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65
266. 나의 가장 소중한 (1)
***
거미용이 낳은 막내는 명상에 빠졌다.
누가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준 적은 없다. 이능력을 깨우친 뒤 그는 종종 이렇게 다이빙하듯 의식을 깊숙한 곳으로 집어 던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양육자들이 신성력이라고 부르는 이능은 더 강해졌다.
명상 주제는 주로 이 힘을 허락한 근원, 상상 속의 신에 대한 것이었지만 가끔은 생각의 물꼬가 샛길로 빠지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아, 다시 가고 싶다. 홍콩.’
블레어가 급히 방 안으로 뛰어들어간 탓에 모처럼 혼자 남은 그는 형제들이 보고 싶었다.
‘애초에 그 사고만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안 와도 됐을 텐데.’
능력이 밝혀진 뒤 막내의 관리는 더욱 엄격하고 까다로워졌다. 젠킨슨이 ‘절대’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등 극단적인 어휘를 동원해서 지시했기 때문이다.
설사 블레어라고 해도 함부로 그를 홍콩 연구실에서 빼 올 수 없을 정도였다.
막내는 한국에서의 테러가 없었다면 자신이 지금쯤 수천 킬로미터 밖에서 형제들과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으리라 확신했다.
하필 젠킨슨이 그를 데려온 후 이상한 상태에 빠진 탓에, 막내도 얼떨결에 계속 한국에 체류 중인 것이다.
‘하지만··· 내가 와서 다행이었어.’
비록 형제들과 떨어져서 쓸쓸하긴 하지만.
막내는 생각한다. 젠킨슨이 자신을 여기 데려온 것은 옳은 일이었다고.
‘그 사람들, 몹시 슬퍼하고 있었지.’
응급실의 아비규환은 그가 짧은 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강렬한 사건이었다.
자신의 손에서 빛이 터져 나올 때마다, 절망하던 보호자들 얼굴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막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특별한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을 때 막내가 이런 장면을 상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형제들처럼 제자리에 앉아 먼 곳을 보거나, 불과 물을 허공에서 쏟아 내는 정도의 멋있는 능력을 원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이 능력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막내는 단호하게 답할 수 있었다.
엄청나게 마음에 든다고.
‘세상에 이것보다 좋은 능력은 없을 거야.’
좋은 것을 넘어, 훌륭하다.
그들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다.
막내는 명상에 잠긴 채 그의 신에게 기도를 보낸다.
‘제게 이런 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답은 없다.
그럼에도 막내는 신의 실존을 굳게 믿었다. 상대의 침묵 때문에 서운해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만약 형들이나 내가 아는 사람들이 그런 사고를 당했다면 나는 무척 슬펐을 거에요.’
하지만 이 능력이 있는 한, 앞으로 그들이 아무리 큰 상처를 입어도 살릴 수 있다. 불치병 역시 치료 가능하다.
한편 막내는 형제들의 피에 용과 하프 엘프의 피가 섞인 것을 안다. 적어도 평범한 인간보다는 긴 세월을 살아갈 수 있을 터다.
스스로 신앙을 깨우친 사제는 섬기는 신에게 감사를 보내는 한편 그에 대해 궁금해했다.
‘당신은 어떤 분이신가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막내는 신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초상화를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내가 힘을 쓸 때마다 빛이 나오잖아. 그 섬광 역시 그분이 보내 주는 거겠지.’
온몸이 성스러운 후광으로 뒤덮인 존재를 상상한다.
‘그리고 무척 자비로운 분일 거야.’
다른 신성력 능력자들과 마찬가지로, 막내가 처음 깨우친 이능은 상처 입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는 힘이었다.
‘그분은 누구도 다치거나 죽는 걸 원치 않는 게 분명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 누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기를 원하시매.
‘내가 내 형제들을 사랑하듯,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분이겠지.’
우리를 사랑하는 그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나의 주인.’
막내의 심상에서 신의 정체성이 채색되고 덧그려진다. 그가 섬기는 자의 윤곽이 또렷하게 조형된다. 이런 과정이 거듭될 수록 막내의 능력은 더 강해졌다.
그리고 원시 신앙의 영역에서 기도문이 완성되었다. 사람의 희망과 기원이 그것에 투영된다.
막내가 명상 중 읊은 그것은,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종교에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내용과 닮아 있었다.
사제는 신이 자비로운 이로 존재하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주기를 기원했다.
***
엘라후-프라가 사제들은 그들의 신이 절대 자비로운 존재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특히 죄인 앞에서는 말이다.
필요하다면 악인들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짜내는 신.
“엔델리온의 왕이 헛된 수작을 부리는군요.”
“그래봤자 본인들의 죄만 더해질 것을.”
“종국에는 저울에 기록된 죄의 무게만큼 피를 지불하겠지요.”
“그 무게는 신의 셈법에 따라 계량될 것이고 말입니다.”
신과 성모가 적들의 수장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주교들은 모함 내에 머물렀다.
민준이 금했기에 밖의 담화 내용은 들을 수 없었다. 감히 엿들으려는 이들도 당연히 없었다.
그들은 그저 촉수 괴물들의 왕이 지금쯤 무엇을 제안하고 있을지 추측했다.
설마하니, 회담 시작과 동시에 성모에게 자살을 권유했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한 채.
“이제와서 협상을 요구하다니.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지 않습니까?”
“음모를 꾸미고 함정을 파놓더라도 그걸 우회하면 그만입니다. 화신께서도 그리 생각하시겠지요. 일단 놈들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들어나 보자고 하셨잖습니까.”
민준이 그리 결정한 이상 주교들도 이견은 없었다.
윰투스가 중얼거렸다.
“놈들도 얄팍한 수가 통하지 않을 것은 짐작할 겁니다.”
엔델리온 아이들 보모 역할은 함내 후배 주교에게 떠넘긴 상태였다.
처음에는 윰투스 말고 다른 세눈박이들도 극히 혐오하던 아이들은, 일단 그에게 익숙해지고 나자 다른 주교들에게도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끝내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는 아이들도 존재했지만 말이다.
“굳이 카바이트와 토드까지 따돌리고 대담을 원한 건, 엔델리온식 사고에 매몰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 촉수 생물들은 어떤 선택을 하든 리스크 회피를 최우선으로 둔다.
“성모께서 말씀하시길, 저번에 행성을 폭발시킨 아티팩트가 엔델리온제라면 왕이 현장을 원격으로 지켜보았을 확률이 높다더군요. 그 결과 신의 군대가 예상보다도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승패를 계산하는 주사위꾼들이 더 바빠졌겠죠.”
윰투스는 델의 추측을 전했다.
“위협을 느낀 그들은 이 전쟁이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아도, 설사 카바이트와 토드가 멸종하는 한이 있어도 그들만은 다치거나 죽지 않을 길을 찾으려는 겁니다. 일종의··· 보험이지요.”
***
델은 순간 대꾸할 말을 잊었다.
‘지금, 뭐라고?’
공기가 급속히 얼어붙었다.
설마 잘못 들은 것인가?
엔델리온의 왕은 델이 그 의혹을 산산조각 내고 충격적 확신으로 재조립하도록 도와주었다.
“듣지 못했니? 자살하라고 했다. 나는 네가 아시프-1에게 세뇌당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그러니 할 수 있을 거야.”
그 순간.
구르르르!
공기가 이글거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델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눈으로 민준을 곁눈질했다.
그는 처음과 다름없이 얼굴에 어떤 표정도 띠고 있지 않았다. 무심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시각으로 포착 불가능한 에너지의 분출이 주변 공간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모녀의 대화는 분명 왕가 암호로 이루어졌는데도···.
‘분노하고 있어.’
그는 대화 내용을 모두 알아들은 것 같이 반응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델은 태초의 종족이 아니라 자신이 알던 수형자 곁에 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필 그 사실을 반가워할 수 없는 최악의 타이밍에.
“너는 어렸을 때부터 결함이 많은 아이였지.”
왕은 계속 딸에게만 집중한다.
화면으로는 민준의 반응이 전해지지 않는 것 같다.
“네겐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능력이 부족했어. 그럼에도 널 포기할 수 없었던 건, 그 특징이 엔델리온 개인으로서는 단점이지만, 왕족의 일원으로서는 좋은 덕목으로 발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나마 말이야.”
델은 그 말뜻을 이해했다.
“···고귀한 자의 의무 말이군요.”
엔델리온 사이에서 신의 존재가 부정되고 가치관이 새로이 정립되고 나서도.
먼 옛날 ‘별을 휘감는 촉수’가 가르친 윤리 개념의 일부는 현대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우리 왕족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엔델리온이라는 종족의 존엄과 명예야.”
델도 잘 아는 내용이다.
“넌 다른 어떤 왕족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소명을 실천할 수 있지. 내 판단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다오.”
어머니는 딸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비록 승계 과정이 완벽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네 머릿속에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들이 깃들어 있다. 아시프-1은 아직 그걸 다 읽어내지 못했을 거야. 널 세뇌하지 못한 것과 동일한 이유로.”
델도 고대 종족의 세뇌가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왕이 저리도 강하게 확신하는 걸 보니, 혹시 왕족의 정신에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강력한 방어 기제가 설치되어 있는 걸까?
거기부터는 델도 모르는 영역이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널 구해내려고 했지만, 전면전이 시작된 이상 어떠한 낙관적인 기대도 할 수 없게 되었어. 구출작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이 전쟁에서 너는 그들의 강력한 무기나 마찬가지이고. 그러니 동족들을 위해서 스스로 희생해라.”
그녀는 차분하게, 그리 지시하는 이유를 하나 더 들었다.
“앞으로 양측 전력이 어떤 방식으로든 충돌할 테고, 토드와 카바이트는 우리가 만든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서겠지. 그 과정에서 네가 죽고, 그 소식이 알려진다면?”
왕이 판단하기에 포로로 잡힌 공주는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 이미 그 죽음이 확인되어야 한다.
”우리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너도 알겠지. 세눈박이들이나 고블린, 혹은 카바이트나 토드 따위의 죽음이 수백만, 수천만 단위로 전해져도 전혀 슬퍼하지 않을 그들이지만.”
그녀의 외눈에서 단호한 빛이 번뜩였다.
“너 같이 ‘어린’ 엔델리온이 자기가 만든 무기 때문에 죽은 사실이 전해지면? 기술자들 사기에 분명 큰 영향을 줄 터야.”
왕은 애초에 저번의 행성 폭발 때 델이 죽을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가 진정으로 염려하는 것은 앞으로의 일이다.
“······.”
침묵이 흐르고.
“그래, 지금 당장은 결단이 힘들겠지.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니. 하지만 옳은 선택이 무엇인지 너는 알 터이니, 기다리겠다.”
델은 여태 왕이 늘어놓은 말에서 결정적인 키워드가 빠진 것을 깨닫는다.
다름 아니라, 델이 자의로 아시프-666에게 협조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당연한 추궁이 빠져있었다.
극비로 취급되는 그녀의 수형자 시절 신분과 노역 기록까지 속속들이 아는 왕이 하필 정작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은 것.
‘이 대화를 다른 엔델리온이 함께 듣고 있는 거야!’
델이 의도를 추측하는 사이 왕은 다시 눈동자를 돌렸다. 그때부터 그녀는 공주를 마치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그리곤 왕가의 비밀 언어 대신 차원 공용어로 말한다.
“아시프 666. 사담은 끝났다. 기다려줘서 고맙군.”
민준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을 유지했다. 그를 향해 왕은 준비했던 말을 시작했다.
“만약 위원회가 네게 이렇게 제안한다면 어떠한가?”
그렇게 시작된 말은,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대로면 서로가 서로의 살을 깎아먹는 소모전이 예상되는 상황. 인정하기 싫지만 이번 전쟁은 예전에 겪은 드래곤들과의 전쟁보다 훨씬 오랜 시간 이어질 확률이 높다. 양측의 대립은 차원계 전체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며, 직접 연관되지 않은 행성들조차 극심한 경제적 타격과 혼란을 겪게 될 터. 따라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서로 적당한 대가를 주고받고 휴전함이 어떠한가?”
그야말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었지만.
정작 민준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꾸는 무미건조했다.
“적당한 대가라 함은?”
왕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차원계 중심부를 제외한 나머지 차원 절반의 지배권을 주겠다는 제안.”
“······.”
민준은 더 말해 보라는 듯 침묵으로 재촉했다.
한편 델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방금 전면전을 대비한 자살을 지시해 놓고, 바로 민준에게 휴전을 제안하는 의도는?
“당신과 그 교단이 권역 내 행성을 어떻게 지배하든, 무슨 방법으로 포교하든, 불신자들은 다 처형하든 말든. 그 영역 내에, 신격이 최고의 존엄이고 교단이 유일한 정치체계이며 경전이 절대적인 법전으로 기능하는 조직··· 그러니까 ‘신성은하제국’ 같은 것을 세우든 말든 위원회는 관여하지 않겠다.”
그런 직후 왕이 덧붙인 문장은 묘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원한다면, 위원회는 당신이 세운 제국에 달란트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
듣고 있던 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충격에 빠졌던 정신이 다시 또렷해질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저 말은 명백한 도발이었기 때문이다.
비밀 협상을 제안해 놓고, 정작 얼굴을 마주한 민준을 화나게 만들려는 것인가?
저 제안은 그가 절대로 받아들일 리 없는···.
‘아, 잠깐만.’
곧 이상하다는 걸 깨닫는다.
방금 전 극노의 기운을 표하던 민준 주변은 고요하기만 하다. 정작 이번에는 분노의 낌새가 없었다.
델은 왕의 말을 다시 곱씹는다.
‘방금 한 말, 주어가 위원회였어.’
엔델리온이 아니라 위원회.
그때, 민준이 별 감흥 없는 어조로 말했다.
“지금 위원회 내에서 그런 논의가 오가고 있다는 건가?”
엔델리온의 왕이 촉수짓으로 긍정했다.
참으로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한 몸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