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99
100. 부부싸움은 칼로 목 베기 (7) >
“내가 이 정도이니 카인 너도 충분한 금액을 모았을 거라고 생각해. 아마 두 명 정도는 충분히 커버할 것 같은데.”
“······.”
“물론 신중하게 생각할 필요는 있어. 두 명 이상 신청한 뒤 한 명만 부분 취소는 안 되고 일괄로만 가능해. 물론 환불 금액은 없음. 신청받는 시기는 딱 한 달이야. 다음번 신청 기간이 있을지 장담할 수 없고, 만약 있다고 해도 그때는 필요한 달란트가 오를 수 있다는 언급도 했어.”
말도 안 되는 조건이다. 절로 욕이 나왔다.
“다른 건 그렇다고 쳐도··· 50% 달성까지 몇 년이나 남았는데 지금 한시적으로만 신청을 받는다고?”
“인력 배치 계획을 짜려면 이런 세부 내용이 최대한 빨리 결정되어야 한다던데. 실행 시기보다도 몇 년 앞서서.”
물론 그것이 핑계라는 것은 둘 다 알았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전 차원을 통틀어 카인 너 같은 수형자가 드물다는 건 나도 알아. 솔직히 말할게. 난 네가 이 차원에 남아 줬으면 좋겠어.”
수형자들의 리더는 자신이 아는 가장 훌륭한 능력자를 설득한다.
민준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난 이곳에 남을 거야. 하지만 동료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건 큰 위기야. 그러니 네가 남아 준다면 정말 큰 힘이 되겠지.”
그리고 민준 역시 유임을 원하는 동기는 충분했다.
“너도 그걸 원하지? 델과 네가 다른 차원으로 재배치되는 순간 찢길 확률이 더 높잖아?”
“혹시 위원회에서···.”
“이미 물어봤어. 위원회는 수형자들이 향후 재배치될 희망지에 대한 특별 신청은 받고 있지 않아. 그럴 계획도 없고.”
오로지 이 차원에 남고 싶은 경우에만 그 선택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15만 달란트를 대가로.
“나는 그냥 제안하는 거야. 너와 델에게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텔레시아는 민준의 수형자 인식번호를 통해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그 역시 그녀만큼이나 엄청난 퇴직금을 책정받았고, 설사 지금 30만 달란트를 모았다고 한들 어차피 퇴직은 불가능한 상황일 거라고. 그러니 이미 반쯤 포기했을 것이라고.
위원회의 이 제안은 어차피 도달 못 할 자유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현재의 안정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고약하고도 악의적인 제안.
동시에, 너무도 달콤했다.
“카인, 다시 말하지만 나도 아쉬탈을 떠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녀의 이유는 조금 달랐다.
“여러 차원을 돌아다닌 당신과 달리 나는 여기가 첫 파견지이고··· 여태 이곳에서만 머물렀어. 나랑 같이 왔던 1차 파견자들이 결국 여길 떠나고 로테이션을 돌 때도 나는 재배치되지 않았지.”
이곳 주민들이 ‘모든 이들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수형자는 더없이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 평생을 그들을 위해 바쳤어.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절망스러웠지. 그때의 아쉬탈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내가 구해야 하는 빈민들을 봐도 부담스러울 뿐이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마음이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지.”
텔레시아는 털어놓는다.
파견 초기, 굶주림에 시달린 끝에 가족 중 가장 어린아이를 이웃과 교환하여 잡아먹던 빈민들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무너져 내렸다. 약자라는 이유로 그들의 비인간성을 용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을 방황했다. 이곳에서 대체 뭘 해야 하는지, 저들을 왜 도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내면에 변화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억지로, 죽지 못해 한 일들의 여파로 새 삶을 얻은 사람들을 마주하면서부터였다.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았던 아이들이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순간, 피부가 녹는 토착병에 시달리다가 완치된 빈민들이 그녀 발에 입 맞추며 눈물 흘리는 순간, 도적들의 노예로 잡혀가 고된 노역에 시달리던 이들이 가족과 재회하여 목이 터져라 서로 이름을 부르던 순간.
그들은 구원자 텔레시아에게 가식 없는 존경과 사랑을 바쳤다. 그리고 어느 순간 텔레시아는 자신 역시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나는 자유에 대한 욕심을 버렸어.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의 죄이지만 죗값을 갚는 방법이 이런 것이라면 나는 달게 받겠어. 날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영원토록 함께 남아서··· 그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겠어.”
민준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한다.
“당신과 델도 나와 함께해 주면 기쁠 것 같아.”
때론, 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
델이 준비한 80번째 결혼기념일 선물은 단검이었다.
그것을 본 민준은 화색이 되었다.
“이거 진짜 물건인데?”
민준은 짧은 검 형태 마도구를 선호한다. 그걸 잘 아는 델이 직접 제작한 것이다. 성능도 뛰어나 어떤 저주를 걸어도 잘 먹힐 것 같았다.
“지금처럼 매번 자기 뼈 잘라서 쓰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거야.”
민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확실히 그럴지도···.”
이 차원에서 마땅한 검을 못 찾은 민준은 매번 칼 모양으로 변형된 뼈를 살을 뚫고 길러낸 다음 꺾어서 무기로 썼다.
델은 그것을 안타까워하다가 80여 년 연구 끝에 드디어 민준이 직접 제작하는 것보다 뛰어난 제품을 제작한 것이다.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검을 보던 민준은 손잡이에 새겨진 문구를 보았다. 그리고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델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민준은 단검을 잠시 내려놓았다. 이젠 그가 줄 차례다.
“대체 올해는 뭔데 이렇게 꽁꽁 감춰 놨어?”
델은 기대에 가득 차 있다.
평소와는 달리 민준은 빈손이었다. 이런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준비한 것이 파견 행성 숙소에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것이거나, 물질적 선물 대신 이벤트를 준비한 경우.
어느 쪽이든 행복한 비명을 지를 준비를 한다. 델은 반짝이는 눈으로 남편을 보았다.
민준이 입을 열었다.
“놀라지 말고 차분하게 들어.”
그리고 설명이 이어진다. 그녀의 눈앞에 홀로그램 하나를 띄운 채.
민준은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그녀를 위해 30만 달란트를 내고 부부가 함께 남을 수 있도록 보장받은 걸 알려 줄 것인가?
델이 부담감과 죄책감을 느낄까 싶어 주저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더 해 보니 말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델은 요즘 종종 밤잠을 설치곤 했다. 한밤중 조용히 일어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를 모른 척한 적도 몇 번 있다. 언젠가는 두 사람이 강제로 헤어져야 할 운명이라는 걸 잘 알기에, 극도의 불안을 겪는 중으로 보였다.
그런 괴로움을 앞으로 몇 년 더 겪게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된 거야. 이제 우리는 둘 다 여기에 남아 있을 수 있어. 다른 차원으로 배치되어 생이별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여기까지 설명을 마친 민준은 ‘어때?’라고 묻는 표정으로 델을 바라보았다.
“이게 올해 내가 준비한 선물이야.”
그녀가 환성을 지르기를 기대했다.
믿기지 않는다며, 몹시 흥분하여 제자리에서 방방 뛰는 모습을 기대했다.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염동력을 폭주시켜서 주방 식기 몇 개가 또 깨져 나가도 이해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
델의 반응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아내의 표정에 맺혔던 기대감이 희미하게 식었다. 미소가 서서히 굳더니 사라진다.
민준은 불안을 느꼈다.
“왜··· 그래?”
델이 말했다. 위화감이 들 정도로 건조하게.
“얼마나 오래?”
“···뭐?”
“이번 조직 개편 때는 유임이 보장되었다며. 그게 언제까지 유지되는데? 우리가 원하는 만큼 무기한으로?”
민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위원회가 어떤 놈들인지 잘 알잖아. 한 번에 보장받는 기간은 100년이야.”
지금까지 둘이 함께한 시간보다도 좀 더 긴 기간이었다.
하지만 민준의 눈에 델은 그것에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그 다음은? 또 30만 달란트를 낼 거야? 나는 100년을 모아도 그 절반도 못 모아. 내 능력으로는.”
“···델.”
“이런 식으로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안 돼. 100년 뒤 위원회가 금액을 올리면?”
“내가 더 모으면 되지! 앞으로 100년이나 남았으니까···.”
“조직을 축소한다는 건 앞으로 일이 그만큼 줄 거라고 위원회가 예측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들 예측은 좀처럼 틀리지 않아. 지금 여기에 있는 수형자들은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지. 적어도 생존세 걱정은 할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까? 당신, 지금까지 나한테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지? 당신한테 책정된 생존세가 대체 얼만데? 얼마길래 그런 거금을 내놓는 거야?”
민준은 델의 대꾸에서 실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극심한 불안에 기인한 신경질적 반응이라고 여겼다. 아내를 안심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대략 2천 달란트 정도야.”
그러자 델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2천? 그럼 1년에 내야 하는 달란트가··· 2만 5천이잖아?”
“그래. 그리고 지금까지 800년 동안 무리 없이 내 왔지. 그러니까 아직 살아 있잖아.”
자신에게 그 정도 능력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800년 동안 위원회에게 낸 달란트가 2천만 달란트에 달한다고. 그만한 금액을 벌 능력이 자신에게는 있다고.
하지만 델은 납득한 것 같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건 근본적인 방법이 아니야.”
그 말을 한 번 더 입 안에서 되뇐다. ‘이건 방법이 아니야.’
“그리고.”
델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삼켰다.
“왜 그래?”
아내는 입 밖에 내지 못하고 고뇌하던 내용을 힘겹게 흘린다.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나 때문에 더 힘들어질 거야.”
민준은 자신의 솔직함이 역효과를 불러일으켰음을 직감했다.
델은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로 말했다.
“나 때문에 당신 계좌에서 계속 거금이 빠져나가면··· 언젠가는 생존세도 내지 못하고 영혼 소거 당할 수 있어.”
그는 애써 델을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며 그녀를 짐이나 부담으로 여길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델의 눈동자 속에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빛이 스쳤다.
***
한 해가 지나고 나서도 민준과 델은 여전히 행성 XB-610에 있었다.
그리고 그 1년은 민준이 결혼한 뒤 최악의 시기로 여길 만한 한 해였다.
두 사람의 사이가 언제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종이에 물감이 스며들 듯이 천천히, 조금씩 시작된 변화는 선명했다.
그렇게 델은 변해 갔다.
“······.”
민준은 여전히 한밤중에 시선을 느꼈다. 잠을 청하다 말고 조용히 몸을 일으켜서 응시하는 델. 하지만 그 눈빛에는 전과 다른 무언가 섞여 있었다.
섬뜩한 기운이.
이해할 수 없었다. 대화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벽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더군다나 그가 신경을 더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다.
“아샤민, 나 좀 도와줘.”
결혼 81주년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민준은 동료에게 부탁을 했다. 그의 이름은 아샤민. 훗날 지구에서는 브래들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그는 이야기를 듣고 기겁했다.
“델의 개인 비행선을 추적하라고?!”
“그래.”
“아니 그건 네 마법으로도··· 아, 아니지. 상대는 델이지. 금방 알아차리겠군.”
“그래. 실시간 추적은 금방 따라잡혀. 뒤를 쫓으려면 사후에 잔류 사념을 따라가는 방법이 제일 확실해.”
“그런데 미행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야?”
걱정을 가득 담아 묻는 아샤민에게 민준은 진실의 일부를 말할 수밖에 없었다.
“델이 요즘 한밤중에 조용히 집을 빠져나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어.”
“뭐라고?!”
아샤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몰래 나가 봤자 들킬 게 뻔하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랑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데.”
“이젠 감출 생각도 안 해. 말로는 잠이 잘 안 와서 드라이브를 다녀온다고 하는데···.”
심지어 근무 시간 중에도 연락이 되지 않는 시간이 길어졌다. 맡은 임무는 철저히 해내므로 텔레시아나 위원회로부터 질책받은 적은 없지만 남편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카인.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고. 혹시···.”
뒷말을 짐작한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외도는 아니야. 그럴 수가 없어.”
수십 년을 인간형 종족에게 둘러싸여 산 덕에 예전처럼 대놓고 혐오를 표출하진 않지만, 여전히 그녀 눈에 호모 사피엔스는 벌레처럼 보인다.
지성체라고는 인간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민준 말고 다른 이와 사랑에 빠질 확률이 0에 수렴한다는 걸 민준은 잘 알았다.
“바람난 것도 아니면 대체 뭐야?”
“그래서 더 걱정되는 거야. 하지만 입을 꼭 다물고 원체 말을 하려 들지를 않아.”
꿈속의 민준은 아샤민에게 부탁한다.
관찰자 민준은 과거의 자신이 앞으로 평생 후회하게 될 그 말을 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뒤를 쫓아서 알려 줘. 대체 델이 요즘 뭘 하고 있는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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