현실성까지 억지로 뒤틀어 그를 괴롭히는 듯했다.
그사이, 새로 등장한 ‘괴물’과 방금 전부터 도심을 유린하던 ‘괴물’ 사이 거리가 점차 좁아진다. 그 둘 사이에 낀 밤하늘은 점차 찌그러지고 구겨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 둘이 맞닿은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왕의 머릿속에 어떤 개념이 떠올랐다.
현실에 구현된 지옥.
도시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왕국의 부와 기능, 권력 대부분이 집중된 고도가 처참하게 붕괴된다. 이 파괴를 유도하는 것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였다.
왕의 눈에 핏발이 선다. 그는 떨리는 손을 바지춤으로 가져다 댄다. 잠시 후, 손가락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인간의 왕은 권총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
엔델리온의 공주는 질문했다.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이것 또한 속죄를 위해서야.’
델은 ‘그’에게 그녀 개인이 지은 죄와 엔델리온이라는 종족이 지은 죄를 모두 인지하고 있다.
애초에 지구로 온 것도, 탈출할 때 순순히 인질이 되어 준 것도, 지금 하는 일도 같은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다만, 의문은 남는다.
‘이런다고 내가,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
하물며 단절되고 파괴된 관계가 복구될 수 있을 것인가? 어찌 보면 닿지 않을 소망이며, 보상받지 못할 기대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델은 멈출 수가 없었다. 이것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정 지으며 공주는 폴리모프를 해제했다.
화앗!
반경 6km의 촉수 생물이 인간 왕국 밤하늘에 등장했다. 그녀는 그대로 고도를 낮추며 용암 같은 어둠에 다가갔다. 피안개를 뿜는 괴물은 고개를 돌려 상대를 응시했다.
들끓는 어둠과 중력을 거스르는 촉수가 대치한다.
일단은 긍정적인 신호였다. 인지한 순간 공격을 퍼붓지는 않았으니까. 또한 모든 관심을 촉수에게 돌렸기 때문인지 확장 또한 멈추었다. 여기서 가장 경계할 상대가 누구인지 아주 잘 아는 반응이었다.
촉수 괴물의 외눈과, 선혈이 쏟아지는 그림자 괴물의 두 눈이 마주친다. 대지에 우뚝 선 그녀는 상대의 행동을 기다리는 듯했다. 촉수는 다시금 의문을 느낀다.
‘그가 지금 제대로 통제하는 게 맞나?’
지금까지 그녀의 목소리는 내부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그림자가 일종의 결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델이 생각해 낸 방안은, 저것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었다.
화르르륵!
그녀의 촉수 가닥이 하나 끓는 그림자 위에 닿았다. 그리고 또 하나, 이어서 하나 더. 유연하게 휘는 청동색 촉수가 한 가닥씩 괴물의 외피 위에 내려앉는다. 그 과정에서도 괴물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압도된 것인가?
‘좋아!’
엔델리온은 그대로, 스물여섯 가닥의 촉수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부글거리는 그림자의 ‘분화체(噴火體)’를 감싼다. 껴안듯이 감싼다.
치이이익!
어둠 표면에 닿은 촉수에서 격렬한 반응이 일어났다. 인간이 맨살로 불덩이를 손에 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엔델리온의 육신은 반향을 이겨 냈다. 촉수가 점점 더 그림자 안으로 파고든다. 그러고 나서 델은 확신했다.
‘이 안은 이미 별도의 유사 차원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내 목소리가 닿지 않았지.’
그림자에 몸을 엮은 채, 공주는 균열의 내부를 향해 외쳤다.
강렬하고도, 굳은 의지를 담아 전한다.
=카인!=
***
태초의 종족은 질문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싶은가?
‘왜?’
화르르르!
=아아, 제발! 제발!=
=잘못했어. 잘못했어요. 제발 날··· 나를 보내 주세요. 가야 할 곳으로··· 있어야 할 곳으로···.=
=싫어. 아파. 괴로워. 제발. 아파. 괴로워. 너무 아파···.=
도약선에 탔던 토드 망령의 비명이 점차 잦아들더니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융합이 끝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주변을 채운 것은.
캬아아!
새로 태어난 그림자 괴물의 비명 소리였다. 소음은 쉴 새 없이 공명하며 그의 정신을 날카롭게 찔러 댔다.
적은 이미 사라졌다. 영육이 뭉개진 채, 개체로서의 토드는 전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의 종족은 여전히 그림자 괴물을 거두지 않고 이곳에 방치하고 있었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캬아아아아!
그는, 감미하고 싶었다.
토드를 재료로 만든 저 그림자가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을 좀 더 음미하고 싶었다. 다만,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정신적인 희열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응당 이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에 감상하고 있었다. 여운에 빠지고 싶었다.
그는 생각했다. 삶이 그러한 것처럼, 복수 역시 목표를 성취하는 순간보다 거기까지 나아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지금 민준이 행한 복수는 그 성취의 순간을 매우 길게 늘려 놓아, 결과 또한 일종의 과정으로 치환하는 것이었다.
영겁의 시간 이어질 고통을, 죄인들에게.
다시 자문한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싶은가?
답은 간결했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그는 계속 그림자를 응시했다. 토드였던 것이 고통받는 장면을 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즐겁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오랫동안 이대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변화를 알아차린 것은 그쯤이었다.
=······!=
누군가의 부름.
처음에는 무시했다. 공간을 뚫고 전달되는 의미는, 그의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한 번, 매우 애타게. 정신파가 뇌리를 두들겼다.
그것은 죄인의 이름이었다.
=카인!=
태초의 종족은 반응한다.
‘너?’
그는 굵은 밧줄 같은 무언가 주변을 감싼 걸 느꼈다. 그림자 바깥부터 꽁꽁 묶은 그 행위는 사슬을 엮은 결박 같기도 했고, 몸으로 몸을 덮은 포옹 같기도 했다.
의도를 가늠할 수 없는 것에 포획당한 채 수인(囚人)은 귀를 기울인다.
=출발하자! 지금 바로 여길 떠나야 해!=
‘하지만 나는.’
그는 들끓는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러자 정신파가 호통치듯 말했다.
=복수의 당위성을 부인하지는 않겠어. 당신에게 용서하라고 강요하지도 않겠어. 하지만··· 당신이 진짜 복수해야 할 상대는 여기에 있는 인간들이 아니잖아?=
태초의 종족은 그 지적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에 계속 머물 이유가 무엇인가?
논리적이지 않았고, 효율적이지도 않았다.
무엇이 내 판단을 가리고 있었지? 무엇이 날 흐리고 있었지?
그는 자신의 정신에 깃든 이 희뿌옇고도 어수선한 먼지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보려 했다.
—!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그 순간, 그는 민준으로 돌아왔다.
차갑고 맑은 웃음이 계속 울려 퍼진다.
그것은 그림자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들려왔다. 흘리는 주체는 토드로 만든 그림자도, 민준 자신도, 지금 그를 깨우려 한 델도 아니었다.
민준은 그의 정신에 섞여 들어오려고 시도한 침략자의 정체를 깨닫는다. 지금까지 누가 델의 목소리를 계속 튕겨 내고 있었는지 자각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완전하고도 복구 불가능한, 영원한 파멸을 간절하게 바라는 자의 훼방이었다.
‘아드키엘···!’
델이 다급하게 외쳤다.
=지금 바로 도약할 거야! 그림자를 거둬들여!=
민준은 그녀가 권한 대로 했다.
화르르!
잠시 후, 대피하던 인간들은 기적과 같은 장면을 보았다.
“저기를 좀 봐!”
“세상에 맙소사··· 신이시여!”
그림자가 위세를 잃고 있었다.
거대한 촉수 괴물이 그것을 덮고 묶어 버리자, 그제서야 힘이 빠지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어둠은 퍼져 나갈 때와 반대 방향으로 오그라들며 축소되었다. 그걸 본 어떤 사람들은 문어의 포식 행위를 떠올렸다. 빨판 덮인 다리로 먹잇감을 옥죄어 붙잡은 뒤, 입을 열고 천천히 뜯어먹는 장면을.
그렇게 구체적인 행위까지 연상하지 않은 사람들도 대부분 지금 현상을 이렇게 해석했다.
촉수 괴물이, 그림자 괴물을 이겼다!
“아아, 촉수가··· 촉수가!”
“촉수가 이긴 거야.”
“그럼 다음은, 이다음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들은 급작스러운 변화를 보면서도 두려워했다. 인간들 입장에서 저 둘은 피아를 식별하기도 꺼려지는 초월적 존재처럼 보였다.
촉수가 그림자를 다 잡아먹은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런 그들의 두려움은 기분 좋은 방식으로 배신당했다.
“아니?!”
그림자를 ‘다 먹은’ 촉수 몸에서 상서로운 빛이 번뜩였다. 지금까지 지긋지긋한 어둠에 시달리던 사람들 눈에는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서광이었다.
빛은 끊임없이 부풀며 스물여섯 줄기 촉수와 중심의 동체까지 완전히 덮었다.
그런 찰나.
화앗!
빛이 폭발했고, 피난길에 오르던 사람들은 잠시 시야를 잃었다. 밤을 물들였던 섬광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형의 파동이 일렁이다가 사라졌다.
그러고는, 아무도 없었다.
***
슈탄의 공주는 질문했다.
나는 왜 이런 일을 했는가?
‘미쳤어. 내가 미쳤었던 거야. 단단히 돌았어!’
동생을 통해 들은 소식은 기절초풍할 만한 것이었다. 이곳 차원 사람들로서는 분석 불가능한 재앙이 인간 수도에 휘몰아쳤고 도시는 완전히 붕괴되었으며 왕은 행방불명이다.
국면은 완전히 전환되었다. 유리아는 인간 편에 붙어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던 자신이 외통수에 몰렸음을 자각했다.
“유리아.”
공주는 앞에 선 어머니를, 슈탄의 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도 전에 무릎 꿇었다. 재빨리 몸을 바짝 엎드렸다.
“전하! 용서해 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유리아의 등 위로 차가운 시선이 쏟아진다. 공주의 머릿속에는 온갖 부정적 감정이 뒤범벅되어 폭발했다. 나락으로 떨어질 듯한 절망, 지독한 수치심, 자학적인 죄의식 따위의 것이었다.
왕이 선언하듯 말했다.
“너를 살려 두라 이른 것은 왕실 혈육인 너의···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은 지켜 주기 위함이었다. 누구도 그리 비참하게 죽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 말을 들은 유리아는 희망을 느꼈다.
왕은 자신을 용서하는가?
하지만, 두근거림도 잠시. 이어진 말은 가차 없었다.
“어쨌든 죽지 않았으니 되었다. 내게 네게 보내는 사람으로서의 연민과 배려는 거기에서 그친다. 종족의 모범이 되어야 할 공주가 역모를 꾀한 죄의 무게는 가늠하기도 어렵다!”
“전하! 어머니!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이미 결단을 내린 뒤였다.
공주는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의무, 왕가의 일원으로서의 도리를 모두 저버렸다.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다고 해도 이미 저지른 악행은 씻어 낼 수 없다.
군주로서 내린 그런 차가운 판단의 한 겹 아래, 그녀는 가슴에 칼이 꽂힌 어미의 아픔을 느꼈다.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죽이려고 한 딸을 보며 생각했다. 어떤 상처는 가해자가 후회하고 반성한다 해서 치유되지 않는다. 용서는 오로지 피해자의 몫이다. 또한 이미 망가진 관계를 복구하거나 복구하지 않겠다는 결정도 피해자가 내려야 한다.
왕은 그것을 복구하지 않기로 결론지었다.
“’죄인’을 옥에 가두시오.”
“아악! 어머니··· 어머니이이!”
잘못된 방법으로 사랑을 갈구했던 죄인이 끌려나간다. 왕은 금세 시선을 돌렸다.
지금 이 순간 슈탄의 왕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려 했다.
‘인간들은 한동안 재기가 불가능할 터다.’
연합 왕국의 균형이 완전히 깨진 것이다. 슈탄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인간은 물론이고 이민자 출신의 다른 종족들도 당분간 사태의 수습과 자기 몫 챙기기에 열중해서 슈탄에게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할 것이다. 왕실과 결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외노자로 파견된 남자들을 비밀리에 불러 모으는 것이 우선이었다. 환란의 시대에서는 무엇보다 무력이 중요하다.
그렇게 각종 현실적인 숙제를 하나씩 검토하고 나서야 왕은, 자신들에게 이런 축복을 내려 준 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벌인 일의 상세한 내막과 의도는 몰랐다.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그럼에도 왕은 성소 근방에서 마주친 ‘등에 촉수 달린 여자’에게 깊은 감사를 느꼈다. 그녀와 조우하고 얼마 뒤 인간 수도에서는 엔델리온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조합해 볼 때 여인의 정체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림자 괴물과 촉수 괴물. 둘 중 누가 진정한 보물의 주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들은 인간들에게는 끔찍한 재앙이었으나 슈탄에게 있어서는 구세주라는 것. 그들 덕에 예언의 조건 또한 충족되었다. 슈탄이 자유를 되찾고 막내딸이 귀환하는 그날이 머지않아 오리라.
왕은 정체불명의 이계인들을 떠올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엇을 목적으로, 어디로 나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그대들 앞날에 신의 끝없는 사랑과 관심이 함께하기를.’
왕은 진심으로 그리 기원하며 축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