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7
37. Princess Run (12)
***
사람들은 오만식을 우직하고 깊은 인물로 평한다.
그런 그에게는 순수한 신념이 몇 가지 있었다. 경쟁업체들이 사업을 접는 와중에도 화로가 꺼지지 않게 노력하고 생산을 계속한 것도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국내 연금술사의 해외 이탈을 막아야 한다는 신조. 이 나라 황금 시장을 외국 기업에게 송두리째 넘길 수 없다는 일념이 그를 포기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남’과 ‘우리’를 구분 짓는 그의 기준은 상황에 따라 충분히 확장될 수 있었다. 위에서 말한 ‘우리’는 민족성을 묶는 단어로 쓰였지만 때때로 그 단어는 같은 종족을 묶는 더 큰 개념이 되었다. 거대한 적을 만날수록 ‘우리’는 확대되었고 그는 항상 팔 안쪽에 속하는 이들을 위해 애쓰고 노력했다.
그런 오만식에게 인외 종족은 절대로 ‘우리’가 될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민족성으로 보나 종족으로 보나 그 어떤 측면에서도 같이 묶일 수 없는 이들이니까.
오만식에게는 순수한 신념이 있었다.
인간이 아닌 종족은 배척해야 한다.
‘당사가 귀사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하기 매출 채권을 저당권 및 소유권 이전청구권 보전의 가등기와 함께 금번 다음과 같이 양도하였음을 민법 제450조의 규정에 의거 통지합니다.
양도인: 지구 차원 대한민국 ㈜ 국제상사.
양수인: 겔랑코 차원 연합왕국 (왕) 베르미 공주.’
고지서를 받았을 때 오만식은 분노로 두 눈이 뒤집혀버렸다.
그가 어렵게 회사를 굴린 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위해서였다. 그 노력을 짓밟듯 채권자는 빚을 받아낼 권리를 외계인에게 넘겨버렸다.
이것은 아마도 오래 전부터 준비된 계획일 것이라고 오만식은 예감했다. 그들이 연금술에 필요한 원자재를 싼 가격에 공급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해당 자재는 슈탄인의 인체합성금을 가공할 때도 쓰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답이 나왔다. 그는 자신이 놀아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슈탄인 공주가 회사를 좌지우지하기 위해 세운 계획이었던 것이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장님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남자는 오래 전부터 오만식과 그의 회사를 주시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종족을 차별하는 경영철학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관심을 가지고 살피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었으니까.
그는 베르미 공주에게 테러를 가할 계획이었고 오만식이 그 과정을 도와주기를 원했다.
‘공주가 이끄는 슈탄인들이 제8차 집단이민을 계획하는 중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번 방문도 그 사전준비이고요.’
‘······하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그 여자가 채무 상환을 독촉하기 위해 오는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저희 회사에 미리 알리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원래 그런 식입니다. 굳이 한국으로 오는 걸 보면 이번에는 한국 회사들이 대상이겠죠. 다들 각오하고 있습니다. 불시에 습격처럼 찾아올 것이라고요.’
‘물론 그 이유도 있겠지요. 아시다시피, 진실을 가릴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진실 속에 숨기는 거니까요.’
두 목적 모두 사실이며, 집단 이민 이슈를 숨기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채무 독촉 목적만 내세울 것이라는 말이었다. 끝까지 망설이던 오만식에게 상대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설사 이번 방문이 집단 이민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또 어떻습니까?’
‘네?’
오만식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우리는 평범한 인간들, 가엾은 우리 인간들이 느끼는 절망감과 분노를 위정자에게 표출하려는 겁니다. 인간의 자리를 흔들고 갉아먹는 외계인에게··· 인간도 아닌 것들에게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거지요.’
‘······.’
‘아시겠습니까? 슈탄인이 진짜로 이민을 올 것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죠. 그리고.’
상대는 입가에 초승달 같은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게 중요하지 않은 건 사장님도 피차 마찬가지 아닙니까?’
베르미 공주가 죽어도 채권은 누군가에게 상속될 것이다. 그들은 오만식의 부채 전액을 대신 갚아주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연금술 업체 빅 파이브의 장난질에서 버텨낼 수 있도록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 약조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공주가 지구 방문 일정 중 그를 찾아올 것은 확실했다. 오만식은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주 간단한 몇 가지 행동만 하면 그만이었다.
증거는 남지 않을 것이다.
분명, 남지 않아야 했다.
– 사장님! 지금 1층 로비에 이민국 직원들이!
당황한 직원이 쏟아내던 말을 듣던 오만식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눈을 지긋이 감았다.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어떻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민국 요원의 악명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붙잡히면 폐인이 될 때까지 심문당할 것이다. 하물며, 이번에 그가 어떤 집단과 엮였는지 생각하면 차라리 지금 이곳에서 모든 것을 끝내는 게 낫다고 생각되었다.
그는 모진 결심을 내렸다.
조용히, 두 손에 마력이 모인다. 연금술사로서 그는 평생 화학공업마법에만 몰두하였으나 그런 주문이라고 살상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흡입하는 순간 극독으로 작용하는 화학물질을 연성하려 했다.
하지만 공격 주문이 아니었기에 연성되는 속도는 꽤나 느릿했다.
그것이 그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쾅!
문이 굉음과 함께 열리고.
“!”
오만식은 절망에 물든 눈으로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떠올렸던 얼굴이 지금 문 앞에 서서 노려보고 있었다. 냉담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그는 민준이었다.
이민국이 상가에 파견한 요원이 언데드 곤충 떼를 무사히 ‘성불’시키고 난 뒤 민준은 백업 인력을 파견 받아 고려정밀연금을 덮쳤다. 다른 요원들이 각 층에 퍼져 압수수색을 진행하는 사이, 민준은 뭔가를 예감한듯 바로 사장실을 향한 것이다.
휘릭!
그의 소매에서 긴 가죽 끈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바람을 가르더니 의자에 앉은 오만식을 감아버린다.
“흐읍!”
오만식은 준비하던 주문이 산산이 흩어져버린 것을 깨달았다. 마력이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마법을 외울 수 없다. 손이 묶이고 움직임이 제한당한 이상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불가능했다.
무방비해진 그 앞에 민준이 섰다. 요원의 차가운 시선과 오만식의 자포자기한 눈빛이 교차했다.
민준이 물었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주저하지도 않고 답했다.
“예민준 선생님. 이번 일은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도 부르기 전에 여기서 날 심문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인권연대와 손잡은 뒤 그들의 충고에 따라 보여주기 식으로 억지로 잠깐 고용한 트롤 변호사 대신, 이번에는 ‘진짜’ 변호사를 부를 생각이었다.
“선생님, 내게는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
“아뇨, 없습니다.”
단호하게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이런 일을 꾸민 순간 각오했어야지요. 대한민국 헌법 제4차 수정안에 의거, 당신은 지금부터 이 나라 국민으로서의 기본권이 일부 제한됩니다.”
그러자 오만식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면서 외쳤다.
“왜 그들 편을 드는 겁니까?!”
“······.”
묶인 용의자는 감춰왔던 불꽃과 같은 분노를 터뜨렸다.
“일곱 번입니다. 인류는 이미 일곱 번이나 겪었어요! 그렇게 몰려온 외계인 중 인간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인 종족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바로 당신들, 엘프 말입니다!”
대외적으로는 쿼터 엘프, 즉 75%는 인간인 민준을 향해서도 ‘당신들 엘프’라고 쏘아붙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민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저것이 인간우월주의자다.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종족 피가 섞였으면 인간이 아니다. 그저, 다른 무언가다.
“그래요, 당신들에게는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전쟁 때 부모 형제 모두 잃고 시장에서 구걸이나 하던 제게 마법을 가르쳐 준 스승도 엘프였죠. 나는 평생 그 빚을 갚아 나갈 겁니다. 하지만··· 다른 종족은 아니에요!”
“베르미 공주는 집단이민을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습니다.”
“그 말을 누가 믿습니까!”
하지만 상대의 눈을 본 민준은 알 수 있었다. 오만식 역시 그 음모론을 믿지 않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누군가는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움직인다. 이번 일은 오만식에게 두가지 목적 모두를 이룰 절호의 기회였다. 다소의 인지왜곡이 선택을 더 쉽게 만들었을 터다.
민준은 더 이상 싸늘해질 수 없을 만큼 차디찬 어조로 말했다. 그가 가장 분노하는 이유가 입 밖으로 나왔다.
“당신이 대체 누구랑 손잡은 줄 압니까?”
“······.”
“인권연대입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계획이 뭔지 알아요? 이 세계에서 인간이 아닌 지성체를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겁니다. 다시 말할까요? ‘없애는’ 겁니다. 쫓아내든지, 다 죽여버리든지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인외 종족을 처참하게 살해했는지···!”
속이 빈 껍데기 같은 말이 오만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서 뭐 어떻다는 겁니까?”
“?!”
노인은 감정기가 묻어나오지 않는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겁니까? 그네들이 얼마나 죽어 나가든 무슨 상관입니까? 어차피 인간도 아닌데.”
민준은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를 바라보는 오만식의 눈동자는 소름 끼치도록 맑았다.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한 점의 의혹이 없는 눈빛.
인간을 위해서 동물을 죽일 수 있다면, 인간을 위해서 이종족 역시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진 자의 눈이었다.
그들에게 마음이 있고, 감정을 느끼며, 인간에 비견될 만한 지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리와 다르다.
그들은 우리가 아니다.
오만식의 도덕은 오로지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 내에서만 기능했다.
“당신은.”
민준은 대화를 마무리짓기로 했다.
“원래는 내가 심문할 생각이었습니다. 가장 신사적이고, 가장 효율적이며, 당신이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요. 하지만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위에서 급하게 지시가 내려왔거든요.”
요원은 그제서야 두 눈에 약간의 동정을 띄웠다.
악의가 섞인 연민이었다.
“엘더 드래곤이 당신을 직접 심문할 겁니다.”
“?!”
“내 방법은 기껏해야 상대가 기억하는 내용을 자백하게 만드는 정도죠. 하지만 드래곤만 쓸 수 있는 마법 중에는 정말 기묘하고 고약한 주문이 많습니다.”
오만식의 눈빛이 무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을 넘어선 무언가 그를 기다린다는 걸 예측한 듯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생물의 뇌기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종류도 있는 거, 압니까?”
민준은 쓸 수 없는 그 마법은 간단하게 말해서 뇌를 대상으로 한 오버 클럭이다. 그 과정에서 피심문자는 본인도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모든 기억을 재구성할 것이다. 인권연대와 접촉했을 때 상황, 주변에는 누가 있었는지, 상대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그가 입고 걸친 모든 디테일과 단어 한 마디 한 마디까지 전부.
물론 그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쉽게 미치거나 죽지도 못할 겁니다. 그 고룡이 데리고 있는 요원 중에는 신의 축복을 진하게 받은 양반들이 많거든요.”
“······!”
몸을 떨기 시작한 오만식을 다른 요원이 데리고 나가던 중, 민준의 전화가 또 한 번 울렸다.
블레어.
발신인의 이름을 확인한 민준의 표정이 굳었다. 이쪽에서 굳이 먼저 전화를 해 왔다는 것은···.
“네?!”
그리고 전화를 받은 그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
현장에는 지독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브래들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는 단 한 번의 공격에 즉사한 것으로 여겨졌으니까. 나머지는 그렇지 않았다.
범인은 현장에 고작 15분 남짓한 시간 머문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한 자들 입장에서는 영겁같이 느껴진 15분이었을 것이다.
브래들리를 제외한 이들은 온 몸의 뼈가 부서지고 몸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으며 누가 누군지 확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지하주차장의 콘크리트 벽과 바닥에는 살점과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곤죽이 되어 서로 엉겨 붙은 처참한 모습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요원들마저 구토하게 했다.
민준은 그 아수라장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시선을 한군데에 고정시킨 상태로.
‘브래들리.’
브래들리는 엉망으로 찢었다가 다시 봉합한 봉제 인형이 되어 있었다.
상대는 그의 몸을 단번에 양 갈래로 찢은 듯하다. 그 다음에는 몸 안의 피와 내장, 뼈를 다 긁어 낸 뒤 이물질을 가득 그 안에 퍼붓고 채워 넣었다. 마지막으로는 찢은 두 조각의 몸을 어설프고 헐겁게 꿰매어 놓은 것이다.
안에 무엇을 넣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곳곳에 빨간 꽃잎이 몇 장씩 보였다. 그것들은 흥건한 피 웅덩이 속에서 흠뻑 젖은 채 떠다니거나 붉은 신발자국 위에 짓이겨져 있었다.
범인은 봉합된 브래들리의 몸 속에 빨간 장미 꽃잎을 가득 채워 놓았고, 민준은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인간의 살가죽으로 포장한 꽃다발.
상대가 그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선물이야, 너를 위한.
“저··· 예민준 요원님.”
흔하지 않은 이능력을 지닌 요원 한 명이 와서 속삭였다. 그가 확인해 달라고 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영혼은 이미 빠져나가서 근처에 없습니다.”
“······알았다.”
위원회는 아직도 영혼의 구성 물질을 완전히 해독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위원회조차 영혼을 다루려면 매우 애를 먹는다.
수형자 몸에서 영혼을 뺀 다음 다른 육신으로 전이하는 기적과 같은 마법은 준비물도 많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위원회 입장에서도 매우 큰 위험과 부담, 자원을 소모하는 종류였다.
따라서 수형 생활을 마친 자들은 일단 기억을 먼저 돌려받고, 그 다음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몸을 돌려받는다.
그럴싸한 핑계는 있었다. 본래 몸으로 돌아가기 전에 되찾은 기억에 익숙해지는 기간을 보내야 거부 반응이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형자들은 그 진짜 이유를 알았다. 기억을 찾은 이들이 몸까지 돌려받기 전에 자살해버리는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아서 죽으면 굳이 위원회가 자원과 노력을 소모하며 전령을 해주지 않아도 된다.
다시 말해서, 위원회는 저 먼 차원에 파견한 수형자가 사망한 것을 파악한 직후 손쉽게 그 영혼을 불러들여 다른 몸에 이식하는 ‘신’과 같은 일은 벌일 수 없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위원회가 원하는 한 그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함의하는 바는 잔인할 만큼 명백했다.
브래들리는 죽었다.
“예민준 요원님?”
블레어가 자신을 세 번 부르고 나서야 민준은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이례적이게도 현장에 직접 나와 있었다. 해외에서 초빙한 요원이 사망한 이 상황에서 사무실에 처박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준은 고개를 돌리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생각하던 내용을 빠르게 말한다.
“이 위험한 낚시질은 중단합니다. 베르미 공주는 당장 본래 차원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터미널이 폐쇄된 상태이긴 하지만 애초에 그것도 젠킨슨이 지시한 것이니 특별한 예외를 두는 것도 젠킨슨 지시가 있으면 가능할 겁니다.”
민준은 흥분한 나머지 드래곤을 언급할 때 ‘회장’이라는 직책을 붙여 호명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분위기를 파악한 블레어는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개입니다. 애초에 베르미 공주를 미끼로 우리가 노렸던 것은 인권연대 고위층 정보를 파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심문한 그 마법사가 잘못 알고 있었어요. 고위층이 나선 것은 맞지만 직접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대신 ‘외부’ 용병을 초빙했습니다. 이미 여기서부터 우리 예상에서 벗어났어요.”
그는 또 하나의 이유를 말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제가 무책임하게 손을 뗄 수 없는 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베르미 공주가 습격을 당한 와중에 호위를 그만둘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하루 빨리 공주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이민국이 그녀를 더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도록.
다른 말로, 민준이 공주를 더이상 보호할 필요가 없도록.
그래야 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민준은 지금부터 총력을 다해 브래들리를 이렇게 만든 자를 쫓아서 죽여 없앨 생각이었으니까. 보호할 상대가 있는 상황에서는 전력을 다해 사냥에 나설 수 없다.
블레어는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를 씹어 뱉듯 말하는 민준에게서 낯설지 않은 위압감을 느꼈다. 차갑게 제련된 분노와 함께 감히 저항할 수 없는 기백이 새어 나왔다. 가까스로 표정으로 드러내는 것은 막았지만 그녀는 완전히 압도당하고 있었다.
엘프는 이 기시감의 정체를 알았다. 그녀의 고용주가 극도로 분노했을 때, 그 앞에 선 순간 그녀가 느끼곤 하는 위압감과 닮아 있었다.
“그럼, 요원님은 이미 용의자의 정체를···.”
“짚이는 상대가 있습니다. 아니, 100% 확실합니다.”
민준은 현장에 도착하자 마자 두 눈동자에 백색의 불꽃을 둘러서 영계 풍경을 살폈다.
물질계의 공간 좌표와 겹쳐진 차원층에서 그는 용의자가 남긴 마법적 흔적을 보았다. 빛을 직시한 직후 눈꺼풀 안에 남는 형광색 잔상처럼 곳곳에 뻗고 일그러진 기이한 형태들.
그런데, 이번에는 그 흔적들이 의도에 맞춰 정렬되어 하나의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상대는 뒤늦게 이곳에 도착해서 영적인 흔적을 탐지할 자가 그것을 봐 주기를 원한 것이다.
무척이나 선명한 의도를 담은 그것은 한 줄의 영어 문장이었다.
Baby, I missed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