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64
265. 사람의 자격 (30)
***
중얼중얼.
콰라라라!
웅얼······.
크릉?
콱!
콰라라라!
“······.”
블레어는 말을 잊은 채 젠킨슨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땅을 구르며 괴로워하던 그는 약간이나마 안정을 되찾은 듯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아직 동공은 쉴 새 없이 흔들렸고 입에서는 게거품이 흘러내렸다.
마치 충격적인 소식이라도 들은 듯 입을 헤 벌리고 허공을 응시했다가, 다시 아무도 없는 곳을 향해 말을 건다.
또 중얼중얼.
그러더니 화가 난 듯.
콰라라!
또 소리를 지른다.
저건 용의 포효라기보다는 짖는 것에 가까운··· 그러니까, 엘프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용 짖는 소리···.
“아아.”
블레어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든다.
“회장님!”
깨고 난 직후부터 낌새가 이상하긴 했다.
지금 주변에는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메시지 마법을 발동한 것도 아니라는 뜻.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킨슨은 계속 뭔가 중얼거린다. 상상 속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섬뜩했다. 저 상상이, 병적 망상이나 환상이라면?
‘어떡하지?’
겨우 울음을 그쳤건만 냉철한 표정이 다시 무너졌다.
눈가에 물방울이 맺힌다.
‘회장님이.’
블레어는 목 놓아 울고 싶었다.
‘회장님이··· 정말 미치셨나봐!’
***
미쳤나?
내가 미친 건가?
‘맙소사!’
레드 드래곤은 머리를 움켜쥐었다.
미쳤어? 젠킨슨이? 고룡인 내가? 맙소사, 정신병에 걸린 드래곤이라니!
“말도 안 돼!”
수치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황망할 뿐이다.
그는 방금 들은 뇌내 음성을 복기했다.
“애매하게 실패했다고?”
그의 자아는 완벽하게 둘로 쪼개진 상태.
심지어 기억까지 분리되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할 정도다.
전혀 다른 두 드래곤의 삶을 모두 겪은 탓에, 융합을 거부하고 정신병적 증상으로 발현된 것이다.
“민준, 그 친구 말이 맞았어!”
그가 실종되기 전 읊었던 추측을 떠올린다.
드래곤 로드는 죽고 나서도 살기를 원했다.
민준은 그 방법을 빙의로 추측했지만···.
“그래, 꼭 영혼이 몸을 갈아탈 필요가 없지! 내가 망자의 인격에 좌우되고, 망자의 기억을 품은 채, 망자가 의도한 방식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 망자는 사실상 죽어서도 사는 것이 아닌가?
젠킨슨의 몸을 빌려서.
“당신!”
레드 드래곤은 분노했다. 실상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지만 참을 수 없었다. 로드의 인격을 향해 소리친다.
“당신을 인격자로 착각한 내가 바보였다! 이런 흉측하고 음흉한 노인네 같으니! 한때 당신을 내 롤 모델이자 구루(Guru)로 삼은 것이 창피할 정도야!”
– 음, 한때나마 날 그리 높게 평가해준 것은 고맙군. 흥분하지 말고 일단 끝까지 들어봐.
“뭘 말이오?!”
– 실패했다는 건 그 뜻이 아니야.
“그럼?!”
머릿속 목소리는 한숨 비슷한 감정을 흘렸다.
– 드래곤 하트에 건 마법은 내가 죽고 99일이 지나야 완성되는 스펠이었어. 하지만 자네가 그 전에 건드려버렸지. 내가 예상 못한 사태야.
사실이긴 했다.
그 젊은 도둑놈들 때문에···.
– 안타깝군. 내게 예지 능력이 있었다면 좀 더 완벽하게 준비했겠지. 아니, 그랬다면 일단 죽지도 않았으려나?
한 몸을 공유하는 두 자아는 동시에 그곳에 있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최판석의 딸은 지금까지 입증한 능력만 봐도 엄청난 예언자가 분명했다.
– 저 인간의 존재를 미리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말 돌리지 마시오! 그래서 당신 목적이 대체 뭐야?!”
– 오크 말이 맞기는 해. 그대로 다시 잤으면 자네는 내 인격에 완전히 먹혀 버렸을 거야. 젠킨슨의 자아는 소멸했겠지. 하지만.
젠킨슨이 다시 화를 내기 전에 로드의 인격은 재빨리 말했다.
– 그건 내 의도가 아니었어.
“그 말을 믿으라고?”
– 내가 미쳤다고 수천 년 용생을 남들에게 그대로 까발리고 싶었겠나? 사실상 우주에서 가장 적나라한 포르노그래피잖아. 자네는 내 모든 것, 절대 공개하기 싫은 감정과 부끄러운 행동도 봤지. 심지어 나의 가장 은밀한 욕망까지···.
“내 앞에서 그 ‘은밀한 욕망’ 이야기는 하지도 마시오! 당신 때문에 착각한 걸 생각하면···!”
– 아무튼, 그 마법이 99일 동안 숙성되어 제대로 발동되었으면 결과는 아름다웠을 걸세. 자네 인격과 기억은 그대로 보존된 채 내가 전하려던 생각과 감정, 기억이 추가로 전승되었겠지. PC에 보조기억장치 하나를 더 꽂은 것처럼.
“뭐라고?!”
– 심지어 계승자는 그걸 본래 자기 것과 완벽하게 구분해서 인지했을 터야. 수천 년치 생애를 리얼 타임처럼 겪는 부작용도 없었을 것이고.
젠킨슨은 현기증을 느꼈다.
아니, 잠깐만.
– 그 뿐인가? 원래는 며칠이나 잠을 잘 필요도 없이 순간적으로 계승이 끝났을 거야. 알겠나? 역사상 유래 없는 정교하고도 거대한 정신계 마법이었다고. 내 생애를 건 걸작이자, 놀랍도록 수준 높은 주문이었네!
“그럼 내가 이렇게 된 건···.”
– 지금 이 병리 증상은 주문이 애매하게 실패한 결과야. 그나마 엘프와 오크가 차례로 개입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실패했겠지. 저들이 자네를 구한 걸세. 신성력으로 깨우고 나서는 다시 잠들지 못하게 그곳의 비늘을··· 흠흠, 욕봤네. 아무튼 그런 방해가 없었으면 젠킨슨은 사라지고 그냥 또 다른 ‘내’가 되었을 터.
그것이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 반대로 100% 성공했다면, 계승자의 인격을 해치지 않고 머릿속에 안정적이고 완벽한 형태로 입력되었겠지. 하지만 지금 결과를 봐. 자네 인격이 기억과 함께 분열되어 버렸잖아!
“맙··· 소··· 사!”
진상을 모두 이해하고 나니.
분노가 들끓어 오른다.
그럼, 내가 미치광이 다중인격자가 된 이유는 결국···.
“그 도둑놈 새끼들 때문에에에에에에!”
– 진정하고 마저 들어. 자네가 내 기억을 쉽게 못 읽는 것처럼 그 반대 방향도 힘들어. 젠장! 원래 이런 형태가 되면 안 되었는데. 대체 위원회 쪽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아니, 잠깐만. 그 전에··· 그래서 대체 당신 목적이 뭐였던 거요?!”
그러자 뇌내 음성의 어조가 확 바뀌었다.
진지하고도 음울하게.
– 이 마법에 걸릴 계승자‘들’에게 내가 느낀 것과, 아는 것, 간절히 기원하는 것을 전하려고 했지.
“계승자들이라니?”
– 내 후임 말고도 용외종족이 한 명. 합해서 두 명이지. 난 죽기 전 드래곤 하트에 안배를 해 놓았어. 그 결정이 이곳이 존재할 확률과 전혀 다른 공간에 존재할 확률을 중첩시킨 거야. 별개의 장소에 있는 두 사람이 동시에 마법에 걸리도록.
젠킨슨은 그 말을 바로 이해했다.
“잠깐, 그건 드래곤 기술력으로 되는 수준이 아닌데?”
– 엔델리온 공주의 힘을 빌렸지. 사실 촉수 생물 고유의 기술력이라기보다 ‘그들’에게 보고 배운 것이겠지만. 애초에 내가 생전 엔델리온의 아티팩트에 집착한 것도 사실 고대 종족보다는 그들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어.
“아니, ‘그들’은 또 누구요?”
– 이 마법이 겨냥할 용외종족, 그 사내도 ‘그들’ 중 한 명이었지.
“그게 누군데?”
– 실은 자네도 아는 사람일세.
뇌내 음성이 그 이름을 말했다.
***
“민준.”
델은 이번에는 카인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준비됐어.”
그녀는 우주선 밖으로 나와 통신기를 설치한 다음 왕족 암호로 구성된 접속어를 입력했다.
엔델리온의 왕은 이번 회담에서 민준과 델을 지목했다.
‘내게 무슨 말을 하시려는 걸까?’
모왕이 민준의 함대를 별과 함께 날려버리려고 시도했을 때. 델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녀는 딸을 포기한 것이다.
고대 종족은 불완전하게나마 영생을 누림에도 후계자를 만든다.
거기에는 절대 배신하지 않을 계파 수를 불리는 의미도 있고,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영혼이 소실되는 경우를 대비한 처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델은 자신이 창조된 배경에는 생명체로서의 본능이 관여하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유전자의 지시에 따라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아낌없이 사랑하고픈 마음 말이다.
오로지, 사랑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제보니 그 사랑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모양이다.
사랑하기 위해 만든 존재는 그 감정을 거둔 순간 쓸모가 없어지는 걸까?
아니, 애초에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게 손쉽게 줬다가 다시 회수할 수 있는 것일까?
파앗!
통신기 위에 마법 영상이 떠올랐다. 다른 고대 종족이 염탐하지 못하게 엔델리온 측이 준비한 비밀 회선.
지지직!
영상 안에서 거대한 촉수 생물이 고요한 시선을 보낸다.
엔델리온의 왕.
“아시프-666.”
민준과 왕의 시선이 교차한다.
그녀는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우리 종족에게 이것 말고 따로 불리고 싶은 호칭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쓸 수 없겠군. 기나긴 시간이 흐른 지금, 그 단어의 의미는 모욕적으로 변질된 지 오래이니 회담에 적절치 않으리라 판단한다.”
델은 모왕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민준은 그녀의 의중을 이해했음에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호칭 따위는 상관없다, 엔델리온.”
왕은 수긍하는 촉수짓을 하더니 말했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 잠깐의 시간을 허락하겠는가?”
모녀 간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뜻.
민준이 옅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왕은 눈동자를 돌려 그의 곁에 선 딸을 보았다.
“$@$@^$@!#.”
다른 종족들이 흉내낼 수 없는 음성.
“네, 어머니.”
델은 왕이 자신의 본명을 부르자 긴장했다. 이 회담에 지정해서 부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단순히 안부를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침묵 속에서 다음 말을 기다리던 그때.
“정상인인 우리에겐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네게는 가능하겠지. 사실상 지금까지 그것을 매우 길고도 느릿한 형태로 실행해 온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다소 긴 문장으로 말문을 연 왕은 딸을 향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번에는 간결하게 지시하는 듯한 어조였다.
“자살해라.”
***
“뭐라고···?”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젠킨슨은 자신의 귀 대신에 뇌를 의심했다.
사실 이건 다중인격장애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미친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조현병 같은 종류 말이다.
“아니, 지금, 그러니까···.”
– 그래, 예민준. 그 친구가 차기 로드 말고 이 마법에 걸릴 또 한 명의 계승자야. 내 유언장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던 걸 기억하지?
그는 예민준에게 유품으로 남긴 큐브에 대해 설명했다.
– 본래 계획대로 흘러갔다면 내가 죽은 날로부터 99일째에 차기 드래곤 로드는 내 시신에서. 민준은 그 큐브를 통해 내 하트를 관찰했을 걸세. 그것은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니까. 자네도 경험한 것처럼 그 마법은 관측당할 때 발동하지. 관찰 행위 자체가 영향을 주는 원리야.
“그럼 민준의 머릿속에도 당신의 사상과 기억을 심고 싶었단 말입니까?”
– 그래, 난 두 사람에게 전하고 싶었어. 차기 로드와 그에게.
“아니 후임은 그렇다고 쳐도, 그 친구는 왜?”
– 자네는 아직 그의 진정한 정체를 모르네.
로드의 인격이 말했다.
– 놀라지 말게. 예민준. 위원회에서 아시프-666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그의 정체는 사실··· 식룡족이야.
그 순간, 기억의 뭉텅이가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드래곤을 가축으로 키웠던, 고대 종족보다도 오래전에 세상을 지배한 신비의 존재.
지끈!
“이런, 이건 뭐···.”
두통을 참아내며 젠킨슨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목소리를 그냥 무시해야 할까.
아니면 병원이라도 가야 하나? 하지만 드래곤을 환자로 받는 신경정신과가 존재할 리가···.
그래, 차라리 막내를 불러야 겠다. 그 정도의 신성력 능력자라면 광증도 치료할 수 있을 터다.
– 회피하지 말고 계속 듣게. 그 의심이 왜 생겼고 무슨 방식으로 연구하여 어떠한 추론 과정을 거쳤는지는 차차 설명하지. 좀 긴 이야기라서. 일단 그리 결론을 낸 이유부터 이야기하겠네.
“아니··· 허, 참.”
젠킨슨은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귀를 닫으면 안 들리는 것도 아니고, 도망친다고 멀어지는 것도 아니고. 일단은 계속 들을 수밖에.
– 그를 처음 만난 건 지구에서의 내 일곱 번째 이혼 축하 파티 때였지. 자네도 기억할 걸세.
“···맞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소개했지요.”
사실 ‘당신’이라는 말도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는 내 분열된 인격이니까.
– 난 그 순간 그에게서 독특한 파장을 느꼈네. 환하게 퍼져나가는··· 빛이었지. 매우 찬란한.
“인간 남자를 보고 찬란한 빛을 느꼈다고? 어쩐지 이혼을 너무 자주한다 했어. 이제보니 진짜 은밀한 욕망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던 거···.”
– 농치지 말고 계속 들어. 그 파장 때문에 난 그를 식룡족이 아닐까 의심했어. 당시 내 심리 상태도 영향을 미쳤지. 좀 비참하지만··· 본능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그게 왜 비참합니까? 용이 아닌 종족과도 친구가 될 수 있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신과 나의 공통점이잖습니까.”
– 끝까지 들으면 이해할 걸세. 아무튼 내 심증을 증명할 물증을 얻기 위해 난 다른 실험을 해 보았어.
이어진 말을 들은 젠킨슨은 숨을 헉!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 민준을 만난 뒤, 난 오랜 시간에 걸쳐 그에게 내 피를 먹여 보았네. 용을 포함한 어떤 종족도 향미를 감지하지 못할 극소량을, 조금씩.
“이 미친 영감탱이가! 아니, 대체 어떻게?”
젠킨슨은 뒤늦게 기억을 떠올렸다.
로드와 예민준은 그리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술친구였다.
그가 당황한 사이 로드의 인격은 상대가 기겁할 말을 연발했다.
– 나는 예전에 평범한 인간 사형수를 대상으로 용혈을 먹이는 실험을 해본 적이 있지.
“뭐라고요?!”
– 양쪽 다 알레르기 반응이 없는 건 같았지만, 민준에게만 특기할 차이가 있었어. 비교 분석한 결과 확신했다네. 예민준 그 친구는··· 식룡족이 맞아.
그때, 젠킨슨의 것이 아닌 기억이 출렁거렸다.
벗의 목소리.
‘어? 오늘따라 술맛이 좋군요. 로드, 전 다음 것도 이걸로 하겠습니다.”
젠킨슨은 현기증을 느꼈다.
– 그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로드의 질문에 답하는 것보다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는 쪽이 급했다.
“잠깐만요. 그가 정말 식룡족이라고 확신했다면.”
젠킨슨은 다음 말을 쉽게 뱉지 못했다.
“당신은 왜···.”
– 왜 예민준, 그 친구를 방치했냐고?
“······.”
뇌내 음성에는 자포자기한 기운이 감돌았다.
– 나는 그를 해칠 수 없었네. 자네라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젠킨슨은 부인할 수 없었다.
– 그는 기억은 물론이고 능력 역시 상당 부분 잃은 것으로 보였어. 그러니 위원회의 형노가 되었겠지. 앞으로 회복할지도 확실치 않았고.
이런 상황에서.
– 어떤 사람이 앞으로 드래곤을 도축하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해치는 일이 과연 타당한가? 그러지 않을 수도 있잖아?
“······.”
– 그를 알면 알수록, 날 포함한 주변 사람에게는 끔찍히도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네. 나만 볼 수 있었던 그 후광도 영향을 끼쳤을지도 몰라.
물론 정서적인 반감 외에,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 더군다나 그를 죽이면 고대 종족의 보복이 돌아올 게 확실했고, 어쩌면 더 무서운 존재들의 복수를 직면할 수도 있었지.
“아!”
– 그래. 식룡족은 한 때 우주를 지배했네. 예민준 그 친구 말고 다른 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실은 그를 대표로 이곳에 보내 우리의 윤리와 사람됨을 시험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우리 같은 ‘벌레’들이 동족을 죽인 사실을 알게 될 때, 어떤 징벌이 이어질까?
젠킨슨은 숨을 헐떡였다.
– 같은 맥락으로, 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네. 그런 위대한 존재가 왜 죄수로 전락했지? 어쩌면 이것은··· 고대 종족에게 죄지을 빌미를 주는 테스트가 아닐까? 어떠한 자격을 실험하는 기나긴 관문을 우리 모두는 통과하는 도중이 아닐까?
“그가 일부러 잡혔다는 소리입니까?”
–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생각했다는 이야기야.
그리고, 한 가지 포기할 수 없는 선택지가 있었다.
– 만약 정말로 기억을 잃은 게 확실하다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네. 그들의 긴 수명과 비교하면 수형자로서의 삶은 갓난아이의 그것이나 마찬가지겠지. 순백에 가까운 정신이라고 해도 비약은 아닐 터. 다시 오지 않을 없을 찬스처럼 보였어.
“맙소사, 당신!”
– 다시 말하지만 그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어. 그저, 전하고 싶었네. 먼 미래를 위한 보험이었어. 앞으로 민준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 정말 영원토록 수형자 신세일 수도 있지만, 반대라면? 만에 하나 힘을 되찾고 세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다면?
신과 같은 존재가 주관적 의지를 지니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세상을 어떤 단어로 묘사해야 할 것인가?
– 그때를 대비해서. 민준 외의 다른 이들까지 돌아오는 세상을 염려해서. 난 식룡족 중 단 한 명이라도 알아줬으면 했어.
그는 젠킨슨도 잘 아는 지구 문학을 인용했다.
–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살갗을 덮고 그 사람이 되어 세상을 걸어야 한다지.
로드의 인격은 음울하게 중얼거린다.
– 사실, 다른 종족 입장에서 보면 드래곤은 정말 지독한 생물이야. 우린 그걸 인정해야 해. 위원회 체제가 완성되기 전 몇몇 용족은 지성체를 먹기도 했지. 하지만 그게 우리가 먹힐 이유가 될 수는 없어. 죄와 벌은 서로의 거울이 되어서는 안 되네.
그래서 골드 드래곤은 미래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에게 진심을 전달하려고 했다.
– 나는 우리의 자격을 인정받고자 했네. 그것은 가장 비참한 주장이자 호소였지.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해야 했어. 한 줄기의 희망이라도 존재한다면 말이야. 드래곤이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기대를 거두지 않아 주기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의 힘을 믿어 주기를.
내 모든 것을 품고 난 뒤.
나의 생각과 감정을 피부로 느끼고, 내 삶의 발자국을 따라 밟고 나서도.
그래도 당신은 용을 식량으로 간주할 것인가?
당신들은 우리를 진정으로 이해한 다음에도 먹을 수 있을 것인가?
– 살해와 섭식은 근본부터 다르지. 내 시도는 생존 투쟁 이상의 개념이었네. 살아남을 자격을 넘어, 먹히지 않을 자격. 최소한의 존엄을 존중받을 자격. 생명으로서의 가치를 평가받지 않아도 되는 자격.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세력을 인지한 순간, 로드는 제일 먼저 이것을 준비했다.
– 그가 존엄에 조건을 달고 따지지 않기를 바랐네. 다름과 부족함, 잘못됨이 그 조건이 되지 않기를.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의무와 규칙을 어겨도, 혹여 그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도 자비를 베풀기를. 내가 살아온 기억이 그 주장의 근거였어.
우리는 생각합니다. 자유롭게 사고하고 스스로 선택할 의지를 지닙니다. 기쁨과 슬픔을 느낍니다. 또한 항상 발전해 왔으며 앞으로도 발전할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 혹여 잘못한 부분에 대한 벌을 받더라도, 그것이 자격을 박탈하는 형태로 구형되지 않길 바랐네. 제발 그 자격만은 빼앗지 않기를.
다시 말하여.
– 그래, 사람의 자격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