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50
50. 21세기 로빈 후드 (4) >
***
한국은 젠킨슨의 영지다.
창천(蒼天)은 본래 중국에 살던 고룡이며 젠킨슨의 허락을 받고 수십 년 전 한국에 레어를 꾸렸다.
그녀가 이 나라로 건너올 당시 중국은 광동(廣東) 독립선언으로부터 촉발된 내전 때문에 풍비박산이 난 상태였다.
중공 시절 중국의 영토와 인구, 자원은 용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던 반면 경제 시스템은 성미에 차지 않았다. 불만사항을 직접 해소하기로 마음먹은 용족이 나서자 중국의 분열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각 군벌 및 독립세력 뒤에는 고룡이 하나씩 붙어 그들을 장기말로 부리며 전쟁을 수행했다.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 대륙을 닥치는 대로 난도질하고 국경을 긋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 것.
그 과정에서 인간들은 인지하지 못한 채 용의 병사로서 싸웠다. 그들의 지도자가 드래곤의 하수인이라는 걸 아는 자는 드물었다. 숙청과 혁명 때문에 당시 중국에는 이미 용 말고 인외 종족을 찾기 힘들었으니 밖에서 본 전쟁은 오롯이 인간의 것이 되었다.
종전 계기는 1970년대 말 사천성의 핵탄두 저장고에 한 고룡이 궁극마법을 떨군 사건이었다. 핵분열과 광역마법, 저주, 망령들의 악다구니가 섞인 결과 반경 수백 킬로미터를 덮는 방사능 폭풍지대가 생겨났다.
앞으로 수만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예측되는 그 폭풍은 이지(理智)를 가진 것처럼 호시탐탐 영역을 넓히려고 시도했다. 이대로면 다른 고룡의 것을 빼앗기는커녕 이미 가진 것도 오염될 상황에 빠진 용들은 마법으로 대방벽(Great Wall)을 세워 각자의 나라를 방어했다.
진실은 늘 그렇듯 은폐되었고 고룡들은 10억 중국 인민의 수호신으로 숭상받게 되었다. 지금도 잘게 쪼개진 각 독립국가 정부는 마법 장벽 유지비 및 방위비 명목으로 고룡들에게 막대한 보물을 공납하고 있다. 옛 중국인들이 가상의 용신에게 해일과 홍수를 막아 달라는 기도를 올렸다면, 현대의 중국인들은 방사능을 막아주는 고룡들에게 혈세를 바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살아남은 용들에게는 해피 엔딩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용도 있었다.
창천의 부군이었던, 그녀보다 천 살 넘게 어린 연하남도 그 중 하나였다.
‘이제 이 땅은 지긋지긋해.’
젠킨슨은 이주를 허락했다. 그녀는 앞으로 반 은둔 생활을 할 것으로 보였으며, 자청해서 두 가지를 용언(龍言)으로 약조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약속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창천은 향후 절대로 젠킨슨의 정치적인 지위를 넘보지 않을 것이며 그에게 위해가 될 군사 조직을 결성하지도 않겠다는 것.
결과적으로 창천은 그 약속을 모두 지킨 셈이 되었다. 그의 영지에서 일체의 ‘영리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한 적이 없으므로.
“온다.”
용이 다가오는 낌새를 알아차리는 것은 당연히 민준 보다 젠킨슨이 빨랐다. 인간으로 변신한 그의 눈가에 옅은 살기가 번뜩였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접견실 문이 열리고 수행원도 없이 왜소한 몸집의 누군가 들어섰다.
고급스러운 광택이 나는 푸른색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고블린 노파였다. 고블린 신체에 맞게 커스텀 한 것이 분명한 비녀와 귀걸이, 반지 등 장신구는 하나 같이 고가의 아티팩트였다. 정체가 누구인지 궁리할 이유는 없었다.
젠킨슨이 감쪽같이 표정을 바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님!”
하얗게 샌 쪽진 머리 아래 노파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아우님, 이게 얼마 만이야!”
생이별했던 부부 상봉처럼 두 용은 온 몸으로 기쁨을 표하며 서로를 맞이했다. 배경 지식 없이 봤을 때 둘이 원수 지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이는 드물 것이다.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를 서로에게 보내는 두 용을 보며 민준은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니, 왜 갑자기 고블린으로 폴리모프 한 거에요? 처음 아닙니까?”
“내가 요즘 그 종족에 갑자기 관심이 많아져서 말이야. 그러는 아우님은 아직도 그러고 다니나?”
“제가 뭐 어때서요?”
“라이프사이클로 따지면 우리 둘 다 노년이야. 그런 양반이 반 백년 동안 아슬아슬하게 어린 인간 남자 모습을 하고 다니면 남들이 오해하지 않겠어? 어린 남자애가 되고 싶다거나, 어린 남자애로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거나. 둘 중 어느 쪽이라도 오해하는 입장에서는 불쾌한 상상을 할 만하지.”
“제 주변 사람들은 그런 오해 안 합니다. 저를 잘 이해하니까요. 하긴, 용족 말고는 이 땅에 사는 지성체를 다 기계부품 취급하는 누님 입장에서는 이런 정서적인 교류를 상상하기 힘드시겠죠.”
“피지배층과의 정서교류? 그들이 참 고마워하겠네.”
그렇게 하하호호거리며 할 말은 다 뱉던 둘은 깨끗하고 정돈된 미소를 유지한 채 자리에 앉았다.
고블린의 시선이 이번에는 민준 쪽으로 기울었다.
“이렇게 대면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군요, 요원님.”
민준 입장에서는 필요 이상으로 예의를 차릴 필요도, 신경전을 벌일 필요도 없었기에 적당히 대꾸했다.
창천은 젠킨슨을 앞에 두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녀가 손짓하자 문이 다시 열리고 비서가 들어와 서류를 둘 앞에 놓았다.
노파는 젠킨슨을 보며 말했다.
“일단 고블린 이야기부터 할까? 우연히 그쪽 관심사도 이 종족인 것 같더라고. 대충 짐작해 보건데, 가능한 많은 고블린의 DNA를 수집한 다음 대조 분석해서 특이 패턴을 조합하고 싶은 것 같던데. 맞지?”
민준은 젠킨슨을 째려보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눌렀다. 이미 정보는 탈탈 털린 후였다.
“사실 나는 고블린 DNA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굳이 설명하자면 고블린 자체에 관심이 있다고 할까?”
약간 거친 손길로 페이지를 넘기던 젠킨슨의 눈썹이 올라갔다. 확인한 내용을 말한다.
“그러니까, 의료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빈민들을 위한 자선 사업을 시작하시겠다? 사비를 들여서?”
창천은 소유하고 있는 복지행정 및 의료 관련사를 동원하여 도시빈민을 위한 의료원을 건립할 계획이었다. 그녀의 계획은 크게 두 가지 트랙이다. 중증의 환자들을 입원시킬 병상을 마련하는 것과, 질병 유무를 체크하고 필수 백신을 투여하는 것.
‘이 정도면 국가 규모의 사업인데.’
젠킨슨이 의심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묻는다.
“왜 갑자기 이러는 겁니까?”
“갑자기라니? 이게 다 사회의 이익,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업이야.”
“?”
“고블린 이야기하던 중이었으니 그 종족을 예로 들어 볼까? 고블린이 걸리는 병은 오크나 인간에게도 전염되는 케이스가 많지. 그런 고블린 중 다수가 병원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다는 것은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위험요소 아니겠어?”
민준은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게 다 당신이 운영하는 보험사가 청구하는 비싼 보험료 때문일텐데.’
여하튼 창천이 말하는 요지는 이것이었다. 상황이 지나치게 악화되었으니 지금부터라도 그녀가 나서겠다는 것. 서류를 뒤적이던 민준이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적어도 몇 달 전부터 준비한 것 같군요.”
“그렇답니다, 요원님.”
민준 때문에 가짜로 꾸며낸 사업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서류를 계속 응시하던 그는 또 뭔가를 발견하고 말했다.
“의료원을 짓는 부지는 대부분 오크 커뮤니티와 인접한 곳들이군요?”
“아무래도 빈민들이 몰려 사는 곳과 가까울수록 효율적이니까요.”
“김광우 회장과는 이야기 다 끝난 겁니까?”
대화에서 언급한 적도 없고 서류에 등장하지도 않는 이름을 민준이 갑자기 말하자 고블린의 눈가에서 묘한 빛이 번뜩였다. 민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대단하네요. 어떻게 그 땅 주인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죠?”
민준은 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오크로 알려진 어떤 사업가가 서류에 등장하는 부지 대부분의 실소유주임을 알고 있었다.
“그쪽 땅이 다 김광우 회장 거라는 이야기는 딱히 비밀도 아니죠.”
“뭐, 그렇긴 하네요. 요원님께서 신경 쓰실 부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씀드리면 토지임대계약은 진작 완료된 상황이랍니다.”
드래곤은 화제를 바꿨다.
“아무튼 모든 도시빈민에게 접종을 하고 질병 유무를 체크하는 과정에서 DNA 샘플까지 수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요. 젠킨슨 아우와 요원님은 이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어때요? 이건 충분히 서로 손잡을 수 있는 영역인 것 같은데.”
그러면서 덧붙였다. 빈민으로 취급되지 않는 소수의 고블린 데이터는 다른 방법으로 제공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흐음.’
일단 한국의 고블린부터 시작해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다. 애초에 민준도 지구 단위의 전수조사까지는 기대도 안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기에서 대뜸 승낙을 외치지는 않았다. 저쪽에서 당근을 먼저 내밀었으니 그 뒷면에 뭐가 숨어있는지를 확인해야 할 터.
젠킨슨이 말했다.
“그래서, 의뢰하고 싶은 일은 뭡니까?”
“얼마 전에 창천은행 본점에서 도난 사건이 있었어요.”
이건 무슨 드래곤들의 수난시대인가?
젠킨슨 레어가 털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번에는 창천이 소유한 은행이다.
‘그렇게 쉽게 털릴 은행이 아닌데. 하물며 본점이라면.’
민준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설마 현금을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죠.”
“?”
드래곤은 처음으로 난처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도난당한 것은 달란트에요.”
민준이 선뜻 이해가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달란트?”
그가 알기로 대부분의 달란트 거래는 데이터로만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도난당했다는 것은···.
“설마 실물 화폐를요?”
“맞아요.”
점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영체와 물체의 경계에 있기에 보관도 운반도 까다로운 그 화폐를 이런 변방에서 출금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걸 손에 쥐지 않고 있어도 모든 거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위원회가 내 줬습니까?”
“제 돈인데 당연히 줘야죠. 그런데도 인출 과정에서 엄청나게 까다롭게 굴긴 했어요. 지쳐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건가 의심이 될 정도로···. 100만 달란트가 적은 돈은 아니긴 하지만.”
뭐? 백만?
표정의 동요를 최대한 숨기며 묻는다.
“실물을 가지고 있어 봤자 관리하기 번거롭기만 할 텐데 굳이 인출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라니요? 저희는 은행인걸요. 리스크 방지 목적에서라도 조금은 확보해 둬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위원회가 파산할 경우를 대비해서요?”
“세상에 100% 확실한 것이 뭐가 있겠어요.”
석연치 않은 해명이었다. 민준은 창천이 뭔가 숨기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어쨌든 제게는 그 도둑을 추적할 조직이 없지요. 여기 계신 아우님께 용언으로 맹약한 내용이 있으니까요. 경찰한테 맡기는 건 농담거리도 못 되고, 그럼 결국 외주를 맡겨야 하는데···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제일 가는 분이 역시 예민준 요원님 아니겠어요? 누구보다 긴 경력을 가지고 계시니.”
창천도 고룡이니만큼 민준의 정체를 알고 있다.
“이 일을 맡아 주시면 고블린 DNA 수집과 분석에 그룹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돕겠어요. 그리고 회수된 달란트의 10%를 사례로 드리죠.”
그러더니 묘한 시선으로 민준을 바라본다.
“그런데··· 수형자가 달란트 실물을 소지하는 것은 합법인가요, 불법인가요? 원하시면 바로 수형자 계좌로 넣어 드리죠. 단, 증여세까지는 제가 못 낼 것 같으니 참고하시고요.”
그녀는 웃으면서 답을 재촉한다.
“자, 어떻게 하시겠어요?”
***
“민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미팅이 끝나자 마자 바로 텔레포트로 젠킨슨 본사로 돌아온 두 사람은 작전 회의 시간을 가졌다.
“창천이 실물로 달란트를 인출해서 가지고 있는 이유?”
“음··· 그래. 일단 그것부터.”
“확실히 말하는 것이 수상하긴 했지.”
해명도 석연찮았다. 더 나은 핑계를 대지 못한 것은 그것 외에 댈 수 있는 이유가 정말로 없기 때문이다. ‘진실’ 외에는.
은행이 화폐 실물을 금고에 보관하겠다는 말은 당연한 문장이지만 그 대상이 달란트면 경우가 달라진다. 유지 비용과 난이도, 위험을 생각할 때 더더욱. 그 생각을 하던 민준은 문뜩 의아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왜 다들 지금 시스템을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는 거지? 달란트 보관을 잘못하면 영계로 증발해 버리는 위험은 알아. 결계 만드는 데 자원이 소모되는 것도 알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화폐 실물을 각 차원에 뿌리는 대신 위원회에서 그대로 갖고 있는 걸 정상이라고 할 수가 있나?’
물론 보관 비용을 위원회에 넘긴다는 점에 있어서 그러는 쪽이 이익이긴 하다. 위원회를 100% 신뢰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선택.
하지만···.
‘이상하게 꺼림칙한데.’
수형자 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느낀 의문이었다.
“그리고, 또 있네.”
민준의 생각은 젠킨슨 때문에 끊겼다.
“그 의료원도 이상해. 뭔가 냄새가 나.”
“아무리 들어도 창천이 먼저 나서서 할 만한 일이 아니지?”
병주고 약주고도 아니고, 고블린 대부분이 건강보험을 상실한 지금 상황에 일조한 원흉이 뒤늦게 예방접종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미심쩍다.
“젠킨슨, 범인 잡기 전에 한 가지 간단하게 확인 좀 해 보자. 창천이 약속한 대대적인 사업이 진짜인지 검증을 해 봐야겠어.”
“어떻게?”
“창천 내부를 털 수는 없으니 이 비즈니스에 엮인 외부인과 대화를 나눠 봐야겠지.”
민준은 바로 캐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김광우 회장이랑 인터뷰 좀 잡아 줘. 응, 맞아. 그 오크. 혹시 거부하면 이민국에 말해서 소환장 받아.”
그렇게 말하며 젠킨슨에게 눈짓을 하자, 드래곤은 투덜거리며 블레어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준이나 캐시에게 연락이 올 경우 전적으로 협력하라는 지시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일단 전화를 끊고 몇 분 뒤, 캐시로부터 다시 걸려 온 전화를 받은 민준은 당황했다.
김광우 회장의 현재 소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뭐어? 안식년 휴가를 받아서 이계로 여행을 떠났다고? 그것도 몇 주 전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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