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30
231. 마음의 발명(The Invention of Heart) (28)
***
하은성은 하염없이 날아갔다.
그가 가로지르는 이 관형 차원은 물이 반쯤 차오른 터널과 같았다. 그는 다시 홀려서 달란트의 격류, 그 표면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아갔다. 더 근원에 가까운 곳으로. 더 높은 상류로.
계속 전진하던 유령은 신혈의 흐름이 점차 느릿해지는 것을 보았다. 유달리도 속도가 둔해졌다고 지각한 그때.
하은성은 무언가를 통과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급격하게 주변 풍경이 뒤바뀌었다.
=으윽!=
빛이 모든 감각을 채운다. 몸에 달린 눈으로 봤다면 실명했을지도 모르는 강렬한 섬광이었다. 열이 없는 태양 속에 뛰어든 듯한 기분이었다.
찬란한 빛 속에 감춰진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점차 주변의 윤곽이 드러난다.
영체 상태로, 하은성은 입을 쩍 벌렸다.
=여긴 대체 뭐야?=
그곳은 안이 텅 빈 구(球) 형태의 공간이었다.
하은성은 방금 전에 한 생각을 정정했다. 이곳은 태양이라기보다는 속이 빈 전구의 안쪽 공간에 가까운 것 같다. 다만 필라멘트 따위가 빛을 내는 대신 전구 내벽이 발광하고 있다.
잠깐이나마 하은성의 감각을 마비시켰던 빛이 사방으로 번진다.
=달란트!=
빛에 마비되었던 시력이 점차 돌아오는 것처럼, 하은성은 풍경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저 사람들, 다 누구야?=
공간 내벽에는 관 같은 것이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지 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각각의 관 안에는···.
=인간?=
하은성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생김새다. 인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두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었다.
구체 내벽에 붙은 저 관 하나하나가 광원임을 하은성은 알아차린다. 하늘을 덮은 별과 같이 그들이 흘리는 빛은 공간을 아름답게 채웠다.
그리고 하은성은 사람들 목에 꽂힌 기묘한 장치를 발견한다.
스윽!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영체에 꽂힌 단검. 그 부위와 같은 곳에 저들 역시 기묘한 장치를 꽂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달란트가 흘러나온다. 각 관에서 흡수된 달란트는 구체의 벽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하은성이 진입한 구멍으로 흘러내렸다.
하은성은 사방을 살폈지만 그가 들어온 입구 말고 다른 곳으로 이어진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막다른 길이다.
=여기가 근원이야.=
그가 지금까지 거슬러 온 터널형 차원이 핏줄이라면, 이 공간은 심장처럼 보인다. 순환계의 의미를 잃고 오직 한 방향으로만 피를 밀어내는 장기.
=이곳 사람들은 전부 잠든 상태잖아. 그럼 날 부른 건 누구지?=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의 정체는?
그때였다.
– 여기까지 잘 와주었구나. 고마워.
그 음성은 처음 인지했을 때처럼 하나인 동시에 여럿으로 들렸다.
하은성은 긴장에 사로잡혀 되물었다.
=누구야?=
그 직후, 이상한 점을 알아차린다.
=···왜,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리지?=
처음 이곳으로 향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그를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 근원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지금은 목소리가 하은성의 영체 속에서 들렸다.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현상이었다.
– 속여서 미안해. 놀라게 해서도 미안하고.
=······?!=
하은성은 잠시 영파를 멈추고 침묵했다.
그대로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그는 상대의 정신파에 묻은 의미를 완벽하게 해석해낸다.
그리고 경악했다.
=너··· 처음부터 내 안에 숨어있었던 거야? 계속 거기서 목소리를 내고 있었어? 근원에서 부르는 것처럼 속이고?=
– 그래. 고백하자면, 쉽지 않았어. 알고 있긴 했지만 넌 정말 특별한 존재구나.
왜 속였는가?
그 이유 역시 짐작할 수 있었다.
=날 여기로 유인하기 위해서?=
– 그리고, 나도 네 안에 숨은 채 이곳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어떻게 숨은 거야? 내가 왜 그걸 눈치채지 못했지? 너, 대체 누구야!=
하은성의 영파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내면의 목소리는 여유롭기만 하다.
– 처음부터 숨어있던 건 아니야. 부활의 성당 앞에서, 네가 교황의 얼굴을 봤을 때 잠입했지.
하은성은 아시프-1의 얼굴을 보고 패닉을 일으킨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직 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반복한다.
=너, 누구냐고!=
– 난 부스러기야.
하은성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 그의 영혼이 갈기갈기 찢길 때 흩뿌려진 먼지야. 각각의 입자 상태로는 의지도 자아도 갖출 수 없지만, 지금처럼 응집된 상태에서는 자아 비슷한 것을 유지할 수 있어. 네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네 영체 입자 사이에 분산되어 숨어있었기 때문이야. 목소리를 흘릴 때마다 더 많이 뭉쳤다가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했지. 네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당연해.
하은성은 어떻게 하면 이 ‘부스러기’를 자신의 영체에서 분리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때, 목소리가 다시금 말했다.
– 다시 한번, 사과할게. 놀라게 해서.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래야 네가 공간의 균열로 뛰어들 테니까.
지금의 사과는, 영체에 몰래 숨어든 일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유령은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 그의 얼굴을 보고 많이 놀랐지?
성당 발코니에 나온 아시프-1을 말하는 것이다.
그를 공황에 빠뜨린 장본인.
=그야, 날 죽인 사람의 얼굴이니까!=
– 아니, 그렇지 않아. 네 목을 찌른 남자는 그렇게 생기지 않았어.
하은성의 정신이 얼어붙었다.
지금 뭐라는 거지?
=하지만, 분명 기억이··· 갑자기 기억이 되돌아와서···.=
잠깐만.
하은성은 다시 자문한다.
그는 죽은 뒤 단 한 번도, 살인범의 얼굴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런데 왜 하필 아시프-1을 본 순간 기억을 되찾았는가?
그의 기억을 지운 장본인이 살인범이 맞다면, 그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과연 하은성이 같거나 비슷한 얼굴을 다시 본 순간 기억을 찾을 수 있게, 그렇게 허술하게 지웠을까?
그럼 애초에 지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설마?=
– 그래, 넌 그 순간 기억을 되찾은 게 아니야. 조작된 기억을 본 거야.
쉴 새 없이 몰아 닥치는 충격적인 말들 때문에, 하은성은 영체 상태임에도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 그 기억이 언제 돌아왔지?
=사람으로 부활한 아시프-1을 봤을 때···!=
아시프-1이 발코니 위에 선 순간이었다.
– 그래, 그때 그가 너를 세뇌한 거야.
=······!=
-너무도 특별한 영혼이라서 복잡한 방법을 써야 했지. 살인자 얼굴을 지우는 암시로도 버거웠는데 새로 또 뭘 입력하려면 말이야.
그가 말한대로, 꽤나 복잡한 방법이었다.
– 너무 작아서 미처 조립되지 못하고 성당 주변을 떠돌던 부스러기. 그러니까 ‘나들’을 모아서 네 영체 속에 직접 박아 넣었어. 그 상태로 세뇌를 하니 겨우 통하더군. 나도 자아 비슷한 것을 되찾았고. 그 뒤로는 본체··· 그러니까 완벽에 가깝게 조립된 그의 지시를 따르는 중이지.
하은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런 가짜 기억을?
– 넌 정말 특별한 영혼이라, 완벽하게 인형처럼 조종하는 건 불가능해. 그래서 이런 방법이라도 써야 했지. 그래야 트라우마 때문에 공황에 빠질 테니까. 필사적으로 도망치려고 할 테니까. 그리고 그때 마침 열린 검은 문을 통해 진입할 테니까. 그렇게 해야··· 널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으니까.
유령은 분노와 경악 속에서 외쳤다.
=그럼 정말로 날 찌른 사람은 누구야?=
그 순간 진짜 기억이 하은성의 정신을 엄습했다.
다시 과거의 장면이 펼쳐진다. 유원지의 풍경. 단검을 들고 달려들던 남자. 마지막으로 기억했던 것처럼 살인범은 깔끔한 양복차림이다. 머리 역시 아시프-1처럼 제멋대로 흘러내리게 둔 장발이 아니라, 짧고 깨끗하게 정리한 점잖은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얼굴.
지금 하은성이 떠올리는 살인범의 얼굴은, 더 이상 아시프-1의 그것이 아니었다.
하은성은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남자다. 청년의 외모를 지닌 아시프-1과는 달리, 40대 초반에서 중반까지도 가늠할 수 있는 나이대의 얼굴이었다.
목소리는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 널 완벽하게 제압할 수 없는 걸 미리 알았다면, 얼굴이라도 바꿔놓고 찔렀을 걸. 당시의 파편도 치밀하지 못했어. 무의식적 충동 때문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짓이었거든. 기억도 완벽하지 않으면서, 본능적으로 느낀 거지. 일단 죽여 놓으면 쓸모가 있을 거라고. 모두의 행복을 위한 희생양으로 제격이라고. 어쨌든 결과적으로 볼 때 옳은 선택이었어. 목적이야 조금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하은성은 악을 쓰듯 외쳤다.
=누구야?! 저 사람··· 대체 누구냐고?!=
목소리가 담담하게 말했다.
– 너희 고향에서 저 남자는 ‘장태준’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어.
=장··· 태준?=
하은성은 모르는 이름이었다.
– 그는 인간으로 위장한 드래곤이었지.
유령은 자신이 대낮에 유원지에서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 장면을 목격하지 못한 사실을 떠올렸다.
심지어 CCTV에도 녹화된 것이 없었다. 유원지를 운영하는 대기업에서 마법 경찰에 수사를 맡겼지만 그들조차 아무런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 고룡에 가깝게 나이를 먹은 드래곤이 철저하게 흔적을 지웠으니, 경찰이 범인을 못 찾는 게 당연하지.
목소리가 덧붙였다.
– 혹시라도 장태준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면, 포기하는 게 좋아. 그는 자기가 널 죽인 것도 몰라. 기억이 깨끗하게 지워졌거든. 더군다나 이미 몇 달 전에 죽었어. ‘계획하는 자’의 손에 살해당했지.
=계획하는 자?=
–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계획하는 자는 다스리는 자를 낳았고, 다스리는 자는 나아가는 자를 발출(發出)했지. 이 셋은 모두 역할을 나누며 이어져 있어.
하은성은 현기증을 느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 너는 멀리 나아가는 자야. 어떤 경계도 네 앞에서는 의미를 잃지. 울타리도, 벽도 소용없어. 네가 나아가는 길 위에 공간의 제약은 존재하지 않아. 그렇기에 특별해. 덕분에 나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넌 누구냐고!=
– 난 ‘다스리는 자’의 부스러기야. 그래, 네가 아시프-1이라고 부르는 영혼. 그는 자신을 낳은 아버지를 위해 이 계획을 꾸몄어.
목소리는 선언하며 말했다.
– 널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야. 저들은··· 깨어나서는 안 돼.
하은성의 영체는 고개를 들어 다시 주변을 보았다.
밤하늘의 별만큼 많은 자들. 벽에 박힌 채, 성운처럼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사람들.
깊은 잠에 빠진 상태로 피를 흘리는 그들.
하은성은 그의 말을 속으로 되뇐다. 깨우면 안 된다고?
– 내 본체는 아버지가 세운 계획에 부분적으로 동조해. 다시 말해서, 짐승들을 향한 복수에는 찬성하지. 그들은 태초의 종족을 욕보였고 피가 끓는 지옥에 빠뜨렸어. 벌을 받아야지. 하지만 문제는··· 다음으로 그가 계획하는 일이야.
– 복수를 마친 다음, 그는 이곳의 동족들을 다시 깨우려고 하고 있어. 하지만 내 본체는 그게 좋지 않은 생각이라고 판단했거든.
– 생각해봐. 태초의 종족이 깬 뒤 그들의 왕을 어떻게 취급하겠어? 이미 만민을 위한 대계(大計)에 실패하여 파국 직전까지 몰고 간 그를 말이야. 모든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린 죄를 지은 왕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까?
– 내 본체가 생각하기로 그는 이미 백성들을 위해 충분한 희생을 치렀어. 영겁의 세월과 괴로운 잠, 끝없는 악몽이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었지. 이제는 보상을 받을 차례야. 벌 대신에 보상 말이야. 설사 벌을 피하더라도, 깼다가 다시 잠든 후 펼쳐질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왕이 되풀이하는 게 맞을까?
– 그러는 대신, 그는 새로 다가올 시대의 신이 될 거야. 이 부분은 본래 계획과 일치해. 하지만, 잠든 자들은 다시 깨어날 필요가 없어. 이미 깬 왕은 다시 잠들 필요가 없고.
– 전부 이해하기 힘들어도 괜찮아. 지금 알아야 할 건, 네가 날 도와야 한다는 거야. 저들이 영원히 깨지 못하도록 도와줘.
하은성은 그 말에서 논리의 허점을 찾아냈다.
목소리는 왜 깨어난 이들이 민준을 벌하리라 확신하는가? 정작 민준 본인은 그런 뉘앙스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또한 그들을 깨운 다음, 다시 긴 악몽 속에 잠드는 고통을 민준 본인이 택하겠다는데, 그걸 막을 권리가 있는가?
이 모든 것을 지적하는 대신 하은성은 경계를 곤두세우며 말했다.
=내가 왜 널 도와야 하지?=
목소리는 담담한 울림으로 답했다.
–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싶지 않을 테니까.
***
민준은 아시프-1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두 사람의 영혼이 공명을 멈췄다. 주변에 일렁이던 달란트의 빛도 사라졌다. 그는 방금 교황의 영혼을 깊숙이 들여다보기 위하여 어마어마한 달란트를 소모했다.
잠깐의 침묵.
고요한 공기 속에서 민준은 과거 행적을 떠올렸다.
자유 의지를 조작할 수 있는 도구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래서 최초에 그것을 발명했을 때, 태초의 종족은 도구에게 마음을 만들어 주었다. 스스로 자유로이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말이다.
창조주는 그의 도구에게 묻는다.
“왜 거짓말을 했지?”
아시프-1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