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63
264. 사람의 자격 (29)
***
윰투스가 중얼거렸다.
“의미심장하군요. 토드와 카바이트에게도 비밀로 한 회담이라. 여차하면 그들조차 배신하겠다는 의중이 느껴집니다.”
누군가 반문했다.
“하지만 이 정보를 우리가 그쪽에 흘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고대 종족 간에 내분이 깊어지도록 말입니다.”
“만일 그랬다간 엔델리온 쪽에서 그런 적 없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야. 아무리 음흉한 놈들이라도, 우리 말보다는 자기들 발언을 신뢰할 테니.”
“그리고 이 회담을 그냥 거절해버리면 엔델리온이 제안하려는 패를 확인할 방법이 없어집니다.”
“패라고 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함정이나 파 놓고 기다리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대면도 아니고 원격 회담인데 피해를 줄 방법이 있을까요?”
“진짜 함정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놓을 수 있지요. 거짓 정보로 교란하거나. 아무튼 회담을 가장해서 꾸밀 수 있는 음모는 많습니다.”
오가던 대화를 듣던 민준이 결정을 내렸다.
“어디 한 번, 뭐라고 지껄이는지 한 번 들어나 보지.”
그 어조에는 상대가 뭐라고 하든 결국 자신의 기조는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기세가 담겨 있었다.
델의 얼굴을 보며, 민준은 그녀에게 한 약속을 떠올린다.
‘엔델리온은 멸종하지 않을 거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난 그들을 학살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들의 불완전한 영생 시스템은 결국 기능을 잃을 터.
그리고 민준은 그들의 사후까지는 델에게 약속한 적 없다.
회의를 마친 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내면을 향해 의식을 집중했다.
민준 안에 있는 지옥은 착실하게 완성되고 있었다.
***
지옥은 내 마음 안에 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 잠언이던가? 아니면 불경?’
정팔은 출처를 기억할 수 없었다. 원체 종교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었고.
진리의 문구는 시간과 관심사를 초월하여 전해지는 법이다. 정팔은 요즘 저 말에 100% 공감할 수 있었다. 지옥은 그의 마음속에 존재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지옥으로 만든 원인은 이 세상에 있다.
‘바뀔 수 있을까?’
눈을 감으면 처참한 광경이 떠올랐다.
정팔은 아직도 밤에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잠이 들만하면 어김없이 악몽이 찾아왔다. 꿈속에서 정팔의 무릎은 축축하고 뜨겁게 젖었다.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핏물로. 죽고 다친 그의 가족들이 흘린.
‘이 세상이, 정말 바뀔 수 있을까?’
매우 빠른 시간내에 자신의 사상적인 스승으로 거듭난 늙은 오크는, 바뀔 수 있다고 확신했다.
“박의원, 왔는가?”
정장을 차려입은 최판석이 나왔다. 그런데 뒤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다.
“아··· 잘 계셨습니까?”
최선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팔은 그녀와 예전에 병원에서 만난 뒤 처음 재회하는 것이었다.
마법독에 중독되었던 그녀를 민준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살려낸 기적 같은 현장이 마지막이었다.
‘요즘 들어 증상이 재발한다더니, 오늘은 안색이 좋아 보이는군.’
민준이 부재중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애초에 치료에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최선아는 요즘 썩 몸이 좋지 않다고 들었다.
최판석이 최근 중요한 행사에 불참했던 것도 그녀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그쪽 비서실에는 이야기가 되어있겠지?”
최판석의 물음에 정팔은 상념을 떨쳤다.
“네. 회장님을 뵐 때 두 분을 동반한다고 말씀을 드렸고, 허락도 받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오크의 얼굴에는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따님은 왜···?”
“나중에 다 설명하겠네. 그럼 출발하지.”
오늘은 젠킨슨 회장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정팔은 최판석이 왜 자기를 앞세워서 이렇게 급하게 레드 드래곤과 약속을 잡았는지, 그리고 정계에 입문하지도 않은 병약한 딸을 왜 굳이 동행하려고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정말 이해할 수 없군.’
젠킨슨은 눈앞의 엘프를 바라보았다.
결계가 깨지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블레어는 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은 충혈되어 있고 코끝이 빨갛다. 다른 꿈속에서 본 것처럼 프로페셔널하고 사무적인 표정을 띄우려고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다. 그렇게 철벽을 쳐도, 드래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내가 꿈속에서 보고 싶었던 게 방금 전까지 대성통곡을 하다가 아직도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주제에 나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딱딱한 어조로 업무보고를 하는 엘프 비서라고?’
무의식적 욕망이란 실로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회장님께서 연구에 심취하신 동안 면담을 요청한 이들 명단은 이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이미 용언으로 약조하신 내용이 있기 때문에···.”
참 리얼한 꿈이긴 한데, 젠킨슨의 머리는 계속 몽롱했다. 동면에서 막 깬 것처럼 사고와 감각이 무뎠다가 다시 날카로워졌다를 반복했다.
꿈속이라서 그렇겠지?
그는 아직 이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꿈속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기로 했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잠시 후, 그 앞에는 방문객들이 서 있었다. 미리 준비라도 한듯 입장이 매우 빨랐다.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면담을 요청한 것은 박정팔이라는 이름의 오크였는데, 동반자가 둘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안건을 꺼낸 것은 그가 데려온 늙은 오크 쪽이었다.
“이쪽은 제 딸아이, 선아입니다. 갑작스럽게 요청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저와 선아, 그리고 회장님만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젠킨슨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맥락도 없는 급전개인데.
당황한 것은 정팔과 블레어도 마찬가지였다.
“네? 의원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면담을 요청한 주체는 어디까지나 박정팔 의원님이시···.”
드래곤은 흥미로운 미소를 지었다.
자, 이 스토리가 어떻게 흘러가나 끝까지 보자고.
“그러라고 해.”
슬슬 질리기도 했다. 자각몽에서 깨는 방법이 뭘까?
요즘 과로를 했는지 꿈을 꾸는 중인데도 피곤했다. 혹여 꿈 속에서 다시 잘 수도 있을까? 왠지 그러고 싶다.
‘하지만, 모처럼의 희한한 경험이니. 좀 더 꿈 내용을 볼까?’
그래.
저 오크가 뭐라고 말하는지까지만 보고 일어날 궁리를 해 봐야겠다.
자, 말해봐라. 내 심층 의식아.
“이제 우리만 남았군.”
블레어 캠벨과 박정팔이 방을 나간 뒤.
젠킨슨의 꿈속에 발현한 무의식이 말했다.
늙은 오크의 거죽을 뒤집어쓴 채.
“회장님, 이건 꿈이 아닙니다.”
***
“······.”
얼씨구?
“뭐라고?”
“이 상황이 꿈이라고 생각하시지요.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젠킨슨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번 꿈은 정말 심층적이군. 정신분석학적으로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보통 늙은 오크는 뭘 상징하지? 깬 다음 심리학자들에게 한 번 물어봐야겠어.
“제가 박정팔 의원에게 면담을 요청하라고 지시한 것은, 제가 동반하여 회장님과 제일 먼저 마주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누구보다 빨리 말입니다.”
늙은 오크는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곁에 선 수양딸은 긴장한 듯 얼굴을 굳힌 상태다.
“이게 현실임을 확인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바로 ‘그곳’의 비늘을 뽑아 보십시오.”
젠킨슨은 순간 이게 꿈이라는 것도 잊고 반문했다.
“무슨 소린가? 그곳이라니?”
“드래곤들의 비밀 아닌 비밀이지요. 평소에는 근육 사이에 가려진 부위라 남에게 노려질 일은 없고, 오직 자기만 손댈 수 있는 은밀한 그곳 말입니다. 거기 비늘이 뽑힐 때 용들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지요.”
이게 꿈이라는 생각이 오히려 더 확실해지는데.
오크가 그걸 알 리가···.
“꿈과 생시를 구분할 때 흔히 뺨을 꼬집어 본다는 말을 하지요. 어차피 손해 볼 것 없잖습니까? 몽중에 아무리 끔찍한 꼴을 당해도 사람은 그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 없습니다. 다리가 잘리는 꿈을 꾼다고 절단통을 100% 느낄 수 없는 것처럼요. 신경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지금 그걸 뽑아 보셔도 꿈이 맞다면 아픔이 제대로 안 느껴질 겁니다. 한 번 해보십시오. 회장님.”
뭐, 해보지.
어쩌면 그 행동을 기점으로 꿈에서 깰지도 모르는 일이다.
날개가 사라지는 악몽을 꿀 때 항상 땅에 추락하기 직전 눈을 뜨는 것처럼.
그런데.
“···아무리 꿈이라도 좀 민망하군.”
“네, 알겠습니다.”
오크 인간 부녀는 멀찍이 떨어져 등을 지고 섰다. 젠킨슨을 볼 수 없도록 말이다.
용은 자신의 은밀한 취향이 대체 어디까지 닿아있는지 궁금해하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겉에 드러나지 않은 비늘 한 장을 손에 쥐고.
뽑았다.
——!
***
그 순간, 북한산 인근에 거주하는 서울 시민들은 체감 6.5도의 강진을 느꼈다.
국내 어떤 기상재해예언관도 예측하지 못한 인공 지진이었다.
***
콰라라라라!
=회, 회장님!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벽 너머로 전해진 비서의 말에 젠킨슨은 대꾸하지 못했다.
“헉··· 헉!”
젠킨슨은 집기가 무너지고 엉망이 된 레어 내부를 바라보았다. 땀을 흘리는 생물이었다면 온몸이 눅눅하게 젖었을 것이다.
그 아수라장에 휘말리 않을 정도로 멀찍이 떨어진 오크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해하셨지요? 이건 꿈이 아닙니다.”
믿기 힘들지만,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하반신의 욱신거리고 불에 데인 것 같은 격통이 이게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골드 드래곤이 아니라, 2020년의 지구에 살고 있는 레드 드래곤 젠킨슨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순간.
비로소 머릿속의 몽롱함이 사라지고, 의식이 완전히 각성했다.
붉은 비늘 아래에 수납된 여섯개의 뇌가 제대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크아아아악!”
머리를 양쪽으로 잡아당기는 듯한 아픔.
갑작스럽게 어마어마한 기억이 홍수처럼 범람했다. 본래 골드 드래곤으로서 가지고 있던 것뿐만 아니라, 드문드문 꿈속에서 보던 레드 드래곤이 보고 겪고 느낀 장면들이 분출된다. 중간의 공백이 채워지고 이어졌다.
서로 엮이고 엉켜 휘몰아치는 장면들.
말 그대로, 너무나도 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콰라라라라라라!
젠킨슨은 머리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했다. 그의 콧구멍에서 쉴 새 없이 불티가 튀고 화르르! 붉은 기둥이 솟구쳤다.
오크가 목청을 높여 외쳤다.
“네, 이곳이 현실입니다! 다시 잠드시면 안 됩니다. 이번에 다시 꿈을 꾸시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겁니다!”
“대체···!”
젠킨슨은 충혈된 눈으로 노려보며, 간신히 목소리를 흘렸다.
“자넨··· 어떻게?!”
오크가 곁에 선 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 딸 선아에게는 예지능력이 있습니다. 날씨나 지진 따위를 예언하는 허접한 수준이 아닙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인정 받기를, 차원계를 통틀어서 손에 꼽힐 정도의 능력자입니다.”
용은 고통 속에서도 두 눈을 부릅떴다.
뭐라고?!
“저희는 오랫동안 몇 가지 조건이 달성되는 경우의 수를 시뮬레이션해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 작업이 매우 어려워지고, 결과물은 희미해졌으며, 이전까지 보이지 않던 장면이 보였습니다. 그중 하나가 지금, 여기입니다. 바람직한 미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저는 오늘 회장님을 만나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박정팔 의원을 동원하여 무리하게 일정을 잡은 겁니다.”
아프다.
너무 아프지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하필, 오늘?!”
“저를 만나지 않았다면 회장님은 끝까지 여기를 꿈속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머릿속의 충동이, 다시 ‘붉고 거대하고 강력한 무언가’를 끌어안고 다시 잠에 들라고 속삭였을 겁니다. 회장님은 완전히 잠식당하기 전에 잠깐 깨신 겁니다. 저는 그 틈을 노려야 했습니다. 그러니 눈을 뜬 뒤 첫 면담자는 제가 되어야 했습니다.”
붉고 거대하고 강력한 무언가.
그것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쥐고 있던 드래곤 하트가 분명했다.
지금 여기가 꿈이 아니라, 그 반대라고?
자다가 잠깐 깬, 비몽사몽의 상태?
촤악!
그 순간, 누군가 그의 두개골에 정을 박아 넣는 듯했다.
꿈과 현실이 뒤집힌다.
본래의 자리를 찾아서.
그의 입이 열리고 깨달은 바를 외쳤다.
“로, 로드!”
알 수 없는 마법에 집어삼켜진 뒤 강제로 경험한, 골드 드래곤으로서의 삶.
그것은 꿈이었다.
수천 년 동안 이어지는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꿈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도중에 깨어났다.
‘드래곤 하트에 새겨진 마법은··· 본래 로드가 죽고 99일 후에 완성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젠킨슨은 그 순간이 오기 전 거기에 손을 댔고, 마법은 완성되지 못한 채 발동되었다.
그래서 도중에 깰 수 있었던 걸까?
“네,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다시 자고 싶은 충동에 지면 안 됩니다. 그 마법을 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꿈을 다시 꾸면 이번엔 완전히 잠식당할겁니다.”
그 말에 대꾸할 겨를도 없이.
콰라라라라라!
용은 다시 울부짖었다.
=회, 회장님!=
밖에 있던 블레어는 더 이상 사태를 방관할 수 없었다.
쾅!
그녀는 지시를 어기고 문을 열었다. 본래 셋만 남겨졌던 공간에, 블레어와 정팔이 함께 뛰어들었다.
젠킨슨과 최판석은 그들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드래곤은 고통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다.
“크으으! ···자네 딸이 미증유의 예지능력자가 맞는 것 같긴 하군.”
문 근처에서 누군가 경악하며 날카롭게 숨을 삼켰다.
정팔이 낸 소리였다.
최판석은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는 걸 보지 못했다. 드래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내게 이걸 알려 주는 겐가?”
목적이 무엇인가?
그 답을 최판석은 속으로 뇌까렸다.
‘이 결과를 ‘그분’이 아시면 매우 기뻐하실 테니까요!’
자신을 지배하는 주인의 정체를, 그 이름 세 글자를 말할 수 없지만.
오크는 최대한 진실에 가까운 말을 동원했다. 드래곤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었기에.
최판석의 눈동자에 불길이 일렁였다. 목소리는 광기에 젖은 듯했다.
“저는 지금 공을 세운 겁니다!”
“······뭐?”
“머지 않았습니다. 곧 신세계가 도래합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세상이. 황금률과 도덕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이!”
젠킨슨은 저 오크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옳고 그름의 개념이 무너졌습니다. 권선징악이라는 단어는 망상병자의 헛소리가 된 지 오래입니다. 선의를 선의로 보답받을 수 없고, 악의가 악의로 돌아오지 않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를 겁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열기에 젖었다.
“그곳은 만인이 자신의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더 이상 가지고 태어난 것이 그들을 결정짓지 않습니다. 모두가 행한 대로 평가받고 준 만큼 돌려 받습니다. 절대적 기준을 품은 저울이 사람과 짐승을 구분할 겁니다. 그리고 선인과 악인도 나눌 겁니다. 그곳은 악인이 당연히 벌을 받고 선인은 필연적으로 상을 받는 세상입니다.”
악인은 지옥으로, 선인은 천국으로.
모든 것이 옳게 돌아가는 세상.
“그리고 저는 당신을 구해냄으로써 공을 세웠습니다.”
젠킨슨은 주인의 ‘벗’으로 남아야 한다.
“보답으로 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상을 받겠지요!”
오크, 최판석은 그 상을 이웃과 나눌 것이다.
그의 울타리 안에 있는 이들과.
그와 가장 비슷한 ‘사람’들과.
“크으윽!”
그 순간.
젠킨슨의 뇌를 헤집는 고통이 더 심해졌다.
현실의 기억과 자아, 그리고 꿈속에서 겪었던 것이 서로를 밀어내며 저항했다.
용이 괴로워하는 사이.
“······최의원님.”
정팔이 노인을 불렀다. 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최판석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오크를 대표하는 5선 의원은 단호하게 말한다.
“나중에.”
“아니요, 저는 지금 여쭤봐야겠습니다. 선아양이 예지 능력자라는 게··· 사실입니까?”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하네.”
“아니, 그렇다면!”
울듯 분노하듯.
정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예지를 할 수 있었다면 그때 그 사고도···!”
최판석은 후배 의원의 말을 중간에 끊어냈다.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예언은 전가의 보도가 아니야. 선아는 원하는 장면을 원하는 때에 TV 채널 돌리듯 확인할 수 없어. 그날의 테러는··· 안타깝지만 예지하지 못했네. 지금 자네가 이 방에 뛰어 들어오는 장면을 보지 못했듯.”
마지막 말을 하며 그는 딸과 짧게 눈길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정팔은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 그날, 그 사고가 있었던 그날!”
“박의원, 그만. 괜한 의심으로 자네의 마음을 지옥처럼 만들지 말게.”
오크 둘의 대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콰라라!
용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지고.
촤아아아아아아악!
젠킨슨은 어떤 소리를 들은 듯했다.
자신의 몸이 두 개로 쪼개지는 소리가.
물론, 착각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들려온 목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자아와 기억이 서로를 물어뜯는 아수라장이 겨우 사그라든 그때.
– 이런, 실패했군.
드래곤은 분명 들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전달되지 않는 듯하다.
젠킨슨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머릿속의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 그것도 애매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목소리.
레드 드래곤 젠킨슨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로드?!”
그의 내면에서 이미 죽은 드래곤 로드의 목소리가 들린다.
젠킨슨이 가장 먼저 떠올린 가능성은···.
내 몸에 로드의 영혼이 들어온 것인가?!
“성불하지 못한 겁니까? 설마 내 몸에 빙의를? 그럼, 드래곤 하트의 그 마법도 애초에 내 몸을 빼앗으려는 의도로!”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가 회답했다.
– 자네가 영매 체질도 아닌데, 두 영혼이 한 몸을 어떻게 같이 쓰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니, 그럼 지금 이건 뭡니까?!”
뇌내 음성이 대꾸한다.
레드 드래곤이 추호도 예상 못한 말을.
– 드래곤 역사상 최초의 해리성 장애 환자가 된 걸 축하하네, 젠킨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