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77
77. 불신지옥 (5) >
차원 #77-102는 수형자 입장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다.
그곳 주민들이 위원회 동의를 얻지 않고 일방적인 터미널 봉쇄를 선언했을 때 많은 이들은 상황이 곧 해결될 거라 예상했다.
터미널은 상시 개방된 마법의 문 같은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차원여행자들이 수속을 밟고 대기하는 공간과 차원이동관제유도시스템 등 필수 설비가 배치된 건물의 총칭이었다.
그런 건물이 폐쇄되었다고 해 봤자 차원 이동의 핵심 요소는 위원회가 통제하는 도약선이다. 종전 당시 용족이 차원이동주문의 영구폐기를 약속한 뒤 남겨진 유일한 수단 말이다.
여하튼, 수형자들은 고도의 기술을 지닌 위원회가 마음만 먹으면 차원 #77-102 내부를 자유자재로 염탐하고 그들을 협박하여 일방적인 봉쇄를 중단하도록 압박할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수형자들에게 그 차원을 살펴보라고 떠밀었는데, 도착지 유도 없이 착륙을 시도하는 행위는 자살시도나 마찬가지였기에 그 임무는 지금까지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위원회에게는 방법이 있을 텐데 말이야.’
1945년 퍼스트 컨택트(First contact) 당시에도 지구에는 터미널이 없었지만 위원회는 지구 상황을 낱낱이 파악할 수 있었다.
그때 가능했던 것이 왜 지금은 불가능한 것인가? 왜 하필 차원 #77-102만?
더 중요한 것은··· 분명 그 세계도 달란트로 위원회에 빚을 지고 있을 텐데 왜 거친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계속 방치하는가?
많은 수형자들이 궁금해하고 있지만 아직 실마리는 나오지 않는 중이다.
자신의 가정을 포함하여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민준에게 젠킨슨이 말했다.
“그곳에서 차원계 곳곳에 퍼진 동족들을 다시 고향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고 하네.”
“그래?”
그 차원의 터미널 한 개가 다시 가동을 시작한 후 일종의 역(逆) 디아스포라가 진행중인 모양이었다.
물론 입계를 허락받는 것은 동족뿐이고 위원회 소속을 포함한 다른 종족은 엄중하게 막고 있었다.
“재외국민 현황 같은 것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나 보군.”
“그럴 정신이 있었으면 왜 그때 불러들이지도 않은 채 갑자기 문을 걸어 잠궜는지는 의문이지만 말일세.”
그리고 드래곤은 민준이 죽인 외계인 이야기를 꺼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얄궂고도 비극적인 타이밍이었다. 그가 광기어린 만행을 저지르지 않고 몇 달만 참았다면 고향으로 돌아갈 문이 열렸을 터.
민준은 생각한다. ‘조금만 더 오래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면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다고 그에게 후회나 죄의식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입맛이 씁쓸할 뿐.
“당연한 수순이지만 지구의 총대주교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그 차원에 흘러 들어간 모양이야.”
“그래서 시비라도 걸었어? 어쩌다 죽었냐고?”
“아니, 사인은 드림랜드 교단 쪽에서 철저하게 은폐했더군.”
드래곤의 관심을 끈 것은 다른 내용이었다.
“그 차원에 드림랜드 교단 본부 역할을 하는 조직이 있다고 하네. 이름이··· 그래. ‘교리수호공의회’라는 종교인 회의체인데 말이야.”
그곳에서 죽은 총대주교를 성인(聖人)으로 추대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의 죽음을 순교로 인정하고 업적을 기려 앞으로 숭배하기로 했다고.
“대체 사인을 뭘로 둘러 댔길래? 박해당하다가 화형이라도 당한 걸로 위조했나?”
“아니, 죽은 방법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외딴 차원에서 홀로 고생하다가 위대한 업적을 이룬 부분에 주목한다더군.”
“위대한 업적?”
“나도 몰랐는데 지구의 드림랜드 교인이 30만 명이 넘는다고 하네.”
이번에는 민준도 진심으로 놀랐다.
“3만도 아니고, 30만?! 그 역겨운 짓거리를 벌이는 종말론적 종교가?”
“한국에는 교인이 거의 없지만 외국은 그렇지도 않더군. 저번 구마의식 때 조로아스터교 성직자가 있었지? 지구 토착 종교인 그쪽 보다 드림랜드 신도가 더 많네. 대부분 발리엔과 고블린이긴 하지만···.”
“세상이 대체 어떻게 되어 먹으려고.”
민준은 혀를 찼다.
“아무튼 성인으로 추대되다 보니 그의 시신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라고 공식 요청이 온 모양이야. 하지만 목 아래는 자네도 알다시피 깨끗하게 처리를 했잖는가? 그러니 지구교구 담당자는 남아 있는 머리라도 돌려보내야 할 상황일세.”
“목 아래가 왜 없는지 해명이 골치 아프긴 하겠군.”
방부처리한 머리를 천년 만년 지구에 보관하겠다는 요하임의 계획은 아무래도 틀어질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드림랜드가 고민할 부분이지 민준이 신경 쓸 사항은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민준은 화제를 바꾼다.
“마법진 테스트가 끝났어.”
젠킨슨은 표정을 굳혔다. 동시에 집무실을 둘러싼 결계를 한층 강화한다. 그러자 창 밖에서 지저귀던 발리엔들의 아름다운 노래소리가 뚝 끊겼다.
철저한 대비를 했음에도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드디어 달란트를 그 영혼에서 떼어 내는 건가?”
“응. 내일 가동할 거야.”
그리고 민준은 본론을 말했다. 금발 청년으로 변한 드래곤의 두 눈을 뻔히 바라다보면서.
“그러니까 너, 내일 와서 마력 품앗이 좀 해라.”
“······.”
***
젠킨슨은 다음 날 민준이 시킨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모든 스케쥴을 취소하고서 말이다.
덕분에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손님들과 한국의 기획재정부장관은 급하게 일정을 조정해야 했지만 민준은 그 사실을 영영 모를 것이다.
아침 일찍부터 용이 향한 곳은 과거에는 창천의 레어였고 지금은 젠킨슨의 세번째 레어 취급을 받는 거대한 지저건축물의 지하 30층이었다.
수형자가 달란트를 실물로 취하겠다는 것은 위원회에 절대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극비이기에 단 한 명의 직원도 데려오지 않았다. 최근 배신자까지 징벌한 상황에서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젠킨슨은 골렘을 소환하여 부지런하게 마법진을 가동시킬 준비를 했다.
창천은 부하 여러 명을 부려서 준비하던 일을 혼자 하다 보니 상당히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그렇게 엘더 드래곤이 시간에 맞춰 사전 준비를 끝내자 마자 민준이 등장했다. 빙의된 어린 용과 함께.
본체로 돌아가 있던 젠킨슨이 정신파를 울렸다.
=자네 왔는가? 시킨 대로 마력 충전은 다 끝내 놨···.=
고개를 돌리던 젠킨슨의 두 눈이 커진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민준 뒤에 뒤뚱거리면서 따라오는 어린 용이었다.
젠킨슨에 비하면 고래 앞에 선 미니 피그나 다름없는 드래곤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일단 구면이긴 하니까.
=아··· 안녕하세요?=
젠킨슨은 하은성을 가리키면서 텔레파시로 소리쳤다.
=뭐야?! 쟤 왜 저렇게 살 쪘어? 아니, 애초에 드래곤이 저 정도로 살이 오를 수가 있는 건가?=
하은성은 지하실에 갇혀 있던 한 달 사이 폭발적으로 몸집이 불어난 상태였다.
탈피를 통한 정상적인 성장은 아니다. 골격은 그대로인데 지방만 덕지덕지 붙은 것이 젠킨슨 눈에 훤히 보였다.
그러나 민준은 모르는 척 답한다.
“용 이야기를 네가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
사실 머릿속의 기억은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린 용을 저만큼 살찌우는 건 분명 힘들지만 가능한 일이라고. 가축주의 정성과 지극한 보살핌, 자기 새끼를 돌보는 것 같은 관심을 쏟는다면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고.
오히려 민준은 저렇게 변한 빙의체를 보며 묘한 마음의 안정을 찾고 있었다.
수형자가 되고 나서 그가 본 용들은 다들 체지방 0%에 가까운 근육질 육신을 보유한 흉측한 짐승들이었다. 민준은 그런 드래곤에게 항상 시큰둥한 시선을 던졌다. 몇몇 동료들이 용을 보며 ‘너무도 아름다운 생물’이라고 추켜세워도 민준의 반응은 ‘저게?’ 정도였던 것.
반면 요즘 하은성을 바라보는 그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래, 용이 저 정도는 되어야지.’
밥을 먹지 않아도 저 용만 보면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었다.
=이 몸이··· 그렇게 살이 많이 쪘나요?=
하은성은 의기소침하게 답한다.
사실 그의 폭발적인 체지방률 증가에 기여한 범인은 캐시였다.
민준은 하은성의 관리를 비서에게 일임했는데, 어느 날 아무런 사전 설명 없이 날아온 문자를 보고 캐시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 지하실에 용 하나 있어. 걔 밥 좀 먹여.
식이조절을 포기하기 전 젠킨슨처럼 정제된 마나를 흡수하는 경지가 아닌 이상 드래곤이 날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캐시도 알았다.
하지만 혹시나 싶어 정상적으로 조리한 음식도 하은성에게 짬처리를 해 본 모양이었다. 대부분 후라이팬을 통한 요리 수련 중에 생겨난 엄청난 양의 잉여요리였다.
=그 키 크고 예쁜 누나가 챙겨준 음식들이 너무 맛있어서···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들은 젠킨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게 말이 되나? 아무리 인간 영혼이 빙의되어 있어도 몸은 용이잖아? 미뢰도 뇌세포도 다 용의 것인데 불에 익힌 음식이 맛있다고?=
민준은 손벽을 짝짝 치면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과체중 문제는 저 몸 주인이 정신을 찾고 나서 해결하겠지. 우리는 우리 할 일이나 하자고.”
하은성은 민준이 인도하는 장소로 뒤뚱거리며 걸어간다.
그리고 용과 수형자의 손짓에 따라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우우웅!
그 장면을 바라보며 민준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그 곁에 선 젠킨슨은 여전히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하은성을 바라본다. 마치 ‘집짐승’처럼 살을 뒤룩뒤룩 찌운 저 모습 역시 용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광경이라고 생각하면서.
=어? 어?!=
마법진이 힘을 발하기 시작하자 중앙에 서 있던 하은성은 내면을 울리는 기묘한 파동을 느꼈다.
예전 창천은행 본점에서 홀린 듯 빛의 결정을 건드렸던 그 순간에 느꼈던 충만감, 그 감각을 거꾸로 뒤집은 듯한··· 허탈한 상실감이 몸 속에 퍼져 나간다.
그리고.
쑥!
유령은 영혼과 결합되어 있던 무언가 강한 흡착력에 휘말려 밖으로 튕겨 나가는 것을 느꼈다.
“추출했다!”
민준은 탄성을 지르며 바로 허공에 손을 내저었다. 마법진으로 공간을 안정화한 상태라 바로 영계로 증발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 재빨리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가 펼친 결계가 정육각형을 만들며 달란트를 안에 품었다.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민준이 손을 뻗자 빛의 결정이 다가왔다.
‘드디어 손에 넣었다!’
감개무량한 순간.
전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채가 레어 안을 가득 채웠다. 계기판을 보던 젠킨슨마저 눈길을 돌려 입을 살짝 벌리고 그 영롱한 빛을 응시할 정도였다.
민준이 역시 달란트에 꽂힌 시선을 유지한 채 소리치며 물었다.
“젠킨슨, 이거 다 합해서 얼마지?!”
=아! 잠깐 기다리게.=
홀렸던 정신을 다잡은 듯 젠킨슨이 고개를 돌린다.
본래 오퍼레이터들이 할 일을 자유의지가 없는 골렘을 통해 혼자 컨트롤하다 보니 할 일이 산더미였다.
잠시 그렇게 소환물을 경유하여 계기판을 두드리던 젠킨슨이 당황한 감정을 흘렸다.
=······어라?=
“왜 그래? 얼마냐니까?”
민준은 이미 자체적으로 추산을 끝낸 상황이었다. 하은성이 그동안 소모한 달란트를 역산해 봐도 절대 10만 달란트는 넘지 않는다. 원금이 100만 달란트라는 것을 감안할 때 못해도 90만 달란트는 남아있어야 했다.
그렇기에 용의 텔레파시는 민준에게 청천벽력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전부 합해서 72만 달란트일세.=
“뭐?!”
민준의 두 눈에서 살의가 번뜩였다.
“다시 한번 봐! 그럴 리가!”
=아니, 정확하네 민준. 이미 추출은 완벽하게 끝났고 저 영혼 안에 남아있는 달란트는 없어. 지금 자네가 손에 든 달란트는··· 72만이네.=
휙!
민준의 얼굴이 살찐 드래곤을, 정확히는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영혼을 노려본다.
“너··· 대체 한 달 사이에 뭘 한 거야?!”
그 시선을 마주한 하은성은 이미 죽었음에도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요원은 언제라도 자신의 목에 칼을 꽂을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한 기세였다.
=저는 아무 것도 안 했어요! 거기 지하실에서 한 달 내내 TV만 봤는데···!=
“그럼 달란트가 왜 18만이나 더 줄어들어 있어?!”
스으으으!
분노한 그의 등 뒤에 망령이 모여든다.
=저, 저는 진짜 아무것도 안 했다니까요! 제발 절 믿어주세요!=
하지만 민준의 두 눈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